-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8/01 17:38:57
Name   메존일각
Subject   <동국이상국집>에 묘사된 고려청자
풀잎님께서 사진 게시판에 올리신 '고려청자 사진'( https://redtea.kr/?b=16&n=1933 ) 중 잔탁이 눈에 띄어 간단히 써보는 글입니다.

나무를 베니 남산이 빨갛게 되었고 / 落木童南山
불을 피워 연기가 해를 가렸네 / 放火烟蔽日
청자잔을 구워내 / 陶出綠甆杯
열 중 우수한 하나를 골랐구나 / 揀選十取一
선명하게 푸른 옥빛이 나니 / 瑩然碧玉光
몇 번이나 매연 속에 파묻혔었나 / 幾被靑煤沒
영롱하기는 수정처럼 맑고 / 玲瓏肖水精
단단하기는 바위와 맞먹네 / 堅硬敵山骨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는 / 迺知埏塡功
하늘의 조화를 빌려왔나 보구려 / 似借天工術
가늘게 꽃무늬를 놓았는데 / 微微點花紋
오묘한 것이 단청을 그린 것 같구나 / 妙逼丹靑筆
* 한국고전종합DB의 해석을 자의대로 조금 수정했습니다.

고려의 재상이었던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8권의 시 중 일부입니다. 문집 내에는 청자에 대해 묘사한 시들이 여러 편 존재하는데, 본편은 고려청자를 설명할 때 서긍의 <고려도경> 등과 함께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대목입니다. 김군(金君)이 청자 술잔을 두고 시를 지어 달라 하여 이규보가 백거이의 시운을 따라 시를 지은 것으로, 본래는 제목이 없었는데 후대에 시에서 청자에 대한 묘사 부분만을 떼어내어 '청자송(靑瓷頌)' 또는 '綠瓷杯(녹자배)' 정도로 부르는 모양입니다.


청자상감국화문잔탁(靑磁象嵌菊花文盞托) / 12~13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하늘의 기술을 빌려와(借天工術)' 완성된 청자 술잔 하나의 빼어난 자태를 세심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규보의 생전에 읖어진 것이니 최전성기를 맞이하던 13세기 초의 고려청자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가마에 넣을 땔감용 나무를 많이 베어 산이 민둥산이가 된 모습이나 연기가 해를 가릴 만큼 강한 화력으로 청자를 공들여 굽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술잔에 새겨진 꽃무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니 순청자는 아니고 상감청자라는 것도 알 수 있네요. 당대나 지금이나 녹이나 청을 잘 구분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청자의 빛깔을 비(翡)색 대신 녹(綠)색을 언급한 점도 흥미롭습니다.

참고로 동시기 중국의 청자는 용천요(龍泉窯, 현재의 저장성 용천현)의 것들이 가장 유명합니다. 아래의 사진들이 용천요 청자로 북송 말기부터 남송~원에 이르는 13~14세기에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시유를 두텁게 하여 투명한 느낌의 고려청자보다 불투명하고 뽀얀 느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좌) 청자어룡장식 꽃병(靑磁 魚龍裝飾 花甁) / 13세기 / 원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신안선 발굴)
(우) 마황반(馬蝗絆) / 13세기 / 남송 / 일본 국립박물관 소장 / 중요문화재(한국의 보물급)

여담인데 <동국이상국집>에서 '동국'은 동쪽 나라인 고려를 뜻하는 것이고, '이상국'은 저자인 이규보를 가리킵니다. 이규보가 고려의 재상 관직인 문하시랑(門下侍郞) 자리까지 올랐기 때문에 상국(相國)이란 호칭을 붙인 것이죠. 요즘 말로 치환하면 <대한민국 이총리 문집> 정도가 되겠네요.



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12 6
    14610 기타6070 기성세대들이 집 사기 쉬웠던 이유 14 + 홍당무 24/04/20 498 0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3 + kaestro 24/04/20 370 5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53 0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4 kogang2001 24/04/19 272 7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267 9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4 kaestro 24/04/19 454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759 11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148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37 2
    14601 꿀팁/강좌전국 아파트 관리비 조회 및 비교 사이트 11 무미니 24/04/13 854 6
    14600 도서/문학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13 kaestro 24/04/13 1067 5
    14599 일상/생각가챠 등 확률성 아이템이 있는 도박성 게임에 안 지는 방법 20 골든햄스 24/04/12 1092 0
    14598 음악[팝송] 코난 그레이 새 앨범 "Found Heaven" 김치찌개 24/04/12 177 0
    14597 스포츠앞으로 다시는 오지않을 한국야구 최전성기 12 danielbard 24/04/12 992 0
    14596 정치이준석이 동탄에서 어떤 과정으로 역전을 했나 56 Leeka 24/04/11 2494 6
    14595 정치방송 3사 출구조사와 최종 결과 비교 4 Leeka 24/04/11 762 0
    14594 정치절반의 성공을 안고 몰락한 정의당을 바라보며 10 카르스 24/04/11 1335 18
    14593 정치홍차넷 선거결과 예측시스템 후기 11 괄하이드 24/04/11 909 6
    14592 정치2024 - 22대 국회의원 선거 불판. 197 코리몬테아스 24/04/10 5333 2
    14591 정치선거일 직전 끄적이는 당별관련 뻘글 23 the hive 24/04/09 1261 0
    14590 오프모임[5월1일 난지도 벙] 근로자 대 환영! 13 치킨마요 24/04/09 602 1
    14589 일상/생각지난 3개월을 돌아보며 - 물방울이 흐르고 모여서 시냇물을 만든 이야기 6 kaestro 24/04/09 386 3
    14588 일상/생각다정한 봄의 새싹들처럼 1 골든햄스 24/04/09 277 8
    14587 일상/생각탕후루 기사를 읽다가, 4 풀잎 24/04/09 424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