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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8/07 18:27:46수정됨
Name   AGuyWithGlasses
Subject   [사이클] 프로 사이클링의 팀웍 - 퀵스텝과 함께하는 에셜론
현 사이클에서 가장 팀웍이 잘 맞는 팀을 대라면 누구나 팀 이네오스와 데커닝크-퀵스텝을 고를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대체로 TDF에 집중하는 이네오스랑 달리 퀵스텝은 어떠한 대회에서든 항상 위험한 집단입니다. 연간 가장 많은 스테이지를 우승하는 팀은 퀵스텝이고, 이들은 어떤 대회든 선수든 칼같은 조직력을 앞세워 상대들을 수없이 무너뜨립니다.

이 팀의 울프팩(Wolfpack) - 여러 강력한 선수들을 앞세워 한 명이 어택하면 다 따라가고, 그 선수들 따라잡으려 다른 팀들이 트레인을 소모하면 다른 한 명이 어택, 다 따라잡으면 제3의 어택... 이런 식으로 가다가 가장 그날 컨디션이 좋은 선수가 최종 어택을 쳐서 무너뜨리는 방법 - 전술도 원데이 클래식에서는 굉장히 강력한 모습을 보입니다만, 투어 대회에서 스프린트로 끝나는 날의 스프린트 트레인에서도 리드아웃 맨들과 스프린터의 이인삼각이 딱딱 맞아떨어져 들어가면서 퀵스텝의 스프린터들은 항상 수많은 승수를 거뒀습니다. 그리고 몸값이 비싸지면  팔리고 다시 새로 유망주가 들어오고...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게 퀵스텝이죠.

이 글에서는 흔하지 않은 장면인데, 퀵스텝의 우수한 팀웍을 자랑해서 스테이지 하나를 날로 먹은 경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라이브로 보면서 정말 감탄을 금하지 못한 명경기 중 하나입니다. 경기는 2017년 지로 디탈리아 Stage 3이었습니다. 스테이지 자체는 그냥 148km 내내 샤르데냐의 해변을 따라 도는 평지 스테이지라 고도표를 소개할 것도 못 됩니다. 평지 스프린트 피니시로 예정되어 있었고, 해변도로다 보니 강한 측풍을 조심해야 한다는 정도.



당시 경기 상황입니다. 12km를 남겨둔 현재 BA는 모두 잡혔고, 펠로톤이 한 덩어리로 스프린트 피니시를 예상하는 모습입니다.



Trek-Segafredo와 Lotto-Soudal 팀이 펠로톤을 끌고 있습니다. 각각 스프린터인 지아코모 니촐로와 안드레 그라이펠(Stage 2 승리로 분홍핵의 리더 저지를 입고 있었습니다)을 보유한 팀들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선수들을 앞에 내보내서 신경전을 벌이며 스프린트를 준비합니다. 이외에도 필 바우하우스가 있는 Team Sunweb, 캘럽 이완이 있는 Mitchelton-Scott, 페르난도 가비리아가 있는 QuickStep-Floors, 샘 베넷이 있는 Bora-Hansgrohe 등이 스프린트 경합에 참여하는 팀들입니다. 죽 써놓고 보니 베넷 빼곤 현재 전부 팀을 옮겼군요 ㄷㄷ;



측풍이 심하게 부는 날은 이게 무섭습니다. 펠로톤에서 은근슬쩍 주요 선수들 앞으로 스윽 불러오는 데 성공하면 에셜론의 조건이 갖추어지죠. 갑자기 요이땅 하고 미친듯이 밟아대기 시작합니다. 저걸 그대로 놔두면 펠로톤은 숫자가 몇이 되었던 간에 고사합니다. 하지만 숫자가 넷밖에 안 되고 그 중에서도 한 명은 다른 팀이니 협조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곧 에셜론을 풉니다.

여기에서 잠깐. 에셜론(Echelon)은 측풍에 대비해서 선수들이 측풍이 불어오는 방향대로 사선으로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선두를 로테이션으로 갈아주면 뒤에 가는 선수들은 효과적으로 힘을 아낄 수 있죠. 방파제 같이 바닷바람이 강한 곳에서는 자주 생기죠.
다만 도로가 무한정 옆으로 뻗어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200명에 가까운 펠로톤이 한 무더기로 사선으로 붙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 선수 뒤부터는 뒷 줄로 흐르게 되죠. 이를 이용해서 한번 길 가로 밀어붙인 다음에 자기 팀원들을 재빠르게 앞으로 모조리 모아서 팀 독자적으로 애셜론을 형성해서 달아나 버리는 전술이 있습니다. 방금 전은 여기까지는 왔는데 숫자가 너무 적어서 실패한 거죠.



여튼 어택이 한번 무효화됩니다. 괜히 헛심만 쓴 상태. 프로 레벨에서도 에셜론 형성은 최고 난이도로 꼽힙니다.



그렇게 어택이 무효로 돌아가면서 로토 수달과 트렉 세가프레도는 뒤로 빠지고 펠로톤은 특별히 끄는 선수 없이 별별 팀들이 다 앞으로 나옵니다. Team Sky나 FDJ, Movistar는 종합선두 노리는 팀들인데 낙차사고 위험도 높고 하니 공격적으로 포지션을 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리더급을 오히려 앞에 둡니다. 포지션이 앞일수록 사고위험이 낮기 때문이죠.



갑자기 QuickStep Floors의 밥 융겔스(룩셈부르크 챔피언 저지)가 앞으로 나옵니다. 이 때만 해도 아직 25살의 유망주였는데 이때 이미 올라운더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사실 이 대회를 계기로 융겔스의 다재다능함이 아주 잘 알려졌죠. 작년 아르덴 클래식의 LBL에서는 최강자 발베르데를 박살내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현재도 곳곳에서 쓰이는 만능 일꾼입니다.



이어서 펠로톤 앞이 파랗게 물들기 시작합니다. 경기 흐름이 상당히 불온하게 돌아가기 시작. 이렇게 은근슬쩍 팀원을 동시에 모으는 것이 정말 어려운데(한 팀 선수들이 모이는 걸 알면 펠로톤 전체가 가만히 안 놔두죠) 퀵스텝은 순식간에 해냅니다.



안드레 그라이펠(분홍색 리더 저지)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펠로톤에서 황급히 앞으로 나옵니다...만 도와주는 동료가 없습니다. 아마 팀과의 무전으로 동료들을 열심히 찾고 있겠죠.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퀵스텝은 드래곤볼 7조각을 싹 다 맞췄습니다. 융겔스가 어마어마한 힘으로 최선두까지 나와서 끌 준비를 합니다.



그 결과.

참고로 융겔스가 앞서나오기 시작한 뒤 이 장면까지 소요된 시간은 단 1분입니다. 1분 만에 팀웍만으로 펠로톤을 박살내 버린 거죠. 이것이 에셜론의 힘입니다. 알면서도 어어하는 사이에 당하는 거죠. 이게 감이 잘 안잡힐 수 있는데, 위에 자막으로 나오는 남은 거리를 보면 융겔스가 앞으로 튀어 나올때가 10.8km 지점, 에셜론 형성되고 펠로톤 빡점놓는 때가 9.8km입니다. 측풍 맞으며 60km/h의 속도(융겔스는 이거보다 더 빠르겠죠)로 1분 만에 저짓을 해낸 겁니다.



이 전술에 한번 당하면, 똑같이 죽을 힘을 다하는데도 격차가 벌어집니다. 펠로톤은 큰 덩어리지만 측풍에서는 조직적으로 사선으로 선수들이 열을 이루어야 하는데, 굉장히 급박한 상황이고 20개가 넘는 팀들이 힘을 합할 이유도 여유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우는 거꾸로 숫자만 많지 조직이 안 되서 오합지졸이 되어 오히려 속도가 느려지고 힘만 소모합니다. 반면 앞서나간 팀은 기가 막힌 조직력으로 주력 선수들의 힘을 보존하면서 달리고 여기에 간신히 끼여든 몇몇 선수들이랑 도망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까지는 펠로톤보다 빠릅니다.
다만 리드아웃맨은 정말 어마어마한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거리가 길면 나중에 전부 엥꼬가 나서 잡힙니다. 리드아웃으로 나선 밥 융겔스의 역량이 이래서 중요한데, 혼자서 무려 10km를 대부분 말뚝으로 끌었습니다. 무시무시한 힘; 저러고도 나중에 2주차 3주차 할일이 없어지니까 GC경쟁으로 가서 7위까지 하는, 그야말로 신나는 사이클이 뭔지를 보여줬습니다. 이 선수 진짜 뭐야..



펠로톤과의 차이를 10초까지 유지한 선두 에셜론은 스프린트 피니시까지 그대로 진입하는데 이미 에셜론으로 경쟁자를 싹 다 제거했기 때문에 퀵스텝의 스프린터인 가비리아는 아무런 방해 없이 스퍼트를 질러서 간단하게 스테이지를 날먹합니다. 펠로톤과의 시간 차이에 스테이지 우승 보너스타임을 더해서 그라이펠에게 핑크를 뺏어 온 것은 덤.

퀵스텝이라는 팀의 팀웍이 이렇게 강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스타들이 퀵스텝을 거쳐갔고, 또한 퀵스텝이 돈이 많은 팀은 아니기 때문에 핵심 선수 한 둘을 빼면 바로바로 계약기간 만료 시 내보내고 새 유망주를 섭외합니다. 총감독인 페트릭 르페베레는 마페이 시절부터 팀을 지도하고 있는데, 현재 사이클 계에서 가장 유망주 보는 눈이 정확하고 지도력도 최상급으로 정평이 난 사람입니다. 이런 시스템이 지도력과 맞물려 수십년 째 최강의 팀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맨날 파란 팀은 어느 경기든 견제를 받고, 클래식과 스프린트 피니시에서는 경계 1순위로 평가받습니다. 그럼에도 저렇게 매년 수십 승을 거두는 걸 보면 사이클은 철저한 팀 스포츠라는 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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