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9/01 20:30:09수정됨
Name   메존일각
Subject   외전: 고려 무신정권기 동수국사(史?/事?) 최세보 이야기
* 어제 올린 <"향복문(嚮福門) 이름을 바꿔라!" 고려 무신정권기의 웃픈 에피소드>( https://redtea.kr/?b=3&n=9605 )의 외전격 에피소드입니다. 뒤늦게 무신정권에 대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중인데, 잔혹한 과거임에도 후세인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러니하게 재미가 뛰어난 것 같습니다.

무신정변기에 최세보(崔世輔)란 무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려 의종 21년인 1167년 '유시(流矢)의 변'*으로 누명을 쓰고 경남 남해군으로 유배를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 뒤 무신정변 발발 이후 복직하게 되었죠.

* '유시의 변': 무신정변이 벌어지기 3년 전, 봉은사에서 국가의 큰 행사인 연등회가 열렸습니다. 돌아오던 날 밤중에 <삼국사기>의 김부식 아들 김돈중의 말이 징과 북 소리를 듣고 놀라 한 기병의 화살통을 들이받았던 모양입니다. 화살통은 불행히도 왕의 가마 옆으로 떨어졌고, 의종은 이를 보고 경악하였습니다. 누가 자기를 향해 쏜 화살이 빗나간 것으로 여겨 급히 궁궐로 돌아와 계엄령을 내렸지요. 이것이 '유시의 변'입니다.
의종은 현상금과 벼슬을 내걸고 범인을 색출하려 했건만, 그 누구도 끗발 날리던 김부식네 가문 돈중의 소행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기에, 몇몇은 고문에 의한 거짓자백으로 참형에 처해지고, 몇몇은 귀양을 보내지게 되는데 최세보 역시 왕의 호위를 잘못한 죄로 남해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1173년(명종 3년), 의종은 이의민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당하는데요. 문관이었던 수국사(修國史; 정2품 이상이 맡던 춘추사관 관직) 문극겸(文克謙)은 이 일을 사서에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자가 중방으로 달려가서 문극겸의 소행을 일러바쳤습니다.

문관이면서 무관 벼슬인 상장군에 임명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남평 문씨로 '모카커피'(거짓말)로 유명한 문익점의 선조이다.

"큰일났습니다! 문극겸이 의종이 살해된 일을 사서에 그대로 썼답니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이오?"
"아시지 않습니까,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큰 악이라는 것을요! 이 사건이 그대로 전해지면 절대로 안 됩니다!"

막무가내로 행동하던 무인들도 왕을 시해한 전말이 역사에 기록되는 건 당연히 꺼렸겠지요.

"어, 그건 그렇지. 그,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왕에게 무관이 사관 직책까지 겸직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쁜 내용이 써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한편, 자신의 소행이 중방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된 문극겸은 당연히 두려운 마음이 생겼겠지요. 그래서 몰래 명종을 찾아 이 일을 아뢰었는데, 명종 또한 허수아비인 처지인지라 무신들을 거스르지 못했습니다. 여하튼 무신들이 사관으로 최세보를 추천했을 것이고, 명종은 그를 동수국사로 삼습니다.

문제는 최세보가 미천한 가문 출신이라 여느 무관들처럼 글을 몰랐다는 겁니다. 동수국사(同修國史)란 정사를 기록하고 실록 편찬을 감독하는 정2품 이상의 고위관직입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만큼 글을 잘 아는 것은 기본 소양이었겠죠. 글을 모르는 자가 역사 편찬 감독의 직책을 겸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명종 역시 바지사장일지언정 일말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나 봅니다. 최세보에게 벼슬에 임명한다는 왕지(王旨; 조선의 교지)를 내렸을 텐데, 여기에 적힌 관직의 한자가 좀 달라졌습니다. 同修國[史]가 아니라 同修國[事]가 된 겁니다.

'내가 힘이 없어서 너한테 어쩔 수 없이 벼슬을 내리기는 하는데, '나라의 역사'를 관리하는 직책을 준 것이 아니고 '나라의 일'을 관리하는 직책을 준 거야.' 

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최보세 역을 분한 故 민욱 선생님

흥미롭게도 (주변의 글을 아는 사람이 지적해줬겠습니다만) 최세보는 이걸 대뜸 알아챘나 봅니다. 그래서 왕에게 고쳐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事'자를 '史'자로 고쳤다고 하네요. 개판이죠.

때문에 당연히 선왕인 의종의 실록은 기록에서 왜곡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종 때 무인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 명분을 최대한 그럴 듯하게 꾸며야 했을 테니까요. 실제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의종이 전반적으로 방탕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한참 뒤 집권하게 되는 최충헌도 명종과 쿠데타를 일으킨 무인들에 대해 상당한 기록왜곡을 자행했다고 봅니다. 무신정권기 내내 기록된 사서의 내용들을 비판적 자세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584 6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와짱 24/04/17 35 0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3 + 닭장군 24/04/16 277 2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598 1
    14601 꿀팁/강좌전국 아파트 관리비 조회 및 비교 사이트 11 무미니 24/04/13 721 6
    14600 도서/문학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13 kaestro 24/04/13 879 5
    14599 일상/생각가챠 등 확률성 아이템이 있는 도박성 게임에 안 지는 방법 19 골든햄스 24/04/12 1004 0
    14598 음악[팝송] 코난 그레이 새 앨범 "Found Heaven" 김치찌개 24/04/12 149 0
    14597 스포츠앞으로 다시는 오지않을 한국야구 최전성기 12 danielbard 24/04/12 915 0
    14596 정치이준석이 동탄에서 어떤 과정으로 역전을 했나 56 Leeka 24/04/11 2365 6
    14595 정치방송 3사 출구조사와 최종 결과 비교 3 Leeka 24/04/11 719 0
    14594 정치절반의 성공을 안고 몰락한 정의당을 바라보며 10 카르스 24/04/11 1229 18
    14593 정치홍차넷 선거결과 예측시스템 후기 11 괄하이드 24/04/11 860 6
    14592 정치2024 - 22대 국회의원 선거 불판. 197 코리몬테아스 24/04/10 5274 2
    14591 정치선거일 직전 끄적이는 당별관련 뻘글 23 the hive 24/04/09 1236 0
    14590 오프모임[5월1일 난지도 벙] 근로자 대 환영! 13 치킨마요 24/04/09 572 1
    14589 일상/생각지난 3개월을 돌아보며 - 물방울이 흐르고 모여서 시냇물을 만든 이야기 6 kaestro 24/04/09 358 3
    14588 일상/생각다정한 봄의 새싹들처럼 1 골든햄스 24/04/09 258 8
    14587 일상/생각탕후루 기사를 읽다가, 4 풀잎 24/04/09 399 0
    14586 음악VIRGINIA (퍼렐 윌리엄스) 신보 카라멜마끼아또 24/04/08 255 2
    14585 오프모임4월 9일 선릉역에 족발 드시러 가실분. 29 비오는압구정 24/04/08 767 4
    14583 정치총선 결과 맞추기 한번 해볼까요? 52 괄하이드 24/04/07 1357 0
    14581 정치MBC 여론M 최종 버전 14 당근매니아 24/04/07 1863 2
    14580 사회의대 증원과 사회보험, 지대에 대하여...(펌) 42 cummings 24/04/04 5023 37
    14579 음악내가 락밴드 형태로 구현하고 싶던 걸그룹 노래들 18 *alchemist* 24/04/04 669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