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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10/12 02:45:14
Name   o happy dagger
Subject   한트케의 추억...
어렸을때 시골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왔었다. 서울로 이사를 온 후, 처음으로 시내에 나간다고 부모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던길 중간에, '관객모독'이라고 플랭카드가 어느 건물에 늘어져 있는걸 보았었다. 첫 서울 시내 모험, 그리고 '모독'이라고 하는 글자가 버젓히 건물 밖에 적혀 있는게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이후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울 지리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혼자서 시내에도 나갈 수 있게되자, 교보나 종로서적에 가기 위해서 8번이나 6번 버스를 타곤 했었다. 이 버스들은 율곡로를 지나갔는데, 율곡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관객모독'이라는 플랭카드가 건물 벽에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는것을 다시 보곤 했다. 기국서씨의 연출로 김수근씨가 만든 건물인 공간사옥 지하 소극장에서 76(극)단이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공연한 것이었을테데, 당시는 희곡은 좀 읽기는 했지만, 연극을 딱히 보던 시기도 아니었고 아직도 극작가들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시절인지라 관객모독이라는 제목 그리고 극작가가 누구인가 정도만 머리속에 남겨두었다. 어째든 이것과는 별개로 내 머리속에 남아있는, 내가 가장 많이 본 연극광고는 이 건물에 붙어있던 관객모독이다.

한트케에 대해서 생각을 더 하게 된건 연극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였다. 1987년 빔 벤더스 감독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로 감독상을 수상했고, 이 작품은 몇 년 후 한국에서 상영이 되어서 꽤나 인기를 끌었다. 특히나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소년이 소년이었을때'로 시작하는 한트케의 시 '유년기의 노래'는 금방 나를 사로잡았다.

구변극 혹은 언어극. 그의 희곡을 지칭하는 대명사였다. 그는 연극에서 대사를 극에서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이나 혹은 의미로 보는것이 아니라, 언어가 극의 목적이 되어서 극이 진행이 되었다. 그의 연극에서 배우는 끊임없이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내면서 관객을 극에 들어오게 하지만 동시에 관객은 그 낯설음에 소외되어져 갔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카타르시스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실주의 연극에서 보여주던 삶의 한 단편을 보여주는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해서 낯설음을 바탕으로 서사극에서 그렇게도 보여주고 싶어했던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것도 아닌 그저 말만이 남아있었다. 확실히 그의 연극은 과거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혁명이기도 했었다.

그의 다른 작품을 보고 싶었지만, 다른 작품은 공연되는것이 없었다. 그 와중에 독일 감독 헤어조크의 '카스파 하우저의 신비'을 극장에서 볼 기회가 생겼다. 영화자체는 한트케와 전혀 상관없는 헤어조크의 작품이었다. '아귀레: 신의 분노'같은 작품보다는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었지만, '난쟁이도 작게 시작했다'와 같은 작품보다는 덜 졸렸다. 어째든 헤어조크의 '카스파 하우저의 신비'을 보고나서, 한트케가 '카스파'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다는걸 되새겨냈고, 한트케가 '카스파'를 소재로 쓴 이유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카스파 하우저의 이야기는 1828년 독일 뉘렌베르크에서 발견된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시절을 2m x 1.5 m x 2 m정도 되는 방에 갇혀서 지내고는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가 어느날 바깥 세상에 내 던져졌고, 그 아이가 세상 사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로, 헤어조크는 카스파가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적응해 가는지, 그리고 살해당하는지를 시간축을 따라가며 보여주었다. 한트케는 아마도 카스파의 삶에서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 촛점을 맞추고 그가 언어유희를 즐기는 과정에 촛점을 맞춰서 작품을 쓰고 싶어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1996년 고금석 연출로 극단 우리극장에서 공연한 '카스파'를 본 후에, 내 생각이 맞다는걸 알게 되었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다미엘과 카시엘은 쉬지않고 계속 사람들을 관찰한다. 영화에서 그들은 베를린을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다미엘이 불멸을 포기하고 세상에 참여하기전까지 그들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까치지 않았다. 한트케는 이 지점에서 무언극을 다시 끌어낸 것일까? 그의 1991년 작품인 '우리가 서로를 알지 못했던 시간'은 확실히 그때까지 그의 작품중 이질적인 작품이었다. 그는 이 무언극에서 400여명의 등장인물이 광장을 지나가는 장면을 묘사하도록 했다. 줄거리가 없는 연극, 말이 없는 연극.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1993년 겨울로 들어갈 무렵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극단무천은 김아라 연출로 이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회당 50명정도밖에 관객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관객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이미 연극은 시작된 상태였다. 10명정도 되는 배우들은 끊임없이 무대에 들어왔다 나갔다하면서 다른 사람을 연기했다. 대사는 없었지만, 그들이 뭘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이 뭘 연기하는지 몰랐어도 딱히 다를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연극이 진행되는 그 시간, 극장에 앉아있는 대신 밖으로 나가서 마로니에 공원에 2시간 정도 앉아 있으면서 우리가 보게 될 광경. 그것이 그냥 자그마한 무대위에 존재할 뿐이었다.

이 작품은 내게 한트케를 다시 보게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관심을 급격히 식게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감정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세상. 그곳에 무엇이 존재하는 것일까. 조금 더 가까이가면 느껴질 수많은 감정이 거세된 세상. 그가 바라본 세상이 그런 것이었을까? 이 후 그의 작품이 어떤 여정을 거쳐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한트케의 모계가 세프비아계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의 밀로셰비치 옹호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며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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