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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11/08 17:34:16
Name   임아란
Subject   날씨의 아이 / 신카이 마코토

(이 글에는 날씨의 아이와 너의 이름은.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감상문을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참에 지인이 올린 링크를 봤어요. 호밀밭의 파수꾼을 기점으로 포인트만 딱딱 집어나가면서 나아가던데 잘 쓰셨더라고요. 머릿속에서 두루뭉술하게 흩어져 있던 부분을 재조립해 책상 위에 나열한 느낌. 이렇게 잘 정돈되어 있는 글을 보면 기가 팍 죽습니다. 감상을 올릴 필요 있나? 그냥 스크랩 해놓고 좋아요 표시하면 끝날 일 아닌가? 하면서요.

그래도 조금은 써야겠죠. 아니면 삶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감상을 쓰기 위해 지금껏 쓴 감독님 작품 감상 글을 쭉 읽어봤는데 참 중구난방으로 적어놓았더라고요. 어떤 글은 이대로 자가복제만 해줬으면 좋겠다, 또 어떤 글은 변화가 보여서 좋았다 이런 식으로요. 매번 볼 때마다 요구하는 게 달라지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감독님 작품이 좋은가 봅니다. 너의 이름을. 감상을 보니 제가 이런 말을 적어놓았네요. 이 작품이 신카이 마코토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거 같다고.

너의 이름은.이나 이번 작품도 이음새가 단단하단 생각은 안 들어요. 허술하게 넘어가는 것도 많고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진 상황, 인물도 많고요. 근데도 분기점 운운하는 건 최소한의 구색이 갖춰졌기 때문이에요.


제가 감독님 작품 중에 가장 아끼는 건 초속5센티미터입니다. 이건 앞으로 영원히 바뀌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잘 만든' 작품이냐고 물어보면 글쎄요. 기획의 한계도 있지만 초속은 언제까지나 벚꽃이 흩날리는 어느 날의 추억, 거리에 따라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마지막의 뮤직비디오에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작품입니다. 이야기로써 훌륭하다기보단 감독의 장점이 잘 드러난 하나의 이미지 같은 작품이었죠. 별을 쫓는 아이는... 말할 필요도 없고 언어의 정원도 좋았지만 이야기의 힘보다는 이미지의 힘이 강했어요. 그랬던 것이 너의 이름은.에서 부족하지만 이야기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거죠.

이번 작품도 겉으로만 보면 전작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보이밋걸, 약한 존재에게 주어진 거대한 힘 혹은 계기, 그리고 하나의 선택에 대한 파장까지도요. 근데 달라진 게 있다면 선택에 대한 결과물을 확실하게 보여줬단 점입니다.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와 미츠하는 열심히 달리고 달린 끝에 두 사람이 이어진 세계선을 그려냈어요. 존재 자체가 머릿속에서 지워져가는데도 끊임없이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고 갈구하며 세포 하나하나에 그 흔적을 새기려고 노력했죠.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결국 서로를 인식하는데 성공하고요.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1:1의 이야기예요. 이 둘이 노력한 끝에 바뀐 세계선을 맞이했지만 이건 하나의 분기점... 그러니까 평행 우주의 하나일 뿐, 미츠하가 죽고 타키 혼자 그리워하며, 아니 그리워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살아가는 우주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매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일종의 치트를 쓴 셈이죠. 죽는 이 없이 모두가 웃으며 맞이한 해피 해피한 엔딩.

하지만 날씨의 아이는 달라요. 그들이 택한 선택에 대한 결과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전 이때부터 깜짝 놀랐는데 예전 감독님이라면, 분명 호다카가 히나를 하늘에서 데려온 시점 혹은 좀 더 늦게 호다카의 보호 관찰이 끝나고 도쿄로 가는 시점에서 끝냈으리라 보거든요. 물에 잠긴 도쿄, 삶의 터전과 기억을 버린 채 도망칠 수밖에 없던 사람들. 바뀐 나날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세계는 호다카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요. '네가 한 선택이 옳니?' '너는 그대로 살아갈 자신이 있니?' 스가를 만나고 할머니를 만나서 예전 도쿄에 대해 들었어도 호다카는 긴가민가합니다. 나는 무엇을 저지른 걸까. 히나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한 걸까.


天野 陽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호다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 히나를 보며 모든 걸 깨닫게 됩니다. 내 선택에 단 하나도 틀린 것은 없다고. 여기에 세상이 있고 여기에 나의 모든 것이 있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고요.

사실 세상 같은 거, 알게 뭡니까. 개인의 가치는 개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어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누군가에게는 태양보다 더 소중한 사람일 수 있고 달처럼 빛나는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길가의 잡초보다 못한 인간일 수 있어요. 신카이 마코토는 이 장면을 통해 외치는 거죠. 소중한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달려가서 쟁취하라고요.


물론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의 이음새는 좋지 않은 편이에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의 대체재로 사용되었지만 좀 더 세련되게 다룰 필요가 있었던 총이며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경찰, 어른까지. 위태롭게 달려온 것도 사실이고 조금만 더 한 장면만 더, 넣고 빼면 어땠을까 하는 부분들도 눈에 띄어요. 그렇지만... 뭐 어떻습니까. 진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이렇게도 빛나는 걸 쟁취하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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