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8/26 01:27:31
Name   나루
Subject   토마토 파스타 맛의 구조와 설계 그리고 변주 - 1
지난번 올린 토마토 파스타에 대한 글과 댓글을 보면 눈치챘을 법한 일부러 남겨둔 공백이 있습니다. 왜 이 레시피를 토마토 파스타를 처음 시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권하는 것인지와 제가 이 레시피에서 추구하는 맛의 지향점에 관한 부분이죠. 이번 글에서는 그 부분을 다뤄보려 합니다.

이번 글에는 제 경험과 감각을 기반으로 맛의 구조와 설계를 설명하고자 시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제 감각과 비추어 이 글의 보는 분들 개개인의 입맛에 맞는 조정을 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왜 이 레시피를 처음 토마토 파스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권유할까?


(https://ipainting.co.kr/%EB%8F%99%EB%AC%BC-%EC%83%89%EC%B9%A0%EA%B3%B5%EB%B6%80_32/ 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도안)

이전 글의 토마토 파스타 레시피는 선만 그려진 색칠공부 그림과 같은 레시피입니다. 그대로 따라 그리거나 빈 부분만 채워도 예쁘고 배경이나 인물의 그림이 밋밋하다면 자신만의 패턴을 채울 수도 있는 그런 선들이요. 왜 색칠공부 그림인가 의문이 드나요? 토마토 파스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란 제목은 아래의 요소를 녹이려 시도한 결과물이기 때문이죠.


1-1. 재료와 조리에 대한 이해가 미숙하더라도 맛의 기복이 낮도록 재료를 간략화하고 사용할 도구의 재원을 명시할 것.

같은 레시피를 사용했는데 그 레시피를 만든 사람과 나의 결과물이 차이나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조리실력, 도구, 제반환경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전 사용한 식재료가 다르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식재료 본연의 맛과 향의 정도는 레시피 내에서 계량해낼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레시피라는 정제된 일련의 과정을 뽑아내는 사람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 고르고 사용하는 식재료는 내가 마트나 시장에서 구매한 같은 이름을 달고 나온 식재료와 그 맛과 향이 다를 가능성이 정말 큽니다. 이 말이 바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에 찾아오는 즐거움인 수박을 예로 들어보죠.

마트나 시장에서 수박 앞에 모인 사람들은 더 맛난 수박을 찾기 위해 톡톡하며 수박을 두드리며 통통통 수박소리를 들어보곤 합니다. 모든 수박이 같다고 생각하면 하지 않을 일이죠. 그렇다면 맛있는 수박이란 무엇일까요? 검은 점들이 박힌 빨간 속살을 한입 베어 물면 치아에서 느껴지는 아사삭하며 밀려나듯 쪼개지는 질감, 수박의 시원한 향은 입을 거쳐 코로 올라오고 풍부한 과즙과 함께 깔끔한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바로 그 녀석을 찾기 위해 전 여름 한계절의 수박코너 앞을 지난주에도 서성였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의 수박사냥은 어땠냐고요? 긴 장마철의 영향인지 향과 단맛은 아쉬웠지만, 물 많고 아삭한 식감으로 먹을 때마다 기분 좋은 녀석을 골랐지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책상위에 사각으로 가지런히 썰려 “날 먹어! 먹으라고!”를 외치는 듯합니다.

그럼 이름은 같지만 실제로는 크게 다른 식재료의 차이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제 답은 의식하고 a.고유의 맛과 향이 농밀한 것과 b.그렇지 않은 것을 동시에 먹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a와 b란 특성을 가진 각각의 식재료를 구해서 동시에 생으로 혹은 다양한 조리를 해서 먹어보는 일은 처음 요리를 시작하는 사람이 시도하기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말 기본적인 재료만을 고르고 제 경험의 범위내에서 제품으로 나온 식재료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1-2. 이 결과물 그 자체로 맛이 꽉 차 있지는 않아 더 그려 넣을 요소가 있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한 매력이 있어야 함.

기본적인 재료만으로 구성한 레시피이기에 결과물의 맛 구성이 완전히 치밀하지는 않습니다. 아직 제 수준도 치밀한 맛을 설계하고 실행하기엔 부족함이 많죠. 하지만 이 레시피의 결과물은 그 자체로 맛의 즐거움을 주며, 비교적 알아보기 쉬운 맛의 큰 가지들이 빽빽하지 않게 뻗어있어 적당히 여백을 남겨두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지난 글의 레시피로 만든 토마토 파스타에 대한 맛 분석



자세한 재료와 조리법은 지난 글에 있기 때문에 이번 단락에서 다루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토마토 소스 재료: 산 마르자노 토마토 홀 2kg, 양파 300g, 마늘 30g, 소금 20g, 허브(오레가노, 타임, 바질), 올리브유, 월계수잎, 후추
조리법: 원 팬 스파게티: 1인분 기준 사용하는 도구와 재료. 지름 30cm 코팅팬, 전기포트, 소금 5g, 건바질, 파르마지노 치즈, 물 800ml, 파스타면 100g 이하 생략


a. 전분이 섞인 면수를 온전히 버려 유화를 하지 않고 올리브유와 파르마지노 치즈를 넣지 않음

입에 넣으면 시간순서로 토마토의 감칠맛이 쭉 느껴지는 바탕 위로 소금의 짠맛, 토마토의 신맛, 토마토의 감칠맛이 순서대로 강조됩니다.
맛의 강조됨 수준을 1~9라 했을 때(9를 넘어가면 맛의 선명함, 계열과 상관없이 지나쳐 불쾌함을 느끼는 수준) 소금 짠맛의 정도는 2~3, 토마토 신맛의 정도는 7~8, 토마토 감칠맛의 정도는 5~6의 수준으로 느껴집니다.

소금의 짠맛은 한번 강조된 후 다른 맛들 곁에 가지를 뻗고 있습니다.
토마토 신맛은 산마르자노 토마토의 장점인 선명하고 가다듬어진 신맛이라 정도가 강함에도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하는 다른 맛들의 몸통과 두께가 빈약해 신맛이 혼자 튀어 오릅니다. 마치 모두 앉아 영화를 보는데 혼자 서있는 사람 같죠. 이런 감각은 신맛이 두드러지는 동시에 다른 맛들의 층층이 미약하거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두세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커피가 연상됩니다.

혀 위로 맛의 공간이 한층 떠있고 그 위에 면의 맛, 그 위에 맛의 공간이 한층 더 떠있고 토마토의 감칠맛이 느껴집니다.
가장 아래부터 위까지 [혀 / 빈 공간 α /  면 맛 / 빈 공간 β / 토마토 감칠맛] 순으로 맛들이 쌓여 있습니다.

토마토 감칠맛은 빈 공간 α에서부터 위치해 있지만 저 부분에 토마토 신맛과 함께 치밀하고 강렬하게 쌓여 있습니다.
면에 소스는 흡착되었지만 면과 소스의 맛은 저 빈 공간 β 때문에 하나의 맛으로 붙어있지 않다는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맛의 몸통부분은 토마토 과육과 양파의 단맛이 차지하고 있지만 토마토의 신맛과 감칠맛에 비해 너무나 연약합니다. 커피나 와인에서 바디감이라고 할 부분이 빈약한 것이죠.


b. 유화를 하고 파르마지노 치즈를 넣지 않음.

유화는 빈 공간 β를 채우고 면 맛과 토마토 감칠 맛을 빈 공간 없이 하나의 덩어리로 묶고, 토마토소스, 전분과 올리브 오일이 하나가 되어 맛의 몸통을 더 보강할 수 있도록 합니다.

면에서 면수로 나온 전분은 일정수준까지는 긍정적인 요소입니다. 실제 가정에서는 특별한 방법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수준을 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행은 어렵겠지만 데체코면 기준으로는 버리는 면수가 없도록 해도 될 수준입니다. 전분이 면수에 많이 나오는 면이라면 어느정도 조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a에서 느꼈던 맛의 강조점 수준이 조금씩 내려갑니다. 토마토 파스타 전체에서 신맛과 토마토의 감칠맛의 절대량은 그대로이지만, 빈약한 맛의 몸통이 채워지고 맛이 하나의 덩어리로 묶임에 따라 빈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위의 레시피가 추구하는 맛의 지향점입니다!]

다만 몸통에 다른 계열의 맛이 채워지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멈출 수 없습니다. 지금의 맛은 매력적이지만 단순하거든요. 가령 고기나 미르푸아 같은 것으로 계열이 다른 맛의 몸통을 불어넣어주면 지금보다 훨씬 매력적이겠죠. 아 그러고보니 면과는 다른 식감의 무언가가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음 아삭한 아스파라거스나 데친 콜리플라워, 부채살처럼 고기 자체의 맛과 향이 진하고 어느정도 신경을 기울여 씹을 만한 고기도요!


c. 유화를 하고 파르마지노 치즈를 넣음.

빈 공간 α는 우리가 흔히 MSG라 말하는 해조류, 치즈 등에서 얻을 수 있는 맛의 층입니다. 우리가 혀에 착하고 달라붙는 맛이라고도 하죠. 밖에서 식사를 하고 혓바닥 위에 들척거림이 느껴진다면 그 집이 MSG를 적당량 잘 쓰지 않고 남용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죠. 그렇다고 MSG가 싫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맛의 층이 받쳐주는 전제하에 적당량 잘 쓰는 것이 중요하죠.

아무튼 파르마지노 치즈까지 넣어주면 그야말로 토마토 파스타의 맛이 혀에서부터 착! 달라붙어서 b에서보다 좀더 맛나게 느껴지죠. 참고로 제게 토마토 감칠맛은 이 msg감칠맛 보다 조금 윗부분부터 느껴져 완전히 혀에 착 달라붙는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d. 그 외 이것저것

이 토마토 파스타는 맛있지만 맛과 향이 단순하여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아주 약간의 조정만으로 복잡함을 불어넣을 제가 아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아시는 방법이 있다면 댓글로 이야기해주세요. 제 식생활에 반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d-1. 다른 올리브유를 사용하기.
이전 글에서 전 일단 집에 있는 올리브유를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집에 있지 않는 특유의 향미가 있는 올리브유를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탐구심도 생겼겠죠? 제가 새로 시도한 제품은 라니에리 유기농 제품입니다. 가격은 500ml에 1.3만이란 마트의 일반적인 올리브유들의 3~4배정도의 가격이지만, 생으로 먹었을 때 기름 자체의 맛이 두텁고 풋풋한 올리브 과육의 향과 맛이 입안에서 잠시 감돌다 사라지며 올리브유 특유의 매운맛이 목 상단부에서 코 방향으로 올라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전에 애용했던 코스트코의 15ml로 소분된 제품은 과육의 향과 맛이 좀더 미약했고 매운맛이 목구멍을 따라 내려가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이 올리브유를 사용하니 특별한 인상이 없는 올리브유에 비해 유화에서의 이점은 체감하지는 못했지만, 토마토 파스타를 완성하고 나서 그 위에 적당량 뿌려주어 먹으니 올리브 과육향과 토마토 소스에 아주 밀리진 않는 두터움 덕택에 조금 더 다채로워졌습니다. 다만 막 쓰기에는 너무 비싼 가격이 ㅜㅜ

d-2. 후추를 갈아 마지막에 뿌려 향과 맛에 강조점을 주기
여기에 사용할 후추의 최소 조건은 고유의 향을 잘 보유하고 있는 후추를 사용할 것입니다. 이전 글에서 후추의 향이 휘발성이 강하다 적었지만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 이유에는 저와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후추의 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좋은 후추가 가진 고유의 향은 분쇄된 후 캔에 담겨 나오는 후추의 향과 차이가 큽니다. 현재 제가 사용하는 후추인 드로게니아 제품과 칸나멜라 제품의 통후추향을 맡으면 공통적으로 약간 상쾌한 느낌을 주는 멘톨과 조금 겹치는 향, 가벼운 과실의 향, 물리적 감각으로는 코 안으로 파고들며 코 내부위로 올라가는 향이 느껴집니다. 이 향이 제가 이야기한 휘발성이 강한 섬세하고 매력적인 후추의 향입니다.

이런 후추를 그 자리에서 갈아 뿌리면 접시에 담겨진 토마토 파스타의 향과 후추의 향이 섞어 좀더 미묘하고 복잡한 향을 내며 조금 굵게 갈면 파스타를 먹으며 후추알을 씹을 때마다 맛의 강조점이 재미있게 다가옵니다.



그럼 글이 많이 길어졌으니, 다음 글에서 이어서 남은 이야기들을 다루겠습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9-07 09:5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4
  • 좋은 글은 춫천
  • 감각이 세분화된 글이라 좋아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76 기타삶의 의미를 찾는 단계를 어떻게 벗어났냐면 8 골든햄스 24/03/14 916 18
1375 기타소수 사막은 얼마나 넓을까? 4 + Jargon 24/03/06 866 4
1374 기타민자사업의 진행에 관해 6 서포트벡터 24/03/06 819 8
1373 기타노무사 잡론 13 당근매니아 24/03/04 1522 16
1372 기타2024 걸그룹 1/6 2 헬리제의우울 24/03/03 609 13
1371 기타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850 20
1370 기타터널을 나올 땐 터널을 잊어야 한다 20 골든햄스 24/02/27 1558 56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1401 16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954 8
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052 11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326 30
1365 기타자율주행차와 트롤리 딜레마 9 서포트벡터 24/02/06 1183 7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1114 23
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546 12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148 69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2810 37
1360 기타텃밭을 가꿉시다 20 바이엘(바이엘) 24/01/31 1000 10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6532 3
1358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3) 17 양라곱 24/01/22 6160 22
1357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2) 17 양라곱 24/01/17 5686 14
1356 요리/음식수상한 가게들. 7 심해냉장고 24/01/17 1252 20
1355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1) 9 양라곱 24/01/15 2671 21
1354 기타저의 향수 방랑기 31 Mandarin 24/01/08 3293 2
1353 의료/건강환자의 자기결정권(autonomy)은 어디까지 일까? 7 경계인 24/01/06 1274 21
1352 역사정말 소동파가 만들었나? 동파육 이야기. 13 joel 24/01/01 1306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