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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2/14 02:15:34
Name   눈시
Subject   러일전쟁 - 203고지, 점령

영화 203고지 엔딩. 시작하면 죄책감에 우는 노기와 그를 달래주는 메이지 덴노가 있습니다.



일본 남만주철도의 자존심이었던 아시아호

철도는 근대의 상징이죠. 전쟁의 역사 역시 철도가 바꿨습니다. 남북전쟁부터 세계대전까지, 철도는 정말 큰 역할을 했죠. 지금이야 차량수송이나 항공수송이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역시 중요하구요.

개발이 잘 안 돼 있던 만주, 철도는 요충지와 요충지를 잇고 있었고, 전투도 다 여기서 벌어집니다. 압록강부터 진격한다는 좋은 수가 있었음에도 일본군 다수가 랴오둥 반도에 상륙한 이유도 이거였죠. 경의선까진 만들었지만 이게 만주의 철도와 연결이 안 돼 있었거든요. 해상 운송 -> 현지에서 급히 설치 -> 러시아 것도 이용 이렇게 진행됩니다. 일본군은 러시아의 철도를 자주 노렸고, 러시아는 이 뒷치기를 막느라 방어선을 길게 늘려야 했습니다. 철도가 위험해질 것 같자 바로 후퇴한 것도 포위에 대한 걱정뿐 아니라 보급 문제도 있었죠.

전후 일본이 만주철도를 빼앗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른바 만철을 만듭니다. 많은 인재와 자원을 쏟아부은 일제의 싱크탱크로 만주국의 실세나 다름없었죠. 그리고 이 만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관동군은 폭주의 선봉이자 중심이 되었구요.

시작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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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랴오양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땅을 얻었을 뿐이다."

랴오양(요양) 전투의 의의가 없진 않습니다. 요충지 하나를 얻었고 서쪽의 항구 잉커우(영구)도 확보해서 보급로도 더 늘렸으니까요. 이겼다고 자랑할 수도 있었구요.

하지만 피해는 일본군이 더 컸으며, 러시아군은 빠르게 퇴각해 버렸습니다. 이걸 추격해서 피해를 더 줘야 되는데 퇴각도 질서정연하고 빨랐고, 일본군은 탄약 부족으로 하지 못 합니다. 이 때문에 전리품은 거의 얻지 못했고, 러시아 측에서는 충분히 피해를 준 후 작전상 후퇴한 거라고, 오히려 자신의 승리라고 합니다. 외국의 반응 역시 저렇게 땅을 얻었다는 정도였고요.

단순 승리가 아닌 일본군의 목표 달성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밀린다 싶으면 바로 후퇴해버렸죠.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측면이 밀리자 후퇴했습니다. 이걸 이끈 1군의 구로키 대장도 지지도 않았는데 왜 후퇴하냐고 어리둥절할 정도였죠. 그물에 가두기 전에 빠져나가버린 물고기... 일본군의 목표인 포위섬멸은 실패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일본의 보급은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포탄 제조능력은 하루 300발 정도였다 합니다. 열심히 공장을 돌리고 외국에 잔뜩 수입했지만 시간이 걸리는 건 물론이고 필요한 양을 채우기도 힘들었죠. 식량도 이미 부족해서 배급을 반으로 줄인 상태였습니다. 남은 건? 정신력으로 떼워야죠.

병력에서라도 앞서면 모를까, 이미 그것도 틀린 상태였습니다. 노기의 3군이 계속 헤매고, 거기나 여기나  사상자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빨리 노기가 와줘야 했습니다. 만주군 사령부는 뤼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이런 가운데서 러시아군의 반격 소식이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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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고!"


"아 안간다고!"


"가라."


"넵."

참 쉽죠? (...)

러시아라고 사정이 좋았던 건 아닙니다. 전쟁은 결국 정치의 연장선입니다. 일본 따위 쉽게 이겨서 만주도 확보하고 국내의 불만도 잠재우자고 시작했던 전쟁입니다. 그런데 육군이나 해군이나 소극적으로 나오고 계속 밀리고 있었죠. 상황을 바꾸려면 제대로 된 승리가 필요했습니다. 알렉세예프와 니콜라이 2세는 공격을 주장했고, 쿠로파트킨은 버티다가 차르의 명령이 내려오자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신의 명예도 걸려 있었죠. 그는 퇴각 장군이라는 오명을 얻고 있었고, 이걸 만회하긴 해야 했습니다.


랴오양에 있는 강이 타이쯔허. 샤허는 위에 Shehe쪽인 거 같네요

목표는 랴오양 외곽의 강 타이쯔허(태자하)강 건너편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 강 건너편으로 몰아내는 거였습니다. 이 강의 북쪽에 있는 샤허(사하)강의 이름을 따 샤허 전투라고 부릅니다. 동원한 병력은 21만여명, 반면 일본군은 12만명 정도였죠. 10월 5일, 공격이 시작됩니다.

러시아군의 주공은 동쪽의 산악지대였습니다. 서쪽의 병력은 일본군을 묶어두는 정도의 공격만 했죠. 러시아가 공격하는 입장이 되니 이번엔 일본군의 강력한 포격과 기관총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큰 피해를 입으면서 겨우 진지를 점령하면 다른 진지에서 오는 공격을 받아야 했죠.


러시아군의 주공이야 동쪽이었지만 우세한 병력으로 전 전선에서 공격했습니다. 이러니 일본군도 어떻게 막아야 되나 고민했죠. 오야마는 동쪽에 증원군을 파견하긴 했지만, 주공을 다른 곳으로 정합니다. 동쪽에서 막는동안 서쪽에서 치고 나간다는 거였죠.

일주일 동안 긴 전선에서 뺏고 뺏기는 혈전이 계속됩니다. 그러다 12일 일본군이 서쪽에서 감제고지를 점령하는 등 러시아군을 격퇴했고, 동쪽에서도 밀리지 않습니다. 이러니 쿠로파트킨은 후퇴를 결정할 수박에 없었죠. 일본군은 이를 쫓아 펑톈(봉천) 남쪽 샤허강까지 진격합니다. 이 강은 걸어서 넘을 수 있을 정도로 수심도 낮고 폭도 좁았죠. 양군은 여기서도 18일까지 뺏고 뺏기는 전투를 벌입니다. 그러다 지칠대로 지치면서 공격을 멈추게 되었죠.

2주일 동안 진행된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5천여명이 사망하고 비슷한 수가 실종됐으며, 3만여명의 부상자가 생기면서 무려 4만이나 되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일본이 4천 이하의 전사자를 비롯 2만여명의 피해를 입었으니 무려 두 배나 되는 피해를 입은 것이죠. 거기에 일본군을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펑톈 근처까지 밀리게 되었구요. 러시아 역시 공격하면 이렇게 된다는 걸 보여준 거였고, 전투 진행 과정에서도 여러가지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 전투였죠.


공격을 주장한 알렉세예프는 이걸로 잘리고 쿠로파트킨이 총사령관이 됩니다.

물자 부족은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임시로나마 완공하긴 했지만 수송은 너무 느렸고, 비리로 여기저기서 뜯어갔죠. 이런 상황에서 계속된 패배로 사기는 떨어져 갔구요. 한편 일본의 물자 부족이야 뻔했죠. 이겼다 해도 일본군의 피해도 여전히 심했구요. 더 이상의 공세를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노기의 3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죠. 이렇게 되면서 양군은 샤허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상태를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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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발트 함대, 그러니까 제 2태평양함대가 인도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일본군이 기겁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죠. 별 수 있습니까, 또 쪼아야죠. 압박을 제대로 주기 위해서 오야마는 참모장 고다마 겐타로를 보냅니다. 개인적으로는 노기와 친한 친구 사이였다 합니다.

이를 위해 본토에 예비대로 아껴뒀던 현역병 사단인 7사단을 3군으로 보냅니다. 이젠 병력을 증원해도 훈련 제대로 못 받은 징집병밖에 남지 않는다는 얘기, 일본군이 얼마나 몰렸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이렇게까지 받은 이상 반드시 요새를 점령해야 했습니다.


역시 어느 쪽을 공격하냐는 논의가 계속됐고, 이번에도 동쪽이 결정됩니다. 둥지관산(동계관산)과 니룽산(이령산) 쪽이었죠.

11월 26일, 3차(혹은 4차) 총공격이 개시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죠. 이렇게 되자 계획을 바꿔 야습을 시도해 봅니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적에 대한 공격은 백병전이 될 것이다. 적의 진지를 확고히 점령하기 이전에는 적군의 어떠한 화력에 대해서도 사격해서는 안 된다. 모든 장교들은 이유 없이 멈추어 서는 자, 자신의 위치를 방치한 자 또는 뒤로 물러서는 자를 지체 없이 사살하라. 이것은 명령이다." - 지휘관 나카무라 마사오 2여단장

각 부대에서 지원자 3천 1백명(2600이라고도 하네요)을 뽑았고, 피아식별을 위해 흰색 띠를 어깨에 둘렀기에 백거대라 불렀습니다. 그냥 특공대라 보시면 됩니다. 밤을 틈타 접근해서 백병전을 벌인다는 계획이었죠. 하지만 일부는 철조망을 자르다 발견돼 공격받았고, 누구는 지뢰를 밟습니다. 적 포대까지 접근에 성공한 이들은 돌격해 백병전을 벌였지만 전멸, 후속부대도 증원된 러시아군에게 전멸됩니다. 이들을 이끌던 나카무라까지 부상당했고 새벽 2시가 되면서 포기하고 후퇴했죠. 다음 날 아침, 포대 앞에서 발견된 일본군 시체만 780구였다고 합니다.


"... 안 되겠다."

노기는 결국 동쪽 공격을 포기합니다. 그래 해군이 요구한 203고지 하나라도 제대로 점령하자 이거였죠. 반대야 있었지만 밀어붙입니다.


203고지

하지만 203고지는 두 달전과는 달랐습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방어를 잔뜩 강화해놓고 있었던 거죠. 27일부터 1사단의 공격이 진행됐고 큰 피해를 입으며 겨우 일부 진지를 점령했지만 역습으로 다시 뺏깁니다. 28일, 이어진 공격으로 드디어 정상까지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역시 러시아군의 역습을 받아서 도로 빼앗겼죠. 러시아군도 밀릴대로 밀린 상황이었습니다. 포격으로 방어물들이 다 깨졌고, 포탄을 맨몸으로 받으며 싸워야 했죠.

다음날, 7사단 투입이 결정됩니다. 30일, 다시 공격이 시작되죠. 이 날 280mm 유탄포가 쏜 포탄만 1천발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공격은 계속 실패했고, 저녁이 되어서야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실수로 203고지 완전 점령을 했다는 전보를 보냈다 합니다. 사령부에서는 당연히 기뻐했겠지만 다음 날 다시 뺏겨서 허탈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날밤 노기의 차남 야스스케가 전사합니다. 노기에게 마지막 남은 자식이었습니다.

12월 1일, 공격을 중단합니다. 이 날 도착한 고다마를 통해 이동 중이던 8사단 일부 병력까지 보내달라고 하면서 다시 총공격을 준비하죠. 4일 다시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진격하는 아군의 앞에 포탄을 발사하면서 공격했다고 합니다. 오폭까지 각오하면서 쏜 것이죠. 그렇게 그 날 일부 진지를 점령했고 5일 마침내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203고지를 완전히 점령합니다. 이 때 남은 공격대는 구백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고 합니다.


"뤼순항이 보이는가?"
"보입니다!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12월 5일일부터 러시아 제1 태평양 함대는 일본 육군의 포탄을 맞고 침몰해 갑니다. 전함 세바스토폴만이 출항했지만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좌초됐구요. 남은 건 숨기 쉬운 수뢰정 정도... 이렇게 제1 태평양 함대는 전멸합니다. 이걸 확인한 고다마는 사령부로 돌아갑니다.

이 203고지 점령을 위해 일본은 5천여명의 전사자와 1만2천 이하의 부상자를 냅니다. 초반에 동쪽을 공격한 피해를 더한다면 그 피해는 이만을 훌쩍 넘을 겁니다. 러시아군도 5천4백명 이하의 피해를 냈고, 만이천 정도의 부상자를 냈다 합니다. 동쪽을 방어할 때도 전사자만 천오백이었다 하니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죠. 203고지는 이 많은 이들의 피를 머금었고, 이후 뤼순 전투의 상징이 됩니다.

해군은 드디어 뤼순을 떠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3군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죠.

203고지를 비롯한 서쪽의 전진기지를 함락하면서 뤼순요새 내부와 시가지에 대한 포격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문제가 됐던 태평양 함대를 잡으면서 시간여유가 더 생겼구요.

12월 10일, 일본군은 다시 동쪽을 공격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지하갱도 공사가 거의 끝이 나 있었죠. 가죽벨트를 태워 독가스를 만들었고, 지하에 폭탄을 설치해 방어진지를 무너뜨렸죠. 그렇게 처절하게 버티던 러시아군이 이 때문에 서서히 밀려나게 됩니다.


콘트라첸코는 이런 상황을 확인하러 (훈장을 수여하러 왔다고도 합니다) 왔다가 포탄을 맞아 전사합니다. 토치카의 파괴된 천장으로 들어와서 명중했고, 그를 비롯한 고위장교 6명이 전사했죠. 요새 방어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의 죽음으로 사기는 떨어질대로 떨어집니다. 그만큼 잘 방어할 수 있는 장교 역시 없었구요.

일본군의 진격은 계속됩니다. 폭탄으로 진지를 무너뜨리고 독가스를 보내면서 밀어붙였죠. 러시아군도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피해도 계속 누적됐구요.

결국 나가떨어진 건 러시아군이었습니다. 뤼순은 2월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계속 버텨왔습니다. 러시아군의 피해도 계속 누적됐고,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죠. 대다수의 러시아군이 괴혈병과 야맹증 등에 시달리고 있었구요. 일본군의 포격으로 병원까지 파괴되면서 치료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일본군의 피해가 더 크다 해도 러시아군이 겪은 고통도 컸습니다. 그나마 잘 버티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좋은 지휘관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콘트라첸코도 죽었고 계속 밀렸죠.


1월 1일, 스테셀은 노기에게 교섭을 제안합니다. 요새를 넘기겠다는, 항복 선언이었죠.


양군 지휘관들의 인증샷. 친구끼리 찍은 거 같군요.

나름의 밀당을 통해 러시아군은 전원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요새를 양도하며, 일본군은 요새를 비롯 남은 군수물자도 양도받기로 합니다. 그동안 하나라도 덜 넘기기 위해 무기를 폐기했구요. 살아남은 해군은 자침하거나 중국의 중립항으로 도주합니다.

1월 5일, 약 3만 2천명(환자 약 6천명)의 러시아군이 일본군의 포로가 됩니다. 노기는 러시아 장교들의 착검을 허락하는 등 잘 싸운 적의 명예를 지켜주었습니다. 이렇게 6개월간의 혈전이 끝이 납니다. 러시아군의 전사자는 약 만육천명이었습니다.

+) 의외로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는 없었는지 양군 병사들이 시내 술집에 같이 가서 술 먹은 일도 있다고 합니다

당시 요새에는 밀가루 27일분, 곡분 23일분, 차 196일분, 설탕 40일분, 건빵 21일분, 건야채 88일분, 소금 175일분, 귀리와 보리 및 콩이 34일분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포 610문, 기관총 9정이 정상이었고 여러 포탄 20여만발도 남아있었구요.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아직 더 싸울 수 있었음에도 스테셀이 빨리 항복했다고 여겼고, 방어시의 실책까지 더해서 군사재판을 합니다. 사형이 되었다가 금고 10년으로 감형되죠. 적장이었던 노기가 그의 구명운동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러일전쟁사에서도 그가 병사들의 항전 의지를 배신했다고까지 서술합니다. 하지만 고립된 채로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주 방어선까지 뚫리고 지칠대로 지치고 환자도 늘어나는 상황, 그럼에도 지원은 여전히 기대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스테셀이 할만큼 했다는 주장도 당연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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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 포위전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일본 군사력의 비극이었다" - 외국기자

일본군은 다 합쳐 13만명 정도를 투입했고 만사천 가량의 전사자와 사만사천 정도의 부상자를 냅니다. 육만여명이라는 끔찍한 피해를 낸 것이죠. 여기에 식량 부족 등으로 각기병 등에 걸린 환자도 많이 나옵니다.

이유야 계속 썼듯이 잘 방어된 요새에 닥돌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초에 공성전은 많은 피해를 내는 법이고, 현대식 기관총의 등장으로 극대화되었습니다. 뤼순 포위전은 그걸 잘 보여준 첫 사례였죠.


점령 후 러시아군의 술로 건배. 가운데가 노기입니다

"그렇게 많은 인명과 군사물자 그리고 시간을 완벽하지 못한 계획에 낭비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현재 본인이 느끼고 있는 유일한 감정은 수치심과 괴로움 뿐."

이걸 이끌었던 노기 마레스케, 그 평가는 시대에 따라, 학자에 따라 이리저리 갈리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그가 수만명이나 되는 일본 젊은이를 희생시켰다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와 3군 수뇌부가 무능했는가, 할만큼 했는가이죠.

그는 어릴 때부터 허약한 체질에 울보였습니다. 학자가 되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군인을 강요했고, 결국 군인이 되었죠. 그래도 학문을 어느정도 배워 전쟁터에서도 한시를 쓸 정도였습니다. 군사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잘한 모습이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세이난(서남)전쟁 때는 연대장으로 적에게 연대깃발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그의 잘못인 것 같진 않지만요) 그 자신도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치욕이었죠. 친구인 고다마 겐타로가 칼을 뺏으며 말렸다고 합니다.

이후 독일 유학을 갔다 왔고, 청일전쟁 때 참전해 뤼순을 하루만에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대만을 침략할 때도 참전, 총독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만인들의 반발과 그 자신의 정치력 부족 등으로 사직했죠. (그가 잘한 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후 육군에 복직과 휴직을 반복하다 러일전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뤼순 공략을 맡게 되었죠.


도쿄의 노기 신사

공략이 계속 실패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최악으로 치닫게 됩니다. 노기의 집에 사직이나 할복을 요구하는 편지가 2400통이나 왔다고 하죠. 하지만 뤼순을 함락시키면서 평가는 반전됩니다. 적인 러시아도 그를 영웅이라 했고, 영국이나 독일 등 서양에서도 그를 칭찬하고 훈장을 줄 정도였죠. 자식에게 노기라는 이름을 준 서양인들도 있다 하니 -_-a; 그만큼 뤼순이 전쟁에서 결정적이었다는 얘기일 겁니다. 러시아 포로에 대한 관대한 처분, 결전인 펑톈 전투에서 그의 3군이 승리의 주역이 되었던 점, 그 역시 아들 둘을 잃었다는 것 등도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여기에 메이지 덴노를 따라 죽으면서(순사) 그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졌죠.

하지만 그 많은 피해가 있기에 그가 무능했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그에 대한 반론 역시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으로 오면서 말이죠.

무능론 쪽을 보면, 거의 모든 책임을 그와 참모진에게 찾고 있습니다. 하라는 203고지 점령은 안 하고 방어력이 강한 동쪽만 공격했다는 것, 큰 피해를 내고서도 같은 방향으로 정면공격만 계속했다는 것이죠. 여기에 큰 역할을 한 280mm(11인치) 유산포를 설치에 시간 걸린다고 거부했다는 것 등이 있죠.


여기서 같이 까이는 게 참모장 이지치 고스케입니다. 위의 대포 얘기도 그가 주장했던 거라 하죠. 애초에 노기는 얼굴마담이고 포병 출신(그래서 대포 얘기로 더 까입니다)에 유학파인 그를 비롯한 참모들이 전투를 지휘했고, 그러니 실질적인 책임은 그에게 있다는 말까지 봤네요. 그가 26일 공격날짜를 잡은 이유를 대본영에 보냈는데 이런 이유였습니다.

+) 일본군은 프로이센(독일)군을 벤치마킹해서 참모의 역할이 큰 편입니다. 이래서 츠지 마사노부같은 케이스도 나오죠 -_-;

1, 화약 준비. 타당한 이유죠.
2. 난산(남산)을 점령한 날이 26일이니 재수가 좋음 (...)
3. 26이라는 수는 짝수로 쪼갤 수 있다. 즉 요새를 쪼깰 수 있는 날이다.

... 이런 이유로 결정한 거라 까이기도 하는거죠. -_-a 이게 일본에서부터 퍼진건지 몰라도 국내에서는 6개월간 매달 26일에 공격했다는 걸로 왜곡됐더군요. 실제 26일에 한건 2차 본공격이랑 3차 공격 때 뿐입니다.

그에 대한 반론으로는 노기가 군신이 되었기에 책임도 그에게 전가됐다는 것, 그가 실패의 원인을 탄약 부족, 즉 보급을 제대로 해 주지 않은 대본영 탓을 하며 보급을 계속 요청했기에 불리한 평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신력을 중시한 -_-; 일본군이었기 때문에요. 이런 점으로 위의 대포 얘기 등이 왜곡 혹은 창작된 걸로 보기도 하구요.

전체적인 반론을 보자면, 우선 203고지 점령이 결정적인 역할을 못 했다는 것이죠. 항복은 근 한달 후였고, 비판받는 동쪽 공략이 성공한 후였습니다. 이건 이른바 해군선옥론, 해군이 선역이고 육군은 악역이라는 것과도 관련있는 것 같습니다. 203고지만 먹으면 다 된다는 건 결국 해군 쪽 주장이거든요. 3군을 비롯한 육군에서는 총공격 전에 이미 포격으로 적 해군이 무력화되었다고 봤고, 실제로 함포와 병력을 육지로 옮기는 등 맞았습니다. 물론 배를 가라앉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새 공격은 육군에게 필요한 거였습니다. 결전을 치러야 되는 상황에서 수만명의 적을 배후에 둘 순 없었으니까요. 보급항인 다롄의 위치도 생각해봐야죠.

당시 대본영은 해군의 주장을 받아들여 203고지 공격을 밀었고, 만주군 사령부는 3군처럼 동쪽을 밀고 있었습니다. 윗선에서 이렇게 싸우니 3군도 여기 흔들렸다는 옹호도 있죠. 그리고 러일전쟁에 대한 연구서인 기밀 러일전사는 대본영의 입장 위주로 연구되었고, 이래서 무능론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 무능론을 일본에 널리 알린 것은 바로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이었구요.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 노기를 맡은 에모토 아키라. 여기선 무능해도 불쌍하게 나옵니다.

마지막 총공격에서 고다마는 친구 노기의 지휘권을 빼앗았고, 203고지를 점령한 후에 돌려줍니다. 그 덕분에 작전이 수월하게 되었고, 단 4일만에 점령할 수 있었다는 거죠. 영화 203고지에서도 그렇게 나오는데... 이 역시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휘권을 빼앗았다는 건 시바의-_-; 창작이구요. 작전 개입에 대한 부분도 203고지 공격은 노기의 결단이었고, 고다마의 작품인 것처럼 나오는 아군의 희생도 불사한 포격 역시 계획대로였다는 것이죠.

+) 그래도 그의 영향이 컸던, 실질적으로 그가 지휘했다는 반론도 있나봅니다

이런 식으로 반론들이 있고, 피해는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던 거라는 것, 이걸 넘어서 노기였기에 그 정도였다는 다시 말해 잘한 거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거죠.


제가 저런 거 하나하나를 다 디벼볼 수야 없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반론에 더 마음이 갑니다. 일단 그가 정면공격만 반복한 건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1차야 잘못한 게 맞겠지만 그 이후로는 참호와 지하갱도를 파는 장기전으로 갔죠. 하지만 위에서는 그걸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다시 보병들을 돌격시킬수밖에요. 부족한 양이래도 포격도 계속 했고, 실패했더라도 백거대로 은밀한 공격도 시도해봤습니다. 절대 정면공격만 계속한 건 아니죠. 그리고 반론에 있듯 항복은 지하갱도를 통해 적 방어선을 약화시킨 후 만리장성이라 불리던 주 방어선까지 뚫은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한 세대 후에 반자이 돌격을 시킨 후배들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봐요.

+) 청일전쟁 때나 이 때나 일본군은 돌격중시이긴 했고 반자이 돌격이 떠오르긴 하는데, 그 정도는 확실히 아닙니다. 프로이센에게 배운만큼 부족해도 화력을 중시하긴 했거든요. 1차대전 때 볼수있듯 일본이라서 미친듯이 돌격만 한 건 아니죠.

서양 열강은 이 전투의 피해를 비판하긴 했지만, 미국 남북전쟁 때 그랬듯 무시합니다. 기관총 세례를 받으며 적 참호나 요새를 공격해서 큰 피해를 입은 건 1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훨씬 큰 규모로 다시 일어나죠.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여러 파훼법이 생겼고 그럴 여유가 없을 땐 여전히 큰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러일전쟁은 현대식 기관총이 처음 투입된 전쟁이고 노기는 물자도 부족한 상태에서 빨리 임무를 완수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특별히 무능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라고 봐요.

그리고 하나 더, 한 세대 후의 후배들은 물론 지금 한국군과도 비교될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병사를 희생시킨 것에 대해 평생 죄책감을 느껴왔습니다. 유족을 만났을 때도 간곡히 사과했고, 강연에 초대되었을 때도 눈물을 흘리며 "나는 여러분의 형제를 많이 죽인 자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의 두 아들 역시 이 전쟁에서 죽었고 대가 끊기게 되었지만 죄책감으로 입양을 하지 않으려 했구요. 사상자들을 위해 기부와 문병도 많이 했고 팔다리를 잃은 자들을 위해 의수를 만드는 데 참가하기도 했구요.

죄책감으로 메이지 덴노에게 자결을 허락해 달라고 했지만 덴노는 자기가 죽을 때까진 안된다면서 거부합니다. 그를 신임했던 덴노는 그의 아들 요시히토(후의 다이쇼 덴노)의 교육을 맡겼구요. 그리고 메이지 덴노가 죽자 아내와 함께 자결합니다. 이 자결에 대해서 당대나 지금이나 평가가 엇갈리지만, 최소한 그가 부끄러운 줄은 알았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그게 그 때 죽은 일본 젊은이들에겐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모르고 병사들의 목숨을 가볍게 보는 이들과는 확실히 비교되죠. 남의 아들들은 전장에 내몰아놓고 자기 아들은 보호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구요.

+) 이렇게 제법 좋게 평가했는데... 그가 청일전쟁 때 뤼순 공격을 맡은 이상 뤼순 학살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순 없습니다. 직접 명령하진 않은 것 같지만요. 따로 글을 쓰고 싶은 부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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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군사적 충격이었다. 이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였던 제해권이 결정되었다"
"뤼순의 항복은 차르 체제 항복의 서막이었다."
- 블라디미르 레닌

그렇다면 뤼순이 그렇게도 중요했냐 하면... 네 그랬습니다.


가난에 시달리던 러시아인들에게 러일전쟁의 소식은 울고 싶은데 뺨을 계속 때려주는 거였습니다. 여기에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 등으로 삶이 더 궁핍해졌죠. 뤼순이 함락된 지 얼마 안 된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죠. 그들의 청원 내용에는 전쟁을 끝내는 것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평화롭게 차르에게 청원하러 온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건 무차별 총격이었고, 국민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죠. 이렇게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납니다. 혁명 자체야 러시아 내부에 쌓인 모순 때문이었지만 러일전쟁의 패배는 좋은 기폭제였고, 일본은 비밀리에 혁명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으니 얻어 걸린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데다 열심히 극동으로 가고 있던 발트 함대에도 비상이 걸립니다. 뤼순이 함락된 이상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야 했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든 일본 근해를 지나야 했죠.

뤼순은 일본의 대함대를 계속 붙잡아두었고 (주로 기뢰였지만) 그동안 해군은 15척 침몰, 16척 대파라는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이 함대가 이제 뤼순을 떠나서 수리와 보급을 받고 다가오는 발트 함대를 대비해 강훈련을 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기의 3군도 드디어 뤼순을 떠나 북으로 향합니다. 만주군 사령부는 이제 러시아군과의 결전을 결심할 수 있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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