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02/27 23:42:18
Name   tannenbaum
Subject   호구의 역사.
호구 -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난 호구였다. 아주 만만하고 이용해먹기 좋은 특상급 투뿔라스 호구.

호구에도 종류가 있다. 나는 지갑호구였었다. 적당히 등 좀 긁어주면 알아서 지갑을 여는 허세끼 충만한 머저리 호구라고나 할까... 가난 때문에 고생했던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이었는지, 애정결핍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 나는 돈에 욕심이 정말 많았다. 다행히도 경제상황은 내 능력에 비해 늘 괜찮은 편이었다. 대학시절엔 과외천재라는 헛소문 때문에 시골구석에서 늘 몇탕씩 뛸 수 있었고, 김대중정권 시절 암암리에 이루어졌던 지거국 출신 할당량 때문에 스펙에 비해 과분한 기업에 취업을 했었고, 운이 좋았던건지 어떤건지 손대는 주식마다 빵빵 터졌으니..... 지금 돌아보면 세번의 인생의 기회라는 건 그때 다 썼나보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항상 사람이 들끓었다. 주말이면 약속이 몇개가 겹쳐 스케줄 조정하는 것도 곤역일 정도로.... 당연하겠지. 대신 지갑 열어주는데 사람이 많을밖에....  

A라는 후배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알게되 같이 공부하던 친구였다. 처음에 두어번 점심을 사준 이후 자연스레 내가 졸업하는 날까지 그 친구 밥을 샀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당연하다는 듯 택시비를 받아가고, 용돈을 받아가고, 심지어 자기 데이트 하러갈 때 내 카드를 달라고까지 했다. 여기서 호구의 특성이 나온다. '형은 진짜 우리 친형보다 더 따르고 싶어요.' , '형 나는 그런 생각한다. 나중에 나이들면 형이랑 근교에 전원주택 나란히 지어서 가족들끼리 모여 사는거. 너무 좋을 거 같지 않아요?' 이런 등 긁어주는 소리에 내가 지금 쓰는 돈은 어차피 부담도 안되고 평생 갈 사람에게 이만큼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 진심으로 믿었다. 완벽한 호구.....

B라는 사람과 사귀었었다. 지금이야 나이들고 배나온 아저씨지만 그땐 가끔 CF나 드라마 영화 여기저기에 가끔 단역으로 나오던 꽤 괜찮은 외모의 그런 친구였다. 어떻게 우연히 알게되었고 그 친구가 대시해 우린 연인(이라 쓰고 호구)이 되었다. 그 친구에게 오피스텔 전세 하나 잡아주고 카드를 하나 주었다. 하지만 그친구는 늘 돈을 요구했다. 영화사 관계자 만나러 가야 한다. 피팅을 좀 해야겠다. 연기교습을 받아야겠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 리니지에 빠져 내게 가져간 돈으로 현질과 아이템러시에 다 꼴아박은 걸 알았다. 하지만.... 난 호구다. 그사람과 헤어지게 될까 알고도 모른척 계속 그 사람에게 돈을 가져다 바쳤다. 자발적 호구.....

그리고 그날이 왔다. 끝없이 추락하는 주가에 내 주식은 자고나면 반토막이 되었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 다시 투자하고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 은행, 저축은행, 심지어 대부업체까지 끌어다 위태위태한 날을 이어가던 어느날.... 등기우편이 하나 날아왔다. 보증을 서주었던 C의 은행이 원금과 밀린 이자를 상환하라는 문서였다. 그 편지를 받은 날 이후 처절하게 무너지는데는 몇일 걸리지 않았다. 카드는 정지되고 살던 집, 은행통장의 잔고, 차, 심지어는 내 급여까지 내것이 아니게 되었다.

B는 카드가 왜 정지가 되었냐 전화를 했다. 내가 무슨 창피를 당했는 줄 아느냐며 전화기가 터져나가라 화를 냈다. 그래서 사실대로 털어놨다. 그러자 방금전까지 길길이 날뛰던 B는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기운내고 잘 될거야. 그런데 이상황에 내가 형 옆에 계속 있으면 부담이 클거야. 내가 떠나는 게 도리일 거 같아. 무엇보다 건강했으면 좋겠어. 잘지내' 그말을 끝으로 B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내 자발적 호구의 끝은 이것이었다. 얼굴 한번 보고 잘지내라는 말 대신 한 통화의 전화.

그 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잠시 고향에 내려가 친구네 집에 잠시 기거했었다. 눈을 뜨면 술을 마시고 취하면 잠들고 다시 술을 마시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폐인처럼 아니... 폐인생활이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떠오른 A에게 연락을 했다. 언제 내려왔냐며 연락도 없이 와 서운하다는 말과 함께 A는 간만에 밤을 찢자며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이런저런 안부인사 뒤 내 이야기를 했다. 하늘에 맹새코 경제적인 도움을 요구할 목적은 아니었다. 그저 예전처럼 약간의 격려와 위로를 기대했었을 뿐.... 내말이 끝나자 A는 '난 형 믿어. 형은 잘 헤쳐나갈거야'라는 격려를 하고 오늘 집안에 일이 있는 걸 깜박했다며 자리를 떴다. 내 완벽한 호구의 끝은 이것이었다. 시때로 안부전화와 때마다 문자를 보내던 A는 그날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몇번의 내 연락도 받지 않았고. 나중에 전원주택 같이 지어 가족끼리 모여 서로 의지하며 노후를 보내자던 A와의 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비단 A와 B뿐은 아니었다. 소문은 빨랐고 쉴새없이 울리던 내 전화는 더이상 울리지 않게 되었다. 연락처의 수백명 중 단 다섯명의 고등학교 친구들과 몇몇 선배들.. 그리고 직장 동료 두어명만이 남았다. 내 호구생활의 주인들이었던 나머지 수백명은 더이상 내게 호구짓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호구탈출....

이후 그 다섯명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난 신용불량에서 벗어났고 몇 선배들의 소개로 면접을 보러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 경력을 인정을 받아 나름 괜찮은 곳으로 재취업을 성공했다. 이 모든 일들은 단 몇개월 사이에 폭풍처럼 지나갔다. 폭풍이 지나고 보니 내 주위엔 열명 정도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그댄 정말 너무나 황량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 나이 서른 그때 처절하게 무너졌던 것이 참 다행인것 같다. 만일 그때 무너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난 오만방자한 한명의 호구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늦게 터져 마흔이 훌적 넘은 지금 무너졌더라면 절대 두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것이다. 다행이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만큼 잘나가지도 어디 명함을 내밀만큼도 아니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것 편하게 먹는 생활까지는 되었다. 아까 소문을 빠르다고 말했던가? 아주 가끔 '어이 호구~ 이게 얼마만이야~ 너 다시 괜찮아졌다며? 그럼 내 호구 좀 되라. 예전처럼. 넌 원래 호구잖아. 응?' 연락이 오기도 한다. 그럴때면 살작 웃음이 난다.

재작년이었나. 언제였나...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A였다.

'아 형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아무리 사는게 바빠도 서로 연락은 하고 삽시다. 예전에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연락처가 싹 지워져서 어떻게 연락 한번 못드렸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00형님한테 말 들었습니다. 형님 0000커피 차리셨다면서요? 아. 이거 일찍 알았으면 화분 하나라도 보내는건데. 어떻게 장사는 잘 되세요?. 형님은 잘 하실겁니다. 아 맞다. 가게 화재보험은 드셨어요? 요즘 자영업은 화재보험 필수인거 아시죠? 제가 얼마전에 그쪽일 시작했거든요. 여튼간에 시간 언제가 좋으세요? 얼굴 한번 보고 그동안 못한 이야기도 해야죠. 하하하하하'

'어. 그래. 그런데 지금 좀 많이 바쁘네. 통화 길게 못할 거 같다.'

'넵. 알겠습니다. 이따 저녁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통화 끝나면 가게 주소 좀 문자로 주세요. 한번 찾아 가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고 난 그번호를 차단했다. 그때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지만.... 지금은 난 그때 호구 tannenbaum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p.s 요전날 탐라에서 말했는데 지금 제가 옛날 이야기 하는건 우울해서 일까용? 취해서 일까용??

넵!!! 정답!!!

저 술마셨어용~~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3-13 09:23)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8
  • 배울게 있는 글에 추천을 아니할수는 없지요.
  • 사람의 1/3은 알코올로 이루어져 있지요
  • ㅠㅠ
  • 음주티타임은 추천이라고 배웠습니다
  • 귀여우셔용~~
  • 귀여운 오빠 술주정은 춫천!
  • 가슴이 아리네요 잘 읽었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76 기타삶의 의미를 찾는 단계를 어떻게 벗어났냐면 8 골든햄스 24/03/14 922 18
1375 기타소수 사막은 얼마나 넓을까? 4 Jargon 24/03/06 868 4
1374 기타민자사업의 진행에 관해 6 서포트벡터 24/03/06 827 8
1373 기타노무사 잡론 13 당근매니아 24/03/04 1528 16
1372 기타2024 걸그룹 1/6 2 헬리제의우울 24/03/03 613 13
1371 기타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855 20
1370 기타터널을 나올 땐 터널을 잊어야 한다 20 골든햄스 24/02/27 1560 56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1401 16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955 8
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054 11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326 30
1365 기타자율주행차와 트롤리 딜레마 9 서포트벡터 24/02/06 1184 7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1115 23
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549 12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151 69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2812 37
1360 기타텃밭을 가꿉시다 20 바이엘(바이엘) 24/01/31 1001 10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6533 3
1358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3) 17 양라곱 24/01/22 6160 22
1357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2) 17 양라곱 24/01/17 5686 14
1356 요리/음식수상한 가게들. 7 심해냉장고 24/01/17 1253 20
1355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1) 9 양라곱 24/01/15 2671 21
1354 기타저의 향수 방랑기 31 Mandarin 24/01/08 3294 2
1353 의료/건강환자의 자기결정권(autonomy)은 어디까지 일까? 7 경계인 24/01/06 1276 21
1352 역사정말 소동파가 만들었나? 동파육 이야기. 13 joel 24/01/01 1307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