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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6/05 05:38:23
Name   틸트
Subject   세상은 이런 색을 하고 있었던 걸까

-

언제든 돌아갈 수 있어 그 때의 나 자신으로
그야 돌아봐준 게 기적인걸
생각하던 생활로, 지금이라면 분명히
힘들지 않게 돌아갈 수 있을텐데.

이렇게 그대가 보이지 않으니
오직 그대만이 머리 속에, 마음 속에, 혀의 뒤쪽에.

세상은 이런 색을 하고 있었던 걸까
역시 이별이라고 말했던 걸까
오랜만에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보았어
내뱉은 숨이 흘러 떨어져 발밑에 굴러가

세상은 이런 색을 하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잊어버릴 것 같았어
오랜만에 네 상냥한 그 눈이 떠올라서
눈물이 흘러 넘쳐 발밑에 떨어져.

일부러 지나가지 않았던 길도
항상 껌을 사서 돌아갔던 길도
곧 도착할테니까 기다려줘
네 얼굴이 머리 속에서 마음 속에서 내게 웃어주고 있어.

누구의 발소리가 들리는 걸까
뒤돌아봐도 어디에도 없어
확인할 수 있게 그대의 감정을 몇 번이나
뿌리쳐버리거나, 강하게 끌어안을 수도 없네

옆에서 하품하고 옆에서 자고 옆에서 따스한 손에 닿았는데,
좋아한다며
당신이 만들었던 모든 것이
슬퍼 넘쳐흘러 발밑이 희미해.

세상은 이런 색을 하고 있었던 걸까
역시 이별이라고 말했던 걸까
오랜만에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보았어
내뱉은 숨이 흘러 떨어져 발치를 굴러가

세상은 이런 색을 하고 있었던 걸까
어쪄면 잊어버릴 것 같았어
오랜만에 당신의 상냥한 그 눈이 떠올라서
눈물이 흘러서 발치에 떨어져

.....

아아, 일도 거짓말이었지.
그때 손을 잡고 있었는데.



--


친구와 이것저것 듣던 어느 날, 이 노래를 듣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거 노래 제목이 투명드롭이래. 근데 드롭이 무슨
뜻일까? 투명 드롭이라니 역시 투명한 눈물일까. 혹은 투명한 방울일까? 아니야 투명 드롭이라면 역시 투명한 드롭스 사탕일지도 몰라. 그리고 가사를 찾아보고 우리는 모두 패배했지요. 노래는 눈물과 방울과 그리고 드롭스 사탕을 모두 다루는 노래였으니까. 투명 드롭. 토우메이 도롯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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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ko. 야나이 아이코, 호적상 카이 아이코, 그리고 음악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aiko로 불리는 싱어송라이터. 좋아합니다. 이름은 인생처럼 복잡하겠지만 내 인생도 충분히 복잡하니 타인의 복잡한 인생에 뭐라 말을 늘어놓고 싶지 않아요. 당신도 복잡한 인생을 살았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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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ko가 서른 몇이 되었을 때, 호시노 겐이라는 나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어느 일본인 아티스트와 열애설이 발생합니다. 호시노 겐은 아이코가 아플 때 약을 사갔네 어쩌네 말했지만 아이코는 공식적으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 잠시 헷갈렸네요. 이 에피소드는 호시노 겐 전의, 고쿠분 타이치와 사귀던 시절의 일화였나. 고쿠분 타이치건 호시노 겐이건 역시 전혀 중요한 문제는 아니죠. 그리고 아이코가 서른 아홉인가 되었을 때, 그녀와 호시노 겐이 결별했다는 뉴스가 뜨게 됩니다. 이삼 년 전쯤 일이었나. 역시 아이코는 어떤 공식적 입장도 내지 않았고 남자는 또 입을 털었겠지만 혹은 털지 않았겠지만 별 전혀 관심 없습니다. 음악을 하는 남자는 은행에 다니는 남자 혹은 바텐더 만큼이나 믿을 게 안 되니까요. 아, 그러니까 남자는 다 똑같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결별 직후 aiko는 곧 새 앨범을 냅니다. 투명 드롭은 그때 앨범에 들어있는 곡이었고요. 정말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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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노래와 가사에요. '동그라미'가 반복됩니다. 방울이, 눈동자가, (껌과 혀 뒤에서 유추되는) 드롭스 사탕이, 눈물이, 언어가, 수 많은 투명한 동그라미들이 희미하고 뿌옇게 먼 발치에에서 굴러다닙니다. 시적 언어의 형상화에 관심이 있다면 분석적으로 들어봐야 할 노래에요. 거리에 대한 감각도 아름답습니다. 안아주는 거리, 옆에서 자고 있는 거리, 내 마음 속의 거리, 그리고 사람이 떠나간 거리. '발밑足元(아시고토)'와 '발소리足音(아시오토)'의 말장난도 재밌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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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를 본 어떤 친구는 이게 뭐가 좋냐. 엄청 유치한 헤어짐 타령 노래잖아, 라고 말했습니다. 가사를 본 다른 친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거 너무 얀데레 노래 아니냐? 집착적인 여자 싸이코패스의 노래인데. 마흔에 저런 옷 입고 저런 노래 부르는 건 온전하게 정신이 돌아버린 사람이라고. 게다가 헤어지고 만든 노래에 저런 마지막 가사라니, 그냥 미친 여자잖아. 그리고 그 친구들과는 이제 연락이 닿지 않지만 별 문제는 없습니다. 제가 죽여 묻어버렸으니. 친구는 다시 만들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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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공식 가사집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도 거짓말이었지. 그때 손을 잡고 있었는데.'
앨범의 노래에는 수록된 가사이며, 라이브에서도 부르는 가사고, 앞의 가사들과 감성의 톤이 바뀌는 가사고, 부르고 싶은 가사겠죠.


예술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위대한 일은
자기 작품에 감정을 새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겠지요.
덕분에 이 노래는 그녀의 명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노래는 아닐 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요. 좋아요. 좋은 노래에요.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6-1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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