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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12/11 16:28:29수정됨
Name   烏鳳
File #1   1544499687_1544497041011.png (102.0 KB), Download : 0
Subject   한 전직 논술강사의 숙대 총학의 선언문 감상


#0. 들어가면서

원래 손님 오신다고 하셨었는데, 늦으신다네요.
시간이 비는 중에, 딱히 할 건 없기도 해서...
전직 논술강사 입장에서, 숙대 총학의 선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참고로 저는 전형적인 한남충으로, 워마드류의 래디컬 페미니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임을 밝혀 둡니다.
그런고로, 래디컬 페미니즘을 지지하시는 분이시라면 굳이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하도 한심해서 몇 자 적어보는 겁니다.


#1. 선언문의 요약 - 일단 까려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이번 경인중-숙대 사건에서 숙대 총학의 말을 첫문단 빼고,
두번째 문단부터 각 문단을 세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A : 경인중 측에서는 숙대 총학이 요구하는 수준의 사과는 거절하였다.
- B : 경인중 측에서는 사과를 거절하면서, 숙명여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언급하였다.
- C : 숙대 총학은 사건의 종료를 선언한다.

- D : (사과가 없었음에도) 종료를 선언하는 것은 부정적인 여론(백래쉬?) 때문이 아니다.
- E : 다만, 이로 인하여 우리와 연대 중인 학우들이 상처받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 F : 향후에도 학우들과의 연대는 계속할 것이다.

- G : 우리(?)의 의견은 앞으로도 사소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될 여지가 높다.
- H : 그러나 우리의 의견이야말로 장차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I  : 앞으로도 지지를 부탁드린다.

즉, 선언문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가. 경인중 측이 부정적인 여론을 무기로 숙대 총학을 협박(?)하면서, 총학이 요구하는 사과는 거절함. (A, B)
나. 그런데 부정적인 여론에 학우들이 힘들어하므로, (우리는 더 싸울 수 있지만) 종결선언함. (C, D, E, F)
다. 우리의 의견(페미니즘이겠죠? 제 시각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지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 기죽지 마. 응원해줘(G, H, I)

중언부언,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건 굳이 안 적겠습니다.


#2. 글의 목적에 비추어봤을 때, 들어가서는 안 되었어야 할 표현 - "굴복"

이 선언문에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 말은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는 표현, 다시 말해 '지지 않았다'입니다.
즉, 숙대생들도 알고, 숙대 총학도 아는거죠.
그들이 '백래쉬'라고 표현하는... 이번 사건에 관하여 숙대 측에 부정적인 여론이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유형무형으로 그들에게도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며칠 전 숙대 총학이 당당하게 요구하였던 조건들은 이행이 안 됐어요.
경인중 측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어 버렸고요.
그럼에도 '지지 않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화자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반대의 인상을 주게 됩니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지지 않았다'라니, 진 거 맞네... 라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전적으로 제 추측입니다만...
학내 요구인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숙대 총학은 지난 번 사건으로 경인중 측에 여러가지 조치를 요구했습니다만 거절당했다는 것을 밝혔어야만 했고,
향후 어떠한 대응을 해나갈 지 입장을 밝혀야 했었던 것 같습니다.

A, B로 요약한 문장이야 별다를 것이 없는데요.
문제는, 세번째 문단 첫 줄의 "굴복한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독자들에게 줄 인상을 계산하지 않은 점입니다.
어떻게든 사건을 '종결'시키고 싶은 것은 알겠는데... 정작 "굴복"이라는 말이 들어가버린 점이 큰 실책이죠.

숙대 총학은 글의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3. 관점의 전환 - 이번 사건은 앞으로 벌어질 일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메시지

여기서부터는 정치의 영역입니다만... 숙대 총학은 이번 사건을 숙대 총학만의 일로, 너무 안일하게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중학생들이 잘했냐 못했냐를 굳이 따져본다면 '잘못은 있다' 정도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숙대에 재학중인 재학생들이라면, 저처럼 생각하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중학생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겠지요.

그런데 약점은 부정적인 여론입니다. 게시물의 표현들이 '대학생'치고는 부적절했다는 걸 숙대 총학도 부인하기는 어렵거든요.
그러니, 이 때는 관점을 바꿔야지요.

앞으로도 얼마든지 숙대 내에서 "재발" 가능한 사건이라는 점,
비단 숙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대" 내지, 다른 "대학교", 나아가 사회 어디서든,
(래디컬) 페미니즘 대자보에 비슷한 일이 발생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지적했어야 했습니다.

지금이야 낙서 수준이지만,
더한 가해가 없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이야 숙대 재학생들이 적어두었던 표현이 부적절한 감이 있긴 했지만,
앞으로는 문제 없는 (페미니즘 지향의) 표현에도 부당한 비난이 없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 더해서, 향후 비슷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가해자 측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듣기는 요원한 일이라는 것을 지적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대처했더라면, "굴복한 것은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올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굴복할 일도 아니고, 앞으로 계속해서 힘을 모아 대처해나가야 할 동력이 생기는 거잖습니까.
지금까지의 숙대 총학의 행보에 비판적인 학내 구성원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앞으로는 페미니즘 자보이기만 하면 이번과 같은 취급, 아니 그 보다 더 나쁜 취급을 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야 할 일이었지요.

즉, 페미니즘 감수성은 공유하고 있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 총학의 반응에는 부정적이었던 이들이나,
페미니즘 감수성은 공유하고 있지만, 래디컬 페미니즘에는 부정적이었던 이들에게도,
숙대 총학이 외연 확장을 시도할 수 있었는데, 그걸 놓친 겁니다.


#4. 결어 - 무리수를 덮으려고 던진, 못 쓴 글

애초에, 경인중의 공문에 숙대 총학이 발끈하면서 던진 선전포고(?)만 아니었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애들이 낙서 좀 했다 치고 넘어가지만, 그 메시지에는 우려를 표한다. 양성평등 교육에 신경 써 달라.'
'참여형 대자보의 특성상, 다소 부적절한 표현이 있을 수는 있으나 학내 구성원의 의견인만큼, 존중을 구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반응했더라면 숙대 자체가 욕 먹을 일은 없었을 걸요?
그런데 숙대 총학이 그 선전포고를 날리는 무리수를 두었고, 때문에 인터넷 여기저기에 회자되고, 나아가 언론에까지 보도되었죠.

좋아요. 무리수 던질 수 있죠.
그런데 무리수의 뒷수습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걸 보니 참 한심합니다.
글 자체도 아홉 줄이면 충분할 메시지를 중언부언 길게도 늘여놓았던데다,
메시지 자체에 "굴복은 아니다"라는 표현을 넣으면서 역효과만 났지요.
반대측에서 들려오는 '정신승리'라는 비아냥까지 듣는 처지가 되었고요.


내부결집도 좋고 다 좋은데...
반대편에 있는 사람마저 한심하다고 느끼게 되는 대응은 좀 그만 봤으면 싶습니다.
생산성 있는 논쟁이 가능한 상대를 보고 싶은 것이지,
생각없이 '내 생각만 맞아'라고 우기는 어린아이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 토비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12-27 16:3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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