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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4/03 12:18:57수정됨
Name   烏鳳
Subject   제1저자, 교신저자, 학회, 자리싸움, 그리고 관행
#0. 들어가면서

역시 손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안 오셔서 시간이 비네요.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읽은 글을 보고 몇 자 적어봅니다.



저는 논문을 작성해 본 적이 없는 학사 나부랭이입니다.
물론 로스쿨을 졸업하면 전문석사... 라는 걸 주기는 하는데,
이게 논문을 쓰지 않아도 주는 날라리 학위라서... 어디 가서 석사 소리는 못하고 삽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의 제1저자, 교신저자, 학회의 관행, 그리고 교수사회 자리싸움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죠.


#1. 한국OO학회

OO학계에서 당시 거의 유일무이한 학술원 등재지는 한국 OO학회의 학회지 뿐이었습니다.
이전까지.. 한국OO학회는 지도교수가 지도한 대학원생의 논문도 등재를 하고는 했었지요.

문제는 20XX경, 한국OO학회가 논문심사 지침을 바꾸면서 시작됩니다.
이전까지는 제1저자가 대학원생이라도, 교신저자로 지도교수가 들어가 있으면 논문의 투고 및 게재에 문제가 없었는데요.
[수준 미달의 논문이 범람한다]는 이유로, [학회 정회원이 제1저자인 논문만]을 심사 후 게재하겠다고 내부 규정을 바꾼겁니다.

물론, 다른 유수의 학회(등재학회)가 따로 있었다면 이게 문제가 좀 덜 되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 한국OO학회가 OO학계의 유일무이한 톱 레벨의 학회이자, 유일한 등재학회였다는 점이 걸립니다.

또 하나 문제가... 학회의 까다로운 가입절차였습니다.
OO관련 학과 대학원생에게[만] 한국OO학회의 [준회원] 가입자격이 주어지고,
준회원이 성실하게 수년 간 회비를 납입해야만 비로소 [정회원]으로 받아주었지요.

그러다 보니.. 박사과정 대학원생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석사과정 대학원생은 자신이 제1저자인 논문의 투고가 막혀버린 겁니다.

즉, 석사과정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자신이 제1저자인 논문을 한국OO학회 말고, 그외 기타등등 학회 학술지에 투고하거나,
아니면 지도교수 이름을 빌려서, 지도교수를 제1저자로, 자신을 공동저자로 기록하여 한국OO학회 학술지에 투고하거나,
이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던 것이었지요.


#2. 교수님, 교수님, 우리 교수님

제 의뢰인이셨던 A교수님은, 자신의 모교에 재직 중이셨는데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제한이냐면서 처음에는 펄쩍 뛰셨답니다.
(결국 한참 뒤에, 자신이 직접 학회장에 선출되셔서는, 이 투고제한 규정을 폐지해버리셨지요.)

그런데 당장 투고가 막힌 지도학생들이 문제였죠.
때문에 교수님은 선택지를 주셨죠.
'너네들이 선택해라. 한국OO학회 학회지에 투고하겠다면 내가 얼마든지 이름을 빌려줄께'

이후 A 교수님의 연구실에서는...
석사과정 대학원생들이, 교수님을 제1저자로, 자신을 공동저자로 하여 한국OO학회에 논문을 투고했습니다.
물론 이미 정회원 자격을 취득한 박사과정 학생들이야 제1저자는 여전히 대학원생이었지만요.(교수님은 교신저자로 올라가셨고요.)

당연히 A교수님의 [개인]기자재가 논문 작성을 위한 실험에 사용되었고,
학생들은 논문 투고를 위해서는 당연히 교수님께 논문 들고갔다가 퇴짜도 맞고, 수정도 받고...
딱 하나, 제1저자 자리에 누구 이름이 들어가느냐 말고는 이전과 동일한 모습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게 제 의뢰인 교수님 뿐만은 아니었었나 봅니다.
수 많은 다른 교수님들의 연구실에서도.. '이 빌어먹을 투고제한 ㅆㅂㄹㅁ'를 외치면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3. 자리싸움

교수직은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또, 서울에 소재한 유수대학의 교수직과, 지방의 알려지지 않은 학교의 교수직에도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때문에, 처음에는 지방대의 교수에 임용되었다가,
시일이 지나 서울 소재 학교 교수직에 공석이 생기면 지방대에 재직 중이던 교수가 서울로 진입하는 경우도 있나 봅니다.
이 과정에서 실력만으로 가능하다면 문제가 좀 덜할지 모릅니다만,
아시잖아요. 대한민국이 꼭 그렇진 않다는 것을요.

A교수와 동문인 B교수가 있었습니다.
B교수는 A교수님이 재직 중이었던 모교로 자리를 옮기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모교의 교수직이 당분간은 비어 있지 않을 듯 했나 봅니다.
때문에 B 교수는... 그 자신이 타 학교의 교수이면서도 모교의 박사과정 대학원생으로 등록하십니다.
그러면서 대학원생들로부터 정보를 모으셨지요.

그 과정에서 A교수 연구실의 관행이 포착이 됩니다.
[A교수는, 자신이 집필하지도 않은 논문 제1저자로 올라가서는, 학교를 속이고 연구비를 타 먹고.. 학회를 속여 학회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

얼마나 자극적이면서도 또 매력적인 소재인가요.
B교수의 제보를 언론이 덥석 물었고, A교수님은 대학원생의 업적을 착취하는 악질 교수... 라는 언론보도가 나갔습니다.

그리고, A교수님의 지도제자였던 C가 총대를 메고, A교수를 사기 등등의 혐의로 고소/고발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좀 거시기... 하게... B교수는 고소/고발인이 아니었고, 참고인으로만 사건에 관여하였습니다.)


#4. 진실게임

A 교수님은 억울해서 미칠 노릇이지만, 어디 하소연하실 곳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이미 언론에서 찍힌 악질 교수로 손가락질 받는 마당이었으니까요.

교수님의 제자 C가 제기했던 다른 혐의들은 모두 수사과정에서 벗겨져나갔고,
최후에 남은 혐의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사기, 즉 교수님이 제1저자도 아니면서 제1저자로 등재되어, 학교의 연구지원금을 빼먹었다...는 혐의였고요.
다른 하나는 업무방해, 즉 교수님이 허위로 제1저자로 등재되어, 한국OO학회의 논문심사 업무를 방해했다는 혐의였습니다.

C는 자신이 썼지만, A교수님이 제1저자로 나간 논문이 있다. 그리고 교수님이 이걸로 학교에서 연구비를 수령했다..고 주장했지요.
(연구비 지원이 나갔던 게 50만원인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곁들이기를, 이 논문 집필과정에서 A교수님은 자신을 [지도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지요.
기자재도 자신의 기자재를 사용하였으며, A교수님의 기자재를 사용한 적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고요.
(즉, 교신저자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였습니다.)

다른 A교수님 제자들은 "C 너님 미쳤냐... 지도 다 받아놓고 무슨 소리야"라고 하면서
수사기관에 탄원서도 내고, 참고인 진술도 했습니다마는... 수사기관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수사기관에서는 탄원서와 참고인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했었던 듯 합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것이... 탄원서를 낸 사람들, 참고인 진술을 한 사람들이 모두 A교수님 제자들이었으니까요.

그렇게 검찰조사가 마무리되던 무렵, 제가 선임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사 딱 한번 동행했는데, 검찰이 기소를 하더군요.


#5. 연구지원비 규정과 학회규정

그런데... 학교의 연구지원비 규정을 보니까, 어차피 학교측에서 교수에게 지급하는 연구지원비는
교수가 제1저자인 논문에도 지급되지만,
교수의 지도학생이 제1저자인 논문에, 교수가 교신저자로 올라가는 경우에도 동일한 액수가 지급되더군요.

유레카! 교수님의 사기혐의가 벗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C가 논문 작성할 때 교수님에게 이 메일로 제출했던 초고들은 고스란히 교수님이 프린트하셔서 보관중이셨거든요.
아마 C는 몰랐겠죠.
A교수님은 C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C에게 지도할 사항들을 초고를 프린트하셔서 전부 메모해두셨더라고요.
이 초고들(교수님의 볼펜, 연필로 된 지도사항 등등이 다 남아있었습니다.) 때문에 
교수님이 실제 교신저자로서 기여했다는 점이 증명되었고,
교신저자인 이상 어차피 동일한 연구지원비가 나가는 것이니,
결국 재판과정에서 교수님에게 사기의 고의, 편취의사가 없었던 점이 인정되었습니다.

문제는 업무방해 혐의였습니다.
아무리 A교수님이 말도 안 되는 규정 아니냐면서 계속 개정을 건의했고,
결국 이 사건이 언론에 제보되기 불과 몇 달 전에 교수님이 학회장 취임해서, 폐지해버린 규정이었어도...
C의 논문투고 당시에는 엄연히 살아있었던 규정이었거든요.

재판부에 A교수님이 정말 눈물로 호소하셨지만, 재판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물론 저도 어쩔 수 없었고요.)
결국... A교수님은 연구지원비 사기혐의는 무죄판결을 받으셨지만, 
학회에 대한 업무방해가 인정되어 벌금 100만원이 선고되었습니다.
검찰이 계속 무죄부분을 다투어서.. 대법원까지 갔습니다만, 판결은 그대로였고요.


#6. 관행

글쎄요.. A교수님이 업무방해로 벌금 100만원의 형벌을 선고받으시기는 했습니다마는...
솔직히 저 개인 입장에서... A교수님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학회 규정이 합리적이지가 않았던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고,
결국 어렵사리 학회장 자리까지 오르셔서 문제의 투고제한 규정을 폐지한 분도 A교수님이셨거든요.
또한, A교수님 연구실 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님 연구실에서도
투고제한 규정을 우회하는 [관행]은... 알음알음으로 다들 이루어졌던 관행이기도 했고요.

위에서 법을 만들어도, 아래에서는 나름의 대책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아래에서의 대책이 100% 합법적이라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는 없습니다.
불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위법 내지 탈법의 여지가 있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관행이라는 말로 처단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애초에 위에서 만든 [법]이 합리적이었다면, 굳이 아래에서도 [대책]을 강구할 필요성은 줄어들겠지요.
그 때문에 위에서 법을 만들 때, 조금이라도 더 현실을 반영하는.. 합리적인 입법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더더욱 클 겁니다.
위에서 [법]을 잘못 만든다면, 이로 인해 발생하는 위법행위는 더더욱 늘어날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입법부의 역할, 국회의원 개개인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겠고요.


#7. 에필로그

C가 총대를 메었던 공격(?)이 실패하자, 이번엔 B교수가 전면에 나섰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다시 A교수님을 고소하였지요.

저번에 쓴 맛을 단단히 보셨던 A교수님은
아예 고소장이 접수되어서 조사받으러 오시라는 연락을 받자마자 절 선임하셨고,
이번에는 수사기관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으셨습니다.

B교수는 애초에 학회 정회원이시라..... A교수님은 교신저자로만 올라가셨었고...
B교수가 A교수님에게 제출한 논문의 초고들에도 역시,
A교수님이 꾹꾹 눌러쓰신 지도사항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리에 대한 욕망이 이렇게도 큰 것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 오늘 재보선 날이라서 몇자 적어봤습니다. 해당 지역구에 거주하시는 홍차클러 여러분들께서는 꼭 투표하시길 ;)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4-14 21:0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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