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08/22 13:52:11수정됨
Name   임아란
Subject   부부 간의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선 이 글은 티타임 게시판에 올라온 Jace.WoM님의 https://redtea.kr/pb/pb.php?id=free&no=9569 글을 보고 쓴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토끼 같은 딸을 낳아서 아내와 잘 지내고 있지만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특히 저희에게는 종교가 큰 화두였어요. 아내는 모태신앙으로 성당을 다니고 있었지만(장인어른, 장모님도 성당에서 만나 결혼) 저는 종교라고 해봐야 군대에서 빵이나 햄버거 먹으러 다닌 게 다였으니까요. 연애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프러포즈하고 석 달 만에 아버지한테 허락받고 호기롭게 처가댁에 갔어요. 장모님은 결혼을 반대하시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단서를 달았어요. 저도 성당에 다녀야 된답니다. 바로 콜 때렸죠. 지금 이 상황에서 그깟 종교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조금만 더 나아가고 조금만 더 발버둥치면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아내와 결혼할 수 있는데!


그래서 열심히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매주 미사에 참석하는 건 물론이고 예비 교리자를 대상으로 한 공부, 혼인 성사를 위한 가나혼인강좌(이건 필수지만)도 열심히 들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전 그때 정말 에너지가 넘쳤던 거 같아요. 결혼 준비는 물론이며 평생 안 다니던 성당을 매주 꼬박꼬박 나가고 이사 준비에 취직 준비도 같이 하고 있었으니.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합니다. 안 해요.

여하튼 열심히 날개짓을 한 덕분에 장인, 장모께서 다니시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정말 좋았고 꿈 같은 신혼 시절이었어요. 사귈 때는 몰랐던 아내의 매력을 더 알게 되었고 제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더 깨닫게 되었죠. 근데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종교 때문이었죠. 아내는 저에게 신앙 생활을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신앙이 없던 지난 날의 인생을 인정하고, 자기와 결혼하기 위해 일부러 성당에 나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저였어요. 저에게 일요일은 느지막히 일어나서 빈둥거리다 진품명품 보고 전국노래자랑 때린 다음에 라면이나 후르륵 거리는 날에 불과했거든요.

결혼 준비할 때야 몰랐죠. 에너지가 넘치고 넘쳤던 시절이니까. Jace.WoM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사 참석이 시츄에이션에서 루틴으로 들어가던 때였죠. 게다가 당시 다니던 직장에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거든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허벅지에서 두드러기가 올라와 겨울인데도 알로에를 온몸에 잔뜩 바른 채 팬티 바람 상태로 자야만 했어요. 안 그럼 가려움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으니. 게다가 토요일도 출근했었어요. 이제 일요일은 저에게 단 하나 남은, 유일한 휴일이 됐어요. 그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지도 못한 채 성당에 간다? 점점 지치기 시작했어요. 툭하면 아파서 못 가고 늦잠 자서 못 가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아내는 저를 강제로 끌고 가지는 않았지만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죠. 자기도 많은 것을 양보했는데 잘 지켜지지를 않으니.


모든 스트레스 지수가 꼭짓점을 향해 달려가던 무렵, 결국 일이 터졌어요. 그날도 저는 아팠고 미사에 못 가겠다고 했죠. 아내는 조용히 집을 나갔고 몸이 조금 호전됐음에도 집안의 공기는 얼어붙어 있었죠. 바깥에서 들려오는 생활 소음만이 우리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소음마저 들리지 않게 된 저녁, 서로의 숨소리와 심장소리를 의식하다 줄이 팽 하고 끊어졌어요.

저는 말했죠. 더이상 성당에 못 나가겠다고. 힘들어죽겠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시발점이 되어 우리는 한참 가슴의 진흙 덩어리를 하나씩 꺼내 탁자에 풀어헤쳤어요. 그래도 소리를 지르거나 말을 자르지는 않았어요. 그건 우리가 암암리에 정한 마지노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어느정도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응어리는 사라지지 않은 채 우리 주변을 계속 돌아다녔어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풀어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머릿 속으로는 평소 생각했던 이론과 조언들이 가득 차 있는데 무슨 소용이랍니까. 실전에 적용된단 보장이 없는데. 생각한대로만 됐었다면 롯데는 밥 먹듯이 우승하고 왕조 구축했을 겁니다. 더이상 견딜 수 없던 저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아내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방에 들어갔어요(나중에 물어보니 기다리는 동안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생각 정리라고 말했지만 이끌어낼만한 건덕지가 없는데 무슨 정리를 하겠어요. 그냥 내 자신이 가라앉히기를 기다린 거죠. 분노를 표해내지 말자. 기다리자. 내 안의 부유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자. 그러고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네 시간 정도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와, 부대정훈교육 때는 십 분만 앉아있어도 온 세상의 졸음이 다 몰려오는 거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음이 진정되더라고요. 난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나. 무엇 때문에 아내랑 이렇게 얼굴도 마주보지 않은 채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가. 갑자기 제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저는 아내한테 말했습니다. 우리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다음날이 월요일이었고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아내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저희는 꼬치를 안주 삼아 하이볼을 홀짝이며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어요. 하이볼 한 잔에 근심을. 하이볼 한 잔에 불만을 알코올과 함께 하늘로 저멀리.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끈적하게 깔린 애정과 바보처럼 웃고 있는 남자와 여자 밖에 없었어요. 저희는 웃으며 손을 잡은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죠. 그리고는 평생 잊지못할 기세로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아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그 뒤로도 조그마한 위기가 계속 찾아왔지만 이때처럼 서로 떨어진 채 시간을 가져본 적은 없어요. 알고 있거든요. 저희는 절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다툼과 의견 교환 속에 성립된 신뢰가 저희의 울타리를 구축하고 있어요. 이 사람은 나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다고.


결론이 뭐냐고요?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9-03 15:3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2
  • 결론이 맘에 듭니다
  • 나만 아내 남편 여친 남친 없어
  • 결론이 부럽습니다
  • 결론은 ㅅㅅ. 역시 어르신의 지혜란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83 정치/사회의대 증원과 사회보험, 지대에 대하여...(펌) 42 cummings 24/04/04 5109 37
1382 기타우리는 아이를 욕망할 수 있을까 22 하마소 24/04/03 1107 19
1381 일상/생각육아의 어려움 8 풀잎 24/04/03 766 12
1380 정치/사회UN 세계행복보고서 2024가 말하는, 한국과 동북아에 대한 의외의 이야기 16 카르스 24/03/26 1650 8
1379 일상/생각인지행동치료와 느린 자살 8 골든햄스 24/03/24 1358 8
1378 일상/생각아들이 안경을 부러뜨렸다. 8 whenyouinRome... 24/03/23 1124 28
1377 꿀팁/강좌그거 조금 해주는거 어렵나? 10 바이엘 24/03/20 1470 13
1376 일상/생각삶의 의미를 찾는 단계를 어떻게 벗어났냐면 8 골든햄스 24/03/14 1322 19
1375 창작소수 사막은 얼마나 넓을까? 5 Jargon 24/03/06 1121 4
1374 기타민자사업의 진행에 관해 6 서포트벡터(서포트벡터) 24/03/06 988 8
1373 정치/사회노무사 잡론 13 당근매니아 24/03/04 1757 16
1372 기타2024 걸그룹 1/6 2 헬리제의우울 24/03/03 760 13
1371 일상/생각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992 20
1370 기타터널을 나올 땐 터널을 잊어야 한다 20 골든햄스 24/02/27 1698 56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1497 16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1054 8
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173 11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436 30
1365 기타자율주행차와 트롤리 딜레마 9 서포트벡터(서포트벡터) 24/02/06 1294 7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1225 23
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666 12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262 69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2931 37
1360 기타텃밭을 가꿉시다 20 바이엘 24/01/31 1081 10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6632 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