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Date 19/09/19 21:45:49수정됨
Name   멍청똑똑이
Subject   서울
3층짜리 빌라의 옥상에서도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탓은, 이 동네가 워낙에 높은 지역에 있어서 그렇다. 맑은 날에는 한강 너머까지 지평선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잠을 설치고 설렌 기억이 떠오른다. 빨간 십자가 사이로 주황색 가로등이 껌뻑이는 골목길을 눈으로 쫒으며, 반쯤 타다 만 담배를 비벼껐다.


처음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월세방을 찾을 때, 보증금도 낮고 월세도 낮은 방을 찾아 서울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일단 서울에서 혼자 살 수만 있다면 뭐든 될 것 같은 기분으로 며칠을 돌고 돌다 이 빌라의 꼭대기 옥탑방을 왔다. 보증금 100에 28만원. 서울 어디서도 이 값에 살긴 어렵다고 했던 공인중개사의 말이 떠올랐다. 서울 어디서도 이 값에 집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뜻이었겠지만, 지금 돌아보면 여기서 사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말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서울의 삶은 마치, 미끄러운 욕실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엉금엉금, 조심조심 허리를 쑥 빼고, 옷가지 하나 걸치지 못한 몸뚱이로 행여나 미끄러지고 굴러 넘어질까 초조해하며, 이름모를 두려움에 비명을 지를 용기는 없이 수도꼭지와 수건을 찾아 허공을 휘적이는 손짓으로. 그렇게 미끄러지지 않고 휘청대다 보면 전구도 달 수 있겠지. 욕조도 넣을 수 있겠지. 비데도 설치할 수 있을꺼야. 그런 기대로 낡은 세면대를 꽉 붙잡고 버티었다는 느낌이다.


어디에 자랑하기는 모자라지만, 다음 달 월세를 내고 쌀을 사며, 가끔 친구에게 술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만큼의 돈은 꼬박꼬박 받을 수 있는 회사를 다녔다. 열심히 벌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하는 희망을 박카스 대신 꿀떡꿀떡 잘도 받아 넘였다. 티비에서는 가끔 직장에서의 갑질이나, 과도한 노동따위의 것으로 불행해진 이들에 대한 아픈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도 스테레오는 커녕 모노사운드밖에 나오지 않는 24인치의 모니터겸용 테레비가 내는 소리로는 그보다 더 마땅한 소식이 없을 것 같았다. 사치스럽긴, 하고 삐죽이며 라면을 뜯는다. 진짜 불행은, HD방송을 틀어주는 나라에서 스테레오조차 못 내는 저 테레비같은 거야. 하고.


그런 밤들마다 방 문 바깥으로 서울의 밤거리를 저 멀리까지 바라보곤 한 것이다. 다음엔 저 동네까지 가보자. 그 다음에는 저기까지. 그 다음에는. 그렇게 한강과 차근차근 가깝게 이사를 하며, 언젠가는 강 이남의 저 커다란 아파트들의 불빛 한 조각을 맡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방문 안으로 정리한 이삿짐을 보며, 몇 년의 서울생활이 고작 우체국 박스 세개 정도면 된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회사가 두어달의 월급이 밀리다가, 사장님이 야반도주를 했다며, 근데 사장님은 야반도주도 벤-츠를 타고 했다더라. 같은 말에 문득 사장님의 트렁크에는 몇 개의 우체국박스가 들어 있었을까 싶어진다. 아, 친구들이랑 술 좀 덜 마실걸. 몇 푼 안되는 월급에도 괜시리 어깨가 으쓱해 친구들에게 삼겹살이며 회며 사줬던 일들이 아쉬워졌다. 사장님을 미워하기에는, 이미 너무 까마득한 일이었다.


그래도 몇 년 서울살이를 했다고, 거리 곳곳을 돌다보면 한 때의 기억들이 길가 구석구석에 배여있다. 마치 전봇대 근처의 까무잡잡한 얼룩처럼,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해도 거뭇하게 남는 자국이 되어있다. 이천 몇, 년도의 어느날들이 거리 여기저기에 뿌려져, 새 회사의 면접을 보러 다니는 내내 지나다닌 골목들에서 서울의 삶을 주워담았다. 골목을 돌고 돌아 높은 언덕을 낑낑대며 구둣발로 기어오르는, 진라면 두 봉지를 까만 봉다리에 넣어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늘 그렇게 주워온 어느 날의 서울날을 되새기곤했다. 그럴때면 약간은, 마음이 평화로워지곤했다.


새 회사는 서울에서 좀 벗어난 곳이었다. 다행히 사택기숙사가 있다고는 하는데, 월급에서 얼마를 공제한다고 했다. 집을 공짜로 살 수는 없지. 친구는 왜 그런 회사를 가냐고 했다. 글쎄, 그런 회사 말고는 아무도 날 써주지 않던데. 친구는 소주 한 잔에 그럴리 없다고 했지만, 고기 한 점에 더 좋은 회사가 있다고 했지만. 계산이요, 하고는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아마 더 좋은 회사의 인사담당자들도 너 같았을껄. 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다시 서울에 올 수 있을까.

다시 서울에 오고 싶을까.


입 안을 데굴거리며 맴도는 비명을 삼키며, 집 안에 챙길것을 둘러봤다. 더 할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여섯 평의 옥탑방에도 작은 잠자리 하나는 어떻게든 마련하고자 했던 낡은 매트리스 하나를 두고 가는 것으로 서울에서 산 증거를 남겨둘 셈이었지만, 어쩐지 자꾸 아까웠다. 허리춤이 푹 꺼져서 더 쓰기도 뭐한데. 문득, 서울의 잠자리는 허리가 뻐근한 싸구려 매트리스였고, 서울에서 가장 많이 먹은 건 파도 계란도 김치도 없는 진라면 매운맛이라는 생각을 했다. 배고픈데, 진라면이 있던가. 다음에 서울에 올 때는, 좋은 매트리스랑 계란과 김치가 있는 라면, 스테레오가 나오는 티비를 가져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올 수 있다면. 오고 싶다면.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9-30 10:0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1
  • 글을 어쩜 이렇게 잘 쓰십니까!!
  • 말 없이 추천을 누를 수 밖에.
  • 좋은 수필 읽었습니다.
  • 글 진짜 잘쓴다. 갬성수필
  • 표현이 담백하고 아름다워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72 역사국내 최초의 이민자, '하와이 한인'들에 대해 -하- 8 메존일각 19/10/03 578 16
871 역사국내 최초의 이민자, '하와이 한인'들에 대해 -상- 메존일각 19/10/03 445 17
870 기타아이는 왜 유펜을 싫어하게 되었나. 27 o happy dagger 19/10/02 1149 45
869 일상/생각따뜻함에 대해서 20 19/09/29 833 26
868 일상/생각최근 홍차넷의 분위기를 보며 48 메존일각 19/09/27 4274 67
867 여행몽골 여행기 2부 : 숙박(게르) / 음식 / 사막 7 Noup 19/09/28 398 7
866 꿀팁/강좌반셀프웨딩 준비해본 이야기-2(준비한것들과 끝) 18 흑마법사 19/09/27 613 18
865 여행몽골 여행기 - 1부 : 여행 개요와 풍경, 별, 노을 (다소스압 + 데이터) 8 Noup 19/09/26 408 11
864 꿀팁/강좌반셀프웨딩 준비해본 이야기-1(계기,준비시작) 17 흑마법사 19/09/26 820 30
863 정치/사회'우리 학교는 진짜 크다': 인도의 한 학교와 교과서 속 학교의 괴리 2 호라타래 19/09/23 972 11
862 일상/생각서울 9 멍청똑똑이 19/09/19 1161 31
861 역사신안선에서 거북선, 그리고 원균까지. 9 메존일각 19/09/18 927 15
860 역사거북선 기록 간략 정리 21 메존일각 19/09/17 976 14
859 정치/사회능동적 인터넷 사용자 vs 수동적 인터넷 사용자 16 풀잎 19/09/15 1134 10
858 일상/생각[펌] 자영업자의 시선으로 본 가난요인 43 멍청똑똑이 19/09/13 3908 85
857 일상/생각사소한 친절 3 아복아복 19/09/08 889 26
856 문화/예술여러 나라의 추석 4 호타루 19/09/05 976 8
855 일상/생각평일 저녁 6시의 한강 다리에는 5 에스와이에르 19/09/04 1182 12
854 역사"향복문(嚮福門) 이름을 바꿔라!" 고려 무신정권기의 웃픈 에피소드 메존일각 19/09/01 1324 13
853 일상/생각삼촌을 증오/멸시/연민/이해/용서 하게 된 이야기 24 Jace.WoM 19/08/26 1969 51
852 일상/생각강아지를 잘 기르기 위해서 4 우유홍차 19/08/26 1179 26
851 일상/생각문제를 진짜 문제로 만들지 않는 법 14 은목서 19/08/26 2000 64
850 일상/생각여자는 헬스장 웨이트 존이 왜 불편할까에 대한 이야기 48 19/08/24 3772 52
849 기타부부 간의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45 임아란 19/08/22 2294 32
848 일상/생각Routine과 Situation으로 보는 결혼생활과 이혼 36 Jace.WoM 19/08/22 3034 39
목록 이전 다음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