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Date 20/04/18 23:53:42수정됨
Name   Chere
Subject   도철문, 혹은 수면문 이야기
  중국 고대를 연구하는 사료로써 값어치가 높은 것들 중, 특히 고고학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전부터 연구된 것은 아무래도 청동예기(靑銅禮器)일 것이다. 일단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청동예기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예기(禮器)는 제사문화가 많이 사라진 현 한국에서는 점차 익숙지 않은 단어가 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쉽게 말해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그릇을 가리킨다.


  전통방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어떤 경로든지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제사용구의 종류가 단순히 서너 개 정도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제사용구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청동예기의 종류 역시 마찬가지로 다양하다. 모두가 한 번 쯤은 들어보았을 흔히들 삼발 솥이라 부르는 정(鼎)부터 시작해 궤(簋), 준(尊), 유(卣), 작(爵), 반(盤) 등으로 불리는 제각기 다른 역할의 용기들이 존재하며, 각 용기들은 음식을 조리하는데 사용되거나 혹은 그 조리된 음식을 옮기는데 사용되기도 했고, 또 음식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기도 했다. 그 외의 용도로 사용되는 용기들도 있었는데, 예컨대 술을 데우는 데 사용하는 도구 및 그 술을 담을 때 사용하는 도구, 술잔, 국자 등등 및 제사를 주관하는 이가 사용할 손 씻는 물을 담는 용기 및 그 물을 사용해서 손을 씻을 때 사용한 도구까지 있을 만큼 예기의 범위는 비교적 넓다. 용기의 크기 역시 출토되는 양상을 살펴보면 실로 다양한 편인데, 큰 것은 높이가 100cm를 넘는 것들도 있다. 이 다양한 예기들은 상주(商周) 시기에만 발견되는 특이한 그릇 종류는 아니며 이후로도 계속해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사용되었다. 단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청동으로 주조되는 고대 예기들의 전성기는 서주(西周)시기까지며 그 이후 춘추전국(春秋戰國)시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점차 쇠퇴했다고 평가받는다.




주) 이 청동예기는 대극정(大克鼎)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청말에 출토된 다른 2개의 예기와 함께 중국 3대 보물(海內三寶)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서주시기 때 것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서주청동예기 가운데 하나다.


  이 청동예기들은 중국에서는 하(夏)왕조 시기라고 주장하는 약 기원전 19세기에서 17세기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며, 이후 출토된 유물을 살펴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종류의 증가 및 외형적 변화를 겪는 모습을 보인다. 외형변화라 함은 여러 가지를 의미하긴 하나 일단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장식의 변화다. 무늬장식의 발전은 청동예기의 시대구분 연구에서 중요한 포인트로 여겨지는 분야며, 무늬장식의 종류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을 손꼽자면 오래전부터 도철문(饕餮紋)이라 불린 문양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양은 십 여년 전 무렵 한국에서는 귀문 혹은 도깨비 무늬라는 이름으로 보다 유명했던 것으로, 외형상 형이상학적인 기호의 집합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당시에 유행했던 표현답게 사납고 기괴한 어떤 무언가를 이미지화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무늬가 전통적으로 도철문이라고 불리게 된 까닭은 일단 『여씨춘추(呂氏春秋)』 등 전국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래문헌에 남아있는 일부 기록 덕분이다. 그 내용들을 간략히 합쳐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도철이란 짐승은 지나치게 탐욕스럽고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로, 그 탐욕이 정도를 지나쳐서 인간을 잡아먹다가 그만 자신의 몸까지 스스로 같이 집어 삼켜버린 짐승이라고 한다. 상주시기 사람들은 청동예기를 주조할 때에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이 어리석으면서 끔찍한 상상 속의 짐승을 새겼다고 하는 것이 주된 스토리다. 즉 이 이야기에 따르면 상주시기 청동기에 장식된 짐승의 형태처럼 보이는 그 기괴한 이미지는 바로 얼굴만 있고 몸통은 없는 도철이라는 짐승을 의미한다는 소리인 셈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청동예기 문양을 연구한 학자들 입장에서는 이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사실 청동예기에 그려진 짐승무늬 그림들 가운데는 몸통이 있는 것들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이러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중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봐도 몸통은 안보이는데?”



주) 이 도식은 장장수(張長壽) 선생의 저서  『豊邑行』에서 발췌한 것으로, 장장수 선생의 수면문 분류법 가운데 연체수면문(連體獸面紋)에 해당하는 도식들로, 정면을 바라보는 짐승의 얼굴 양측에 몸통이 연결되어 있는 구성의 수면문들이다.

  그러면 이 그림을 20세기 초 입체주의 그림을 떠올리며 살펴보거나 아니면 동물 종이모형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을 떠올려 보자. 그렇다면 이제 기괴한 얼굴뿐인 것처럼 보이는 짐승의 모습이 사실 평면화 과정을 거쳐 도식화되었다는 것을 조금을 알아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글쓴이 역시 지식이 부족해서 뻔뻔하게 이런 글을 쓰는 주제에 문양을 보고 어디가 어디라고 자신 있게 설명할 지식과 능력은 없다. 다만 우리가 이 문양에서 흔히 눈동자로 인식하는 것을 중심으로 볼 때 양쪽으로 퍼진 형이상학적인 기호들이 단순 얼굴무늬를 채우는 용도로 새겨진 것들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몸통을 도식화해 새긴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싶어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물론 몸통은 없고 얼굴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무늬도 존재하기에 도철이라는 짐승 자체가 아예 청동기에 새겨지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몸통 없이 얼굴만 새겨진 짐승 무늬는 오히려 수면문 발전 역사를 전기 후기로 구분한다면 후기에 등장하는 편이며, 또 몸통이 없어보이는 것들 중 일부는 몸통은 존재하긴 하는데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표현된 것이 아니라 앞서 설명한 것처럼 종이모형 도면처럼 분해된 상태로 구성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도철문이라는 것은 이 문양을 대표할만한 성격을 가졌다고 보긴 어려울 듯싶다.

  물론 청동기에 새겨진 문양에 대해 사상사적 탐구를 원하는 연구자들 가운데서는 도철이라는 표현을 여전히 쓰길 원하는 자들도 있고, 또 베른하르트 칼그렌(Bernhard Karlgren) 같은 청동기 문양 연구의 초기 선구자들이 사용하는 분류방식을 따르는 연구자들 역시 그가 초기에 사용한 명칭대로 도철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고대 중국사 관련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이제 도철문이라는 표현 대신 수면문(獸面紋)이라는 표현을 좀 더 사용하는 추세로 확정된 듯하다.  

  수면문의 구조를 다시금 설명하자면 정면을 바라보는 짐승의 머리 형태를 기본으로 하며,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뿔, 눈썹, 눈과 함께 코, 입, 아래턱을 갖추었다. 그리고 몸통이 있는 경우에는 양 측면으로 길고 가는 형태의 몸통 및 사지가 그러져있으며, 발톱과 꼬리 등을 갖춘 사례도 있다. 하나 주의할 점은 청동예기에 그려진 모든 짐승형태 무늬가 수면문 종류에 포함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정면의 얼굴처럼 보였던 것이 때로는 마주보는 한 쌍의 용이나 봉황, 또는 전설속의 달팽이 괴물 등이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새겨지는 형태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러한 무늬들을 용문(龍紋)이니 봉조문(鳳鳥紋), 와체수문(蝸體獸紋)이라는 형태로 다르게 구별한다.






주)차례대로 용문, 봉조문, 와체수문이라고 명칭되는 청동예기 문양들이다. 어떤 점에서는 수면문과 비슷해보이기도 하지만 확연한 차이점이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 문양에 대해 도철문이라고 부르고 있었기에 평소부터 역사나 고고 미술쪽에 관심이 있었던 분들에게는 이 글에서 수면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글쓴이 입장에서는 수면문이라는 표현이 좀 더 객관적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하기에 이 표현을 선택한 것이지 단순하게 중국 학계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도철문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시거나 익숙하셔서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생각과 표현을 바꾸시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불필요한 첨언을 글 중간에 남기는 이유는 홍차넷에서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다른 곳에서 찾아오신 분께서 이 글을 읽고 오해를 하실까 싶어서 붙이는 사족인 셈이다. 왜냐하면 수면문과 관련해서 한국에서 잠깐 마이너하게나마 인기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인터넷에 존재하는 여러 역사 팬덤 가운데서도 한때 언더그라운드의 제왕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었던 존재, 즉 치우와 환국 관련 이야기가 주로 수면문과 연결되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다양한 그림 자료를 제시하며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일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이번 글은 짧게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 뿐더러 앞서 말한바 같이 지식이 부족해서 이 정도에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다만 이번에도 가볍게 쓰고자 한 글인 만큼 최대한 대화하는 느낌으로 썼는데 결과물은 역시나 무거운걸 보니 실패한 것 같긴 하다. 다음번에는 좀 더 누구나 즐겁고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길 스스로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친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4-25 00:5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59 기타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에 대한 반성, 무식함에 대한 고백 18 메존일각 20/05/16 1321 45
    958 기타제주도에서의 삶 11 + 사이시옷 20/05/13 824 25
    957 기타출산과 육아 단상. 13 세인트 20/05/08 706 18
    956 기타나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9 켈로그김 20/05/06 893 31
    955 기타할아버지 이야기 10 私律 20/05/03 458 16
    954 일상/생각큰고모님 4 Schweigen 20/05/02 1021 27
    953 일상/생각한국인이 생각하는 공동체와 영미(英美)인이 생각하는 공동체의 차이점 16 ar15Lover 20/05/01 1730 5
    952 정치/사회[번역-뉴욕타임스] 삼성에 대한 외로운 싸움 6 자공진 20/04/22 1596 25
    951 일상/생각돈으로 헌신에 감사 표하기 28 구밀복검 20/04/22 2569 25
    950 일상/생각자아를 형성해준 말들 29 ebling mis 20/04/21 1933 31
    949 역사도철문, 혹은 수면문 이야기 2 Chere 20/04/18 905 16
    948 일상/생각아싸, 찐따, 혹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10 이그나티우스 20/04/17 1547 17
    947 문화/예술[번역] 오피니언 : 코로나 19와 동선추적-우리의 개인적 자유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39 步いても步いても 20/04/13 1949 6
    946 창작기대 속에 태어나 기대 속에 살다가 기대 속에 가다 3 LemonTree 20/04/09 1206 15
    945 창작그 애 이름은 ‘엄마 어릴 때’ 14 아침 20/04/08 1145 12
    944 정치/사회해군장관대행의 발언 유출 - 코로나 항모 함장이 해고된 이유. 4 코리몬테아스 20/04/07 1726 11
    943 창작말 잘 듣던 개 6 하트필드 20/04/04 1483 4
    942 정치/사회[데이빋 런시만] 코로나바이러스는 권력의 본성을 드러냈다. 10 기아트윈스 20/04/02 1758 22
    941 일상/생각한국이 코로나19에 잘 대처하는 이유 24 그저그런 20/03/31 2418 10
    940 역사오늘은 천안함 피격 사건 10주기입니다. 23 Fate 20/03/26 1536 39
    939 정치/사회가속주의: 전세계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을 고무하는 모호한 사상 - 기술자본주의적 철학은 어떻게 살인에 대한 정당화로 변형되었는가. 18 구밀복검 20/03/24 2055 22
    938 정치/사회섹슈얼리티 시리즈 (4) - 젠더는 BDSM 속에서 작동하나요? 6 호라타래 20/03/23 1329 13
    937 과학[코로나] 데이터... 데이터를 보자! 20 기아트윈스 20/03/22 1733 11
    936 역사[번역] 유발 노아 하라리: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 13 기아트윈스 20/03/21 2813 33
    935 의료/건강자존감은 꼭 높아야 하나요? 42 호라타래 20/03/20 2779 43
    목록 이전 다음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