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5/08 13:37:36
Name   세인트
File #1   KakaoTalk_20200508_103214609_15.jpg (152.6 KB), Download : 17
Subject   출산과 육아 단상.


* 짤은 코로나 때문에 찾아뵙지 못하는 하민이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제 아내가 집에서 촬영한 어버이날 기념 사진.


탐라에 요전에 아이를 언제 어떻게 출산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나요 이런 요지의 글을 여쭤보신 분이 계셨길래
단상처럼 제 경험을 끄적끄적 써 봅니다.

홍차넷에는 저보다 육아/출산 선배님들이 훨씬 많으십니다. 그냥 제 경우만 살짝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저희 부부는 현재 아기가 하나 있습니다. 작년 11월 25일에 출산했고. 그래서 지금 5개월 보름 정도 되었어요.


사실 저는 크게 아이를 원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아기를 그닥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아내 건강 문제도 있고 해서 아이는 반쯤 포기하고 살았더랬죠.
양 가 어르신들이 손주가 없어서 압박이 심할 것은 자명했지만, 뭐 대충 둘러대면 되겠지 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부터 좋은 아빠가 될 자격이 못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재정적으로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고 생각했구요.

근데 아내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열망이 매우 강했습니다. 원래 건강했다가 가지기 어렵게 되서 그런지 몰라도
아기를 갖겠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어요. 그래서 백방으로 노력하고 수술도 받고 그랬던 거구요.

몇 년간의 노력 끝에, 작년 3월에 임신이 마침내 성공했고, 그렇게 첫 아이를 제왕절개로 11월 말에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전 아기를 낳기 전보다 낳은 직후부터 부부의 삶 자체가, 정말 삶 자체가 너무나도 극적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저는 원래 아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기보다는 강아지 고양이를 훨씬 좋아하는 편이었고
(이건 사실 아내도 그랬어요 ㅋㅋ)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애기 울고 뛰어다니고 하면 막 짜증내고 인상쓰는 편이었거든요.

그리고 출산과 육아 아이키우기에 대한 준비도 거의 안 되어 있었고, 미리 공부하거나 알아본 것도 거의 없었고
큰 책임감 같은 걸 가진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어요 솔직히 진짜 그랬어요.

당장 제 부친께서 저를 극도로 과할 정도로 엄하게+험하게 키우셨기 때문에
늘 아이 키우고 싶지 않다 내가 조금이라도 내 부친 닮을까봐 그렇게 아이 키울까봐 싫다고 늘 이야기했었구요.

근데 정말 정말 정말 신기하게도
주변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뭔가 대단한 자격과 책임감과 준비가 없어도
아기가 생기면 사람이 극적으로 바뀌게 되더군요.

저도 그렇고 제 아내는 더더욱 그렇구요.

저는 제가 주구장창 우는 아기에게 한 번도 짜증을 안 내고 달래고 할 거라고 상상도 못했고
자다가 아기 울음소리만 듣고도 벌떡 일어나서 아이 안고 어르고 달래는 일을 할 거라고 상상도 못했고
일이 너무 힘들고 때려치고 싶어도 아기 웃는 사진 한 번 보면 기운나서 또 일하게 될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렇게 좋아하던 와우도 미련없이 접게 되고 술담배도 거의 끊게 되고 할 거란 것도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 아기 뿐만이 아니라, 그냥 세상에 모든 아이들 아기들이 다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밖에서 난리피고 떠들고 하는 아이들을 봐도 그저 다 이뻐보이기만 해요.
(아 피시방 같은데서 쌍욕하는 이미 머리 굵어진 애들은 패스...ㅋㅋㅋㅋ)

(아 근데 쓰고보니 아예 짜증을 안 내는 건 아닙니다. ㅋㅋㅋ)


아무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뭔가 대단한 사명감? 소명의심? 책임감? 준비된 자세?

그런 거 없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었어요.

물론 뉴스에 나오는 극단적으로 무책임한 부모들처럼 아이를 방치하거나 학대하거나 하면 안 되겠지만
그건 정말로 극단적인 사례라 뉴스에 나오는 거지
대부분의 우리들의 부모님들도, 우리 주변의 아이 키우는 엄마아빠들도
전부 뭔가 대단한 책임감과 준비성을 다 갖추고 아이를 맞이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 아이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좀 더 준비된 부모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아마 정상적인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겠지만
역으로 그런 준비가 된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아이 키우기 꺼려지는 풍토에 한 몫을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남자분들 중에 군대 가신 분들 다들 그런 경험 해보셨잖아요.
처음 군대 훈련소 가거나 자대 배치 받은 날에
아 세상에 이런 곳에서 2년 반~1년 반을 어떻게 버티나 이제 하루 지났을 뿐인데
이런 생각 들다가도
막상 닥치면 또 어떻게든 지내지고 버텨지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상 닥치면 또 어떻게든 적응하고 지낼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결혼을 준비중이시거나 결혼을 하셨는데 아직 아이 가지기를 망설이시는 분들은
(처음부터 안 가지시겠다거나 비혼주의자이시거나 갖기 힘드신 분들한테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도 아이 낳아서 길러보시길 추천드려요.
저희 부부처럼 대출금에 허덕여도, 부부가 다 건강이 그닥 좋지 않아서 육아 할 때마다 골골거려도
정말 정말 정말 낳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인생이 아름다워졌어요.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일단 결혼하시고, 일단 낳아 보시라니까요? 헤헿. (약장수 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5-22 23:2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9
  • 추천드립니다.
  • 놀러오세요, 육아의 숲.
  • 마음이 이뻐요
  • 맞읍니다. 일단 드루오세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76 기타삶의 의미를 찾는 단계를 어떻게 벗어났냐면 8 골든햄스 24/03/14 955 19
1375 기타소수 사막은 얼마나 넓을까? 4 Jargon 24/03/06 878 4
1374 기타민자사업의 진행에 관해 6 서포트벡터 24/03/06 835 8
1373 기타노무사 잡론 13 당근매니아 24/03/04 1539 16
1372 기타2024 걸그룹 1/6 2 헬리제의우울 24/03/03 627 13
1371 기타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857 20
1370 기타터널을 나올 땐 터널을 잊어야 한다 20 골든햄스 24/02/27 1565 56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1401 16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955 8
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056 11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330 30
1365 기타자율주행차와 트롤리 딜레마 9 서포트벡터 24/02/06 1186 7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1117 23
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555 12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153 69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2816 37
1360 기타텃밭을 가꿉시다 20 바이엘(바이엘) 24/01/31 1002 10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6534 3
1358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3) 17 양라곱 24/01/22 6162 22
1357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2) 17 양라곱 24/01/17 5693 14
1356 요리/음식수상한 가게들. 7 심해냉장고 24/01/17 1256 20
1355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1) 9 양라곱 24/01/15 2674 21
1354 기타저의 향수 방랑기 31 Mandarin 24/01/08 3296 2
1353 의료/건강환자의 자기결정권(autonomy)은 어디까지 일까? 7 경계인 24/01/06 1279 21
1352 역사정말 소동파가 만들었나? 동파육 이야기. 13 joel 24/01/01 1308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