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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2/28 21:36:14
Name   호타루
Subject   비전문가의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 향후 추이 예상
카테고리에 군사가 없군요. 역사라고 보기는 뭣하고 전쟁은 군사와 외교와 정치를 총망라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 카테고리로 분류해서 적습니다.

제목에 굳이 비전문가를 쓴 이유는 실제로 제가 비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5년간 독소전쟁사니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니 전격전의 전설이니 등등 많은 서적을 읽었어도 비전문가는 비전문가입니다.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고 군대라는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풍부한 경험과 탁월한 식견은 제가 어찌 쫓아갈 수 있는 바가 못 됩니다.



우선 2014년 돈바스 전쟁 직후의 상황을 볼 필요가 있겠네요.



노란색이 우크라이나 정부군, 빨간색이 반군(現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및 루간스크 인민 공화국)의 지역입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날짜는 14년 8월 8일 기준.

저는 솔직히 러시아가 반군 점령지역에 군사를 밀어넣어 대리전 양상으로 진행할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주 전선을 죽 밀어넣고 도네츠크 주와 루한스크 주만 자기 영향권 안에 두어도 러시아 입장에서는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죠. 그 이유는... 아래 지도와 함께 봐 주세요.



1) 도네츠크 주와 루한스크 주의 공업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전선을 뒤로 밀어놓고 전쟁터가 된 지역을 말끔히 복구하기만 해도 이 지역의 공업력 상당수를 러시아 관할 내에 둘 수 있다는 건 큰 메리트로 보았거든요. 공업력 공업력 하는데 대체 어느 정도냐면... 도네츠크의 옛날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스탈리노(Stalino)입니다. 스탈린이 자기 이름을 붙여서 중공업 도시로 육성한 동네입니다. 물론 그냥 아무 데나 지은 건 아니고 이 지역이 석탄과 강철이 무진장 나오는 동네라서(우크라이나 전체의 절반 이상)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우크라이나 내 철도국이 총 6개가 있는데(리비우, 오데사, 남서(키예프), 남(하리코프), 드네프르, 도네츠크) 도네츠크 철도국이 처리하던 물량이 우크라이나 전체의 40% 수준입니다. 그 알짜배기 땅이 지금 전쟁통이라는 거죠.

2) 아조프 해 동북단의 마리우폴(Mariupol)을 접수하면서 아조프 해 일단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을 더더욱 키울 수 있습니다. 마리우폴이 러시아 손에 떨어지면 우크라이나로서 남는 항구는 접경지에 가까운 베르댠스크(Berdiansk)와 헤르손(Kherson), 오데사(Odessa)뿐인데(세바스토폴은 애저녁에 러시아 관할에 들어갔으므로 논외)... 베르댠스크가 사이즈가 좀 작아요. 인구로 따져봤을 때 베르댠스크가 인구 10만, 마리우폴은 40만. 오데사 인구가 백만을 넘어가니까 그쪽으로 틀면 되지 하고 쉽사리 생각할 수도 있는데, 지도에서 보다시피 오데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주 물동량 운송지점을 바꾸는 것 자체가 손해입니다. 아무리 인프라를 추가로 건설한다고 해도 그게 뭐 하루이틀만에 뚝딱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지도 사이즈가 좀 작아서 그렇지 저게 어느 수준이냐면 서울에서 만든 물건을 부산항이 아니라 청진항에 싣는 수준의 거리 차이입니다. 당연히 그만큼 운송비용이 추가로 붙게 되고... 그래서 주 공업지역인 도네츠크와 루한스크가 직접적으로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 말고도 간접적으로 하리코프 일대에 장기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더 행사할 수 있다고 봤어요.

3) 뭣보다 이게 제일 중요한 게 러시아 입장에서 전면전을 걸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은 다른 거 다 필요없고 명분 싸움이죠. 설령 러시아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귀찮으니 앞으로는 노보러시아로 줄여 쓰겠습니다)를 승인한다 친들 De jure가 우크라이나에 있고 크림 반도 합병 자체가 국제법상으로 불법인 상황인지라 더더욱 전면전을 걸 명분이 없다고 봤고, 그래서 대리전 양상을 치루면서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대충 면피하고(물론 세간의 사람들이 면피라는 걸 모를 리 없겠습니다만 직접적으로 전쟁을 때려버리는 것보다는 반감이 덜하죠)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예속화를 더 강력히 시도하리라 봤습니다.

그러나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이제는 전면전에 돌입했죠.



우선 주요 도시들을 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독소전쟁 당시에 쓰였던 지명 등을 추가로 기재했음을 밝힙니다.



놓고 보니 뭐가 좀 많이 난잡하긴 하네요... 특징을 잡아보라면 이렇게 잡을 수 있겠습니다.

1) 서쪽의 리비우, 리우네, 테르노필은 본래 2차대전 발발 당시에는 폴란드의 영토였다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통해 소련 땅으로 넘어갔던 지역으로, 당연히 이 지역은 폴란드계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들 이야기가 나오는 러시아에 반대하는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이 바로 여깁니다. 특히나 리비우 같은 경우는 뉴스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우크라이나 전체에서도 6번째로 큰 도시로, 우리 나라로 치면 웬만한 광역시 이상의 위상을 가집니다. 당장 우리 나라에서 큰 도시 몇 개를 꼽아보세요. 서울 부산 인천 대전 대구 광주. 바로 감이 오실 겁니다. 반러감정이 높은 만큼 이 지역은 설령 러시아군이 들이닥친다 한들 큰 규모의 희생이나 게릴라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동쪽에 비해 매우 높습니다.

2) 보다시피 키예프가 국경에 매우 가깝게 위치해 있습니다. 물론 키예프 북쪽에 있는 건 러시아가 아니라 벨라루스이긴 한데 벨라루스와 러시아는 사실상 한 몸 취급을 받는 것을 생각해 보면... 코로나 이전에는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국경은 내국인 통행 취급을 받았을 정도입니다(외국인은 엄격하게 금지됨).

3) 우크라이나를 관통해서 흐르는 강(드네프르 강입니다) 동쪽을 보시면 도시가 좀 희박하게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것에서 짐작하시다시피 이 일대는 굉장히 평탄한데다가 인구 밀집 지역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즉, 저쪽의 방어선이 한번 뚫리면 러시아군 최대의 강점인 기계화부대를 앞세운 기동전이 가능해집니다. 체르니히우 - 수미 - 하르키우를 잇는 방어선이 돌파당할 경우 전과확대를 통해 단숨에 수십 km에서 심하면 수백 km까지 그대로 쭉 뚫릴 가능성이 큽니다.



위 지도와 정확히 같은 범위의 지형 지도입니다. 백색이 평지... 뻥 뚫린 드네프르 강 동안... 실감이 좀 가시는지요.

그래서 공격 방향은 3방향으로 설정하고, 키예프를 찌를 북부(그리고 주공), 세바스토폴 방면에서 헤르손을 찌를 남부, 동부 도네츠크 일대와 합세하여 동부 우크라이나를 밀어버릴 동부 3방향 주공으로 설정한 것 같습니다. 아래처럼 말이죠.



보시다시피 서쪽은 아예 군사적인 공세가 없고(단 일부 폭격은 있습니다), 크림 반도 남쪽에서는 돌파에 성공하여 드네프르 강 동안 일대를 빠르게 접수하는 전과확대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북부 - 동부 전선 역시 일단 방어선이 뚫린 지역에 대해서는 고속 기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집게발로 집듯이 수미와 하리코프를 양익에서 포위해 섬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2차대전 당시 독일의 양익포위전술 및 소련의 기계화 제파전술과 매우 유사합니다), 여기가 뚫리면 매우 평탄한 우크라이나 지형 특성상 드네프르 강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당장 러시아군이 현재 동원하고 있는 야전군이 7개 야전군이고(제41군, 제1근위전차군, 제6군, 제58군, 제36군, 제35군, 제20근위전차군) 병력규모가 위키피디아피셜 20만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에 맞서는 우크라이나군도 20만 병력이긴 합니다만... 말이 7개 야전군이지 우리 나라에서 굴리고 있는 야전군은 2개(1작사, 2작사)이며 2021년 기준 전력이 약 40만이니 휴전선에 있는 전 병력이 전부 동원된 셈치시면 됩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죠. 2차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재래식 전쟁이라 하니...

군사적으로야 방어가 너무나 힘든 우크라이나 특성상 이 전쟁은 시작부터 힘겨운 싸움인 것은 자명합니다. 만에 하나 남측에서 진격하여 전과확대를 노리는 남부 전선군과 하르키우를 접수하려는(혹은 접수했을) 동부 전선군이 만나는 순간, 그대로 도네츠크 일대의 우크라이나군은 거대한 포위망 속에 갇히는 꼴이 됩니다. 크림 반도와 케르치 반도를 러시아가 완전통제하고 있는 이상 당연히 해상수송도 불가능하고요. 섬멸전이 진행된다면 국경 지대의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한 우크라이나군이 먼저 섬멸되고 동부 우크라이나군이 포위섬멸된 다음 아예 방어선이 뚫려버린 드네프르 강 동안을 넘어 서쪽으로 진격하는 시나리오가 그려집니다. 어디까지나 군사적으로는 말이죠. 물론 우크라이나에서 이 꼴을 두고 보고 있을 리가 만무한 만큼 이 시나리오는 전쟁의 장기화 및 러시아군의 예비대 투입까지를 상정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시나리오는 다분히 현실성이 적어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이야기하죠.



그러나 전쟁은 군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무조건 정치와 외교가 함께 수행됩니다.

우선 공세를 취하고 있는 러시아 입장으로서는 명분이나 국제 여론에서 매우 크게 밀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손해도 심각하죠. 점령지인 우크라이나 국민의 반발은 물론이고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 가입 의사를 타진하고 있으며 경제 제재로 인해 루블의 가치가 폭락하는 등, 이 전쟁은 결코 러시아 입장에서는 길게 끌 수 없는 전쟁입니다. 앞서서 동부 전체에서 섬멸전이 벌어지는 시나리오를 상정했지만 그 시나리오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1941년 키예프 포위전 당시 키예프 일대에 포위된 소련군의 규모는 약 60만 명이었고,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독일군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구데리안의 기갑군까지 우회시키면서 무려 한 달에 걸친 시간을 소비해야 했습니다.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일대의 60만 병력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20일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죠. 지금은 그 때보다도 훨씬 전쟁이 고도화되어 있고, 더 끈질기게 버티며, 대량살상무기의 사용 역시 눈치가 크게 보입니다. 함부로 사용하기에는 득보다 실이 훨씬 클 수 있다는 거죠. 때문에 병력은 1/3 가량에 불과할지언정 이 병력을 "소화"시키는 데에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우크라이나 동부 일대에서 우크라이나군이 포위섬멸을 당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 보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러시아처럼 미운 차르를 위해 싸울 마음이 전혀 없는 국민들의 오합지졸 모임이라면 모르겠으되 지금은 명백히 그런 상황도 아니죠.

더구나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여론이 처음에는 전쟁 참여 반대였다가 그 비율이 점점 낮아지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만에 하나 미국이 참전하기라도 했다가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엄청난 악재입니다. 미국의 참전은 곧 나토의 참전을 의미하고, 전선이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벨라루스 서쪽 내지는 블라디보스토크 - 추코트 반도 일대의 극동 지역까지 넓어지게 된다면... 물론 그것은 명백히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죠. 역설적으로나마 미국이 개전 초기에 섣불리 손을 못 대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고.

그래서 빠르게 키예프를 접수해서 우크라이나의 신경망을 마비시키고, 우크라이나 전체의 완전합병 내지는 러시아의 괴뢰국 설립 정도로 타협을 보고 전쟁을 종결짓는 것이 푸틴의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을 겁니다. 주 측면이 키예프를 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도 있습니다. 더구나 독소전쟁을 공부해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모스크바를 점령 못 해서 독일군이 향후에 피를 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스크바 점령이 가능했는가, 점령했다면 소련이 입었을 정치적/군사적 피해는 얼마인가? 이것이 괜히 독소전을 파는 사람들의 주요 주제로 오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수도라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특성을 지닙니다. 6.25 전쟁 당시 서울 점령이 반복되었던 우리 나라가 매우 특수한 사례였고...

그런데 그 진격이 지금 막혀버린 겁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안토노프(호스토멜) 화물공항을 확보하고 며칠 내로 키예프를 접수하여 조기에 전쟁을 종결지어야 하는데, 지금 그게 막히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죠. 이 시점에서 저는 푸틴이 그 옛날 히틀러가 그랬듯이 우크라이나군을 약체로 보고 툭 건들면 푹 쓰러질 군대로 얕본 것이 아닌가, 그렇게 의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키예프 코 앞까지 러시아군이 들이닥친 것은 사실이고, 조기에 창으로 찌르듯이 빠르게 키예프를 접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물 건너간 이상 러시아 입장에서는 북쪽의 체르니히우 및 북동쪽의 수미 일대에서 군사를 몰고 키예프 동쪽을 포위하고, 북쪽에서 밀고들어온 부대는 키예프 서쪽을 포위하여, 양익 포위망을 완성하고자 하는 게 플랜 B로 보입니다. 이미 수미 및 후방인 쿠르스크/벨고로드 일대에서 최전선까지 물자를 수송할 주요 거점인 코노토프(Konotop)가 함락되었으니 더욱 그 시나리오대로 흐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전황도에다가 마우스로 그림을 그려서 표시하겠습니다.



문제는 이 시나리오 역시 러시아 입장에서는 절대 달가운 입장이 아닙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 자체는 동부 우크라이나군 전멸이라는 시나리오보다는 훨씬 크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1) 체르니히우 방면에서의 진격이 너무 느립니다. 여기도 인구 30만은 되는 도시라서(키예프는 300만) 일종의 위성 거점 노릇을 하고 있는데다가 안정적으로 과부하 없이 북쪽에서부터 수송해야 할 물자를 분산하려면 꼭 접수해야 하는 도시인데 여기가 지금 지도상에서 보시다시피 진격이 영 지지부진합니다. 결국 체르니히우를 완전 접수하지 않는 이상, 러시아군의 보급상태를 생각해 볼 때 키예프 공략에 있어서 과부하 등의 이유로 보급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리고 이는 곧 전쟁의 장기화를 의미합니다. 속전속결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는 문제가 큽니다.

2)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에서 주요 도로/철로망이 없습니다. 짧은 시간이라면 몰라도, 장기화에 따른 지속적인 보급 수송은 결국 도로와 철도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 일대의 철로망은 드네프르 강을 우회하여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 제대로 된 후방 거점을 활용하려면 거의 200 km 남쪽의 체르카시(Cherkasy)를 통해서 대규모 수송이 벌어져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는 셈이죠. 도로망은... 뒤에서 추가로 설명드리죠.

3) 키예프 자체가 앞서 인구 300만을 언급했듯이 접수하기 쉬운 도시가 아닙니다. 주코프에 따르면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레닌그라드 소재 인구가 300만이었다 하니 설령 포위공방전이 벌어진다 한들 단시간에 쉽사리 넘어갈 도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군사적으로 보았을 때 시간은 푸틴의 편이 아닌 수준을 넘어서 아주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라스푸티차. 우크라이나 어로는 베즈도리지아(Бездоріжжя). 봄철이 되면서 얼어붙은 도로가 녹고 여기에 진흙이 엉겨서 작은 길은 다 막아버리는 시즌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만일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취소되어 푸틴이 두 달 빨리 개전을 열어버렸다면 혹한기 때문에 전반적인 사기가 떨어져 있을지언정 라스푸티차가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았을 듯하네요.

이게 생각보다 큰 게, 이렇게 되면 공격측의 주공은 주요 고속도로/철로망(철로라고 라스푸티차의 영향을 아예 안 받지는 않습니다만 도로보다는 일반적으로 덜합니다)으로 제한됩니다. 이 점은 방어하는 입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큰 이점입니다. 애초에 방어가 공격자에게 불리한 요소가 주공을 판단하기 어려운 것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주요 도로/철로 거점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효율이 좋게 수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러시아의 보급효율이 라스푸티차의 그것을 뛰어넘는다면 소용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글쎄요, 지금까지 보여준 러시아군의 보급 관련 문제를 보았을 때 그게 단시간 내로 해결이 되었을 리가 없어 보입니다. 물론 이 진흙이 러시아군의 진군을 완전히 저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러시아군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우크라이나군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어 보입니다. 속전속결로 임해야 하는 푸틴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치명적인 이슈고, 우크라이나에게는 기회입니다.

특히 치명적인 것은 기계화장비(전차, 장갑차, 자주포 등등)의 운송 및 투입에 제한이 발생한다는 것이죠. 방어측도 빠르게 기갑 장비를 빼돌려서 다른 데 투입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방어측보다는 공격측에 영향이 더 가게 마련이고, 이는 기갑전투 양상이 아닌 보병 대 보병, 마치 1차대전의 참호전 내지는 2차대전의 휴전기 같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라스푸티차 기간에는 독일군의 진격과 소련군의 반격(ex. 데미얀스크 공방전)이 둔화되어, 지역적인 전투가 아닌 문자 그대로 풀 스케일의 집단군 - 전선군간의 사활을 건 전투는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보병이야 어디든 갈 수 있다쳐도 그런 인명손실이 크게 발생하는 길을 푸틴이 원할 것 같지는 않구요. 이미 우크라이나는 상당한 시간을 확보한 셈입니다. 이 시간을 활용하는 것 역시 우크라이나의 몫이 되겠죠.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키예프 포위전 자체는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 포위전이 의미하는 것은 곧 장기전을 의미한다. 푸틴이 판돈을 엄청나게 박았기 때문에 쉽사리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고, 그래서 그 가능성이 높은 것이긴 하나, 장기적으로는 러시아군에게 악재나 다름없다.

2) 드네프르 강 동안은 공세의 진행속도를 상정해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손쉽고 빠르게 정리될 가능성이 크다. 단 이게 이루어지려면 하리코프(하르키우)가 뚫려야 한다. 따라서 드네프르 강 동쪽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시간을 버는 것은 하리코프가 언제 넘어가느냐에 달렸다.

3) 반군 및 하르키우 일대의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동부 우크라이나군이 포위섬멸을 당할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이는 전쟁이 엄청나게 장기화된다는 시나리오가 벌어져야 한다. 더구나 북쪽 또는 북동쪽에서 밀고들어오는 러시아군과 남쪽의 러시아군이 만나서 포위망을 완성하고 좁혀들어가야 하는데 엄청난 거리(키예프에서 헤르손까지의 거리는 약 550 km)를 생각했을 때, 빠른 시간 내에 그런 시나리오가 발생할 가능성은 상당히 적다(참고로 휴전선의 전체 길이가 약 250 km입니다). 전쟁이 초장기화되고 현 투입된 20만 병력 외 가용 예비병력까지 모조리 투입되어야 가능한 시나리오.

* 놓고 보니 2번과 3번이 언뜻 보기에는 서로 반대되는 내용인지라 헷갈리실까봐 적어두는데... 드네프르 강 동안 일대를 접수하는 것 자체는 쉬울지 몰라도, 포위망을 완성하려면 후방의 지역이 모조리 안정화되어야 합니다. 이는 곧 수미와 하르키우를 모조리 완전히 접수하고 드네프르 강을 따라서 두터운 후방 방어선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해야 서쪽으로부터 우크라이나군이 동쪽에 포위된 아군을 구원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를 쉽사리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루어지고, 비로소 그때부터 포위섬멸 시작입니다. 단순히 동부 일대에 깃발 꽂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 시나리오가 벌어지는 상황 자체가 장기전이 상정된다는 것이죠. 더구나 드네프르 강 중류의 드니프로(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인지라 이쪽 방면으로 우크라이나의 병력 및 물자의 집결이 용이할 가능성이 높고, 이걸 완전히 틀어막으려면... 게다가 포위섬멸전이 뉘 집 애 이름도 아니고 병력을 섬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별도죠. 어설프게 포위망을 만들면 설령 포위섬멸전이 발생한다 한들 방어자 입장에서 카메네츠-포돌츠키 포위전처럼 성공적으로 병력을 온존할 수도 있습니다. 포위섬멸전의 목표 자체에 반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거죠.

4) 서부 우크라이나(리비우, 테르노필, 리우네)는 주민 특성상 키예프를 포함한 중/동부 우크라이나가 완전히 정리된 이후에야 진격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5) 라스푸티차가 오고 있으므로, 푸틴이 손을 떼지 않는 한, 그리고 조기에 키예프가 함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명분과 실리 양쪽으로 상당히 이득이 크다.

대략적으로 이 정도로 예상합니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그 옛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소련군의 후신, 특히 근위라는 이름을 달고 독소전쟁에서 싸운 엄청난 피와 전공을 인정받은 명예로운 부대의 후신이 히틀러를 방불케 하는 한 독재자의 야욕에 따라 이용되는 장기말로 전락했다는 것이고, 이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행방불명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그래도 조국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것이기라도 하지, 러시아군은...

게다가 기계가 고도화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쟁사 책 몇 권 읽은 비전문가가 방구석에서 그 자료를 인용하면서 이 정도로 전황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인류가 독소전쟁 이래 80년 동안 변한 게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더욱 서글프네요.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사망자의 단위수부터가 달랐던, 문자 그대로 생지옥이었던 대조국전쟁, 그리고 그 암울한 역사를 이번에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러시아와 또다시 피해자의 입장에서 두들겨맞고 있는 우크라이나... 대체 그 80년간, 인류는 전쟁은 안 된다, 인명은 소중하다, 이 두 개의 단순한 교훈조차 얻지 못한 것일까요? 정말로? 이렇게 변하는 것 없이 우둔한 인류라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역사를 배우고, 무엇을 위해서 공부를 하며, 대체 무엇이 잘나서 지구의 지배자랍시고 떠들고 다니는 것인지...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03-1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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