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3/12/03 12:55:28
Name   joel
Subject   이글루스의 폐쇄에 대한 잡다한 말들.
2023년 3월, 이글루스가 블로그 서비스 종료를 공지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12월이니 늦어도 한참 늦은 뒷북 이야기가 되겠군요. 제가 이용하던 곳은 아니나, 한 때나마 인터넷 세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덩어리를 이루고 목소리를 내던 공간의 폐쇄를 담담하게만 보지는 못 하겠군요.

한국 인터넷에서 블로그는 이미 사멸의 길에 놓여 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 티스토리는 제각기 네이버, 카카오라는 든든한 큰 형님의 존재 덕에 존속하고는 있습니다만 만약 독립적인 블로그 서비스를 운영하는 업체였다면 아마 진작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이용자는 떠났고 광고꾼들만 넘치죠. 이게 해당 업체들의 잘못된 운영에서 비롯된 거라면 차라리 희망이 있겠습니다만, 마치 비디오 대여점들의 황혼처럼 시대의 변화 앞에 무릎 꿇은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어 보이는군요. 그나마 브런치, 네이버 포스트 등이 블로그와 비슷한 형태로 이용되고는 있습니다만.

제가 블로그가 더 좋다, 블로그 시절이 좋았다...같은 소릴 하는 건 아닙니다. 한 예로 옛날 이글루스에서 이오공감을 놓고 벌어지던 치열한 여론전과 키배, 진영 논리의 패싸움은 요즘 인터넷 세상에 벌어지는 혐오전쟁의 직계 조상이나 마찬가지거든요. 블로그 시절에도 이른바 '파워블로거'를 비롯한 '인플루언서'는 분명 있었고요.

다만 그 블로그를 망하게 한 인터넷의 환경 변화는 짚고 넘어가고 싶군요.

이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듣는 것은 거대한 광장인 SNS 또는 대형 커뮤니티들입니다. 블로그나 소규모 커뮤니티처럼 내가 차려놓은 좌판으로 사람들이 찾아와주길 기다리는 시대는 끝났어요. 할 말이 있으면,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재능이 있으면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청자들도 화자들을 쫓아 광장으로 향하고요. 좋게 말하면 파편화 되었던 정보들이 하나의 공간으로 수렴하는 과정인 거지만, 나쁘게 말하면 골목상권과 중소기업들이 몰락하고 대기업에게 시장이 흡수되는 과정인 거지요.

사실 이용자들 입장에선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르죠. 일일이 검색으로 인터넷을 뒤지며 양질의 정보를 찾는 것 보다는 해당 분야의 정보가 모인 하나의 대형 커뮤니티를 찾는 것이 훨씬 쉽거든요. 예를 들어 컴퓨터를 조립할 때에 어느 메이커와 제품이 좋을지를 혼자 검색하며 고민할 필요 없이 I모 사이트의 견적 게시판을 찾으면 간단히 '이 달의 추천 견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재래시장에서 발품을 팔며 좋은 물건을 찾는 것 보다는 품질을 검증한 물건들을 들여놓은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리한 것처럼 말이죠.

그럼 좋은 것 아닌가? 네. 저도 재래시장보다는 대형마트를 더 사랑합니다. 집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재래시장이 아주 사라지면 대형마트에서 들여놓지 않는 물건들은 구할 수가 없어져요. 마트 영업부에서 작성한 물품 명단이 곧 살생부가 되고 나의 선택지가 됩니다. 그 기준은 물론 일정 이상의 수요가 보장되는 것들이고요.

여기에는 개인적 공간이라는 SNS조차 예외가 되지 못 합니다. 기본적으로 '나'를 홍보하여 타인들과 연결되어야 하고, 그 연결된 횟수(팔로우, 구독 등등)로 타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서열을 결정하는 SNS에서 특출나지 못 한 개인들은 그저 거대한 흐름에 쓸려 가는 장삼이사가 되게 마련이지요.

예컨대 저는 만화를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만화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공간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네, 물론 D모 사이트나 R모 사이트처럼 만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든지 있긴 합니다. 그런데 빠르게 수많은 글들이 스쳐가는 대형 커뮤니티에서 이야기를 하려면 그곳의 규칙과 문법을 따라야 합니다.

너무나 거대한 광장이기에, 개개인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한 숟가락 얹을 수 있는 소재를 꺼내야 하지요. 그러려면 우선적으로 많은 독자들을 확보한 만화들을 위주로 할 수 밖에 없고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 하는 개인의 감상이란 묻힐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또 대형 커뮤니티와 게시판이라는 것이, 정보의 빠른 교환에는 최고일 수 있어도 정보의 재열람에는 부적합한 형태입니다. 자고 새면 글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니 어떠한 주제에 대해 길고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지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옛날 만화 또는 보는 사람이 적은 만화 이야기를 해봤자 '일기는 일기장에', '그게 뭔데 x덕아' 라는 면박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겠네요.

그리고 이렇게 비대해진 광장과 여론의 힘에 비해서, 광장의 규칙을 제정하고 여론의 흐름을 결정하는 힘은 또 소수의 몫으로 남아 있죠. 그게 운영자의 뜻일 수도 있고, 가장 목소리가 큰 세력의 혐오구호일 수도 있는 거고요. 요즘은 N모 위키가 한국 인터넷에서 정보의 원천처럼 여겨지는데, 설령 거기에 수많은 집단지성들이 남긴 훌륭한 자료들이 가득하다 한들, 그 원천이 파라과이에서 국내법을 회피하는 운영자의 광고 수익에서 나오며 운영자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아무튼 이제 수많은 개인들의 감정과 정보의 좌판이 펼쳐지던 동네시장의 시대는 저물었어요.  내 물건이 팔릴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취향이 아니라 마트 사업부의 간택이고, 유튜버들이 진정 두려워 하는 것은 법과 도덕이 아니라 유튜브의 '수익 창출 금지' 딱지죠. SNS에서 당연하게 보장할 것 처럼 보였던 자유로운 의견개진이란, 알고보니 새로운 소유주님의 변덕과 클릭 한 번에 날아가는 깃털이었다는 것도 우리는 아주 잘 목격했고요.

네, 이제와서 옛날이 좋았어...같은 한탄을 해본들 아무 의미 없는 꼰대질이라는 걸 잘 압니다. 이것도 시대의 흐름이면 적응해야 하는 거죠.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요. 다만 앞으로도 인터넷의 한 귀퉁이에는 조그마한 좌판들이 남아 있었으면 합니다. 물론 홍차넷도 그 중 하나입니다.


3줄 요약
무슨 장례식이 열리고 있는 건가요?
네. 축제가 아니라 장례식 맞습니다. 육개장 한 사발 하시죠.
육개장은 대파와 계란, 쇠고기만 넣고 끓이는 것이 최고라고 감히 주장해봅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2-19 09:44)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9
  • 그간 느껴가던 막연한 감정들이 글로 나타나있어 반갑습니다.
  • 일리가... 있어!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44 일상/생각비오는 숲의 이야기 38 하얀 23/12/14 2863 56
1343 정치/사회지방 소멸을 걱정하기에 앞서 지방이 필요한 이유를 성찰해야 한다. 42 Echo-Friendly 23/12/05 4007 18
1342 일상/생각이글루스의 폐쇄에 대한 잡다한 말들. 10 joel 23/12/03 2790 19
1341 꿀팁/강좌스몰웨딩 하고싶은 티백들에게-1 31 흑마법사 23/11/30 3071 23
1340 경제주식양도소득세 정리(2022. 12. 31. 법률 제19196호로 일부개정된 소득세법 기준) 7 김비버 23/11/22 2776 8
1339 체육/스포츠JTBC서울국제마라톤 후기 10 영원한초보 23/11/09 2255 22
1338 기타2023 걸그룹 5/6 5 헬리제의우울 23/11/05 2513 12
1337 일상/생각적당한 계모님 이야기. 10 tannenbaum 23/10/30 2814 48
1336 여행북큐슈 여행기 1 거소 23/10/15 2305 9
1335 역사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알기 위한 용어 정리. 2편 6 코리몬테아스 23/10/14 2590 12
1334 역사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알기 위한 용어 정리. 1편 17 코리몬테아스 23/10/12 3011 27
1333 일상/생각살아남기 위해 살아남는 자들과 솎아내기의 딜레마 12 골든햄스 23/10/01 3374 20
1332 일상/생각나의 은전, 한 장. 6 심해냉장고 23/09/30 2824 24
1331 꿀팁/강좌귀농하려는 청년들에게 (시설하우스 기준) 18 바이엘 23/09/27 2925 8
1330 일상/생각아내는 아직 아이의 이가 몇 개인 지 모른다 2 하마소 23/09/25 2791 21
1329 기타여름의 끝자락. 조금 더 자란 너 7 쉬군 23/09/14 2328 26
1328 과학체계화된 통빡의 기술 - 메타 휴리스틱 13 서포트벡터 23/09/14 3085 26
1327 문학트라우마는 어떻게 삶을 파고드는가 - 폴 콘티 골든햄스 23/09/14 2388 19
1326 일상/생각현장 파업을 겪고 있습니다. 씁슬하네요. 6 Picard 23/09/09 3154 16
1325 정치/사회구척장신 호랑이 포수 장군의 일생 3 당근매니아 23/09/05 2617 16
1324 일상/생각경제학 박사과정 첫 학기를 맞이하며 13 카르스 23/08/29 3799 32
1323 영화콘크리트 유토피아 - 각자에게는 각자의 하느님이 6 골든햄스 23/08/27 2609 12
1322 요리/음식내가 집에서 맛있는 하이볼을 타 먹을 수 있을리 없잖아, 무리무리! (※무리가 아니었다?!) 24 양라곱 23/08/19 3933 28
1321 일상/생각뉴욕의 나쁜 놈들: 개평 4센트 6 소요 23/08/16 2680 20
1320 경제사업실패에서 배운 교훈, 매출 있는 곳에 비용 있다 7 김비버 23/08/12 3576 28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