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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1/25 13:57:22
Name   초공
Subject   《서른의 불만 마흔의 불안》 - 풍요 속의 생리 빈곤 (도서 증정 이벤트)

지난 1회 글에 댓글 달아주신 분 중 한 분께
책 《서른의 불만 마흔의 불안》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소님께 따로 쪽지드리겠습니다!

이번 글도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면
다음 주 월요일에 한 분 선정하여 도서 선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풍요 속의 생리 빈곤>

시간이 흘렀지만 쇼핑몰에서 생리대를 살 때면 여전히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생리대를 훔치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그녀는 아이들을 위한 빵은 간신히 살 수 있었지만 생리대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을 의심하며 뒤따라온 경비원이 뒤진 케이티의 주머니에서는 몰래 넣은 생리대와 여성용 제모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케이티는 나에게 노동으로 돈을 벌어 스스로를 건사하는 삶이 무너졌을 때 과연 무엇부터 포기할 것인지 질문을 던졌다.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랗게 흐려지는 순간 나는 과연 라면 한 봉지를 선택할까, 자궁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점막을 처리해줄 생리대를 선택할까. 생리대 대신 라면을 선택해 하체가 생리혈 범벅이 된다면 그 치욕은 견딜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근본적인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당혹감은 생을 향한 의지를 즉각적으로 앗아간다. ‘팩트’는 분명하다. 월경을 하는 여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남자보다 돈이 많이 든다. 평생 2000만 원쯤. 우리나라 생리대 평균 가격 331원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나온 금액이다.

‘생리 빈곤(period poverty)’이라는 용어가 있다. 2017년 영국에서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월경하는 동안 생리용품을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생리 빈곤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건 당시 열일곱 살이던 아미카 조지(Amika George)다. 신문에서 생리대를 사지 못해 결석하는 여학생 13만 7000여 명의 현실을 접한 아미카는 해시태그 #freeperiods를 만들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온 생리 빈곤으로 인해 누구나 누려야 할 학습권이 침해받는다고 주창하며 공감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붉은 의상을 맞춰 입고 시위를 하며 런던 한복판을 피바다로 물들인 인원은 2000명이 넘었다.

우리의 경우 <국민일보>의 운동화 깔창 생리대 보도로 생리 빈곤이 알려졌다. (여성용품에 부과되던 부가가치세 10퍼센트는 2004년에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생리대가 독보적으로 비싼 이유는 생리대 회사만 알 것이다.) 당시 성남시에서 저소득층 청소년 생리대 지원 사업을 시작하며 생리대 기부의 막이 올랐다. 생리대 지원은 이후 선거철마다 표를 얻기 위한 단골 공약으로 쓰였지만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종종 생리대는 기부 물품 리스트에 식료품과 동등하게 등장했고, 청소년은 물론 노숙자, 다문화가정 소녀까지 시선을 넓힌 자선단체도 생겼다. 그리고 여성가족부에서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을 위해 생리대 바우처 제도를 도입했다. 강남구는 초·중·고에 생리대 자판기를 설치했고, 경기도 여주시는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만 11~18세 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무상 생리대를 지급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강원도에 이어 제주특별자치 도교육청도 초・중・고에 생리대를 무상 지원하기로 했다. 생리를 쉬쉬하던 과거를 떠올린다면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변화다. 다만 바우처 제도와 같이 조건을 정해서 돕는 정책은 조건, 즉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숙제를 남겼다.

유튜브에서 <그날>이라는 단편영화를 본 적이 있다. 수학여행 가라고 엄마가 준 5000원을 들고 편의점 생리대 코너에서 한참을 망설여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인공은 화장실 칸에 앉아 있다가 친구들의 대화를 듣는다. “걔는 왜 만날 생리대를 빌리기만 해? 거지 새끼면 생리대를 쓰지 말든가.” 선택한 적도 바란 적도 없지만 여자의 신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몸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원리나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그저 처리에 급급해온 사회는 생리를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비난해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생리대를 빌려야 하는 상황이 ‘거지 새끼’ 탓이 아님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무기력함과 불행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생리에 대한 담론이다.

나뭇잎, 풀, 헝겊 조각, 토끼털 등 생리혈을 막기 위해 무엇이든 사용했던 역사는 양말, 운동화 깔창, 둘둘 만 휴지, 헌 옷 등을 써야 하는 누군가의 현재와 일치한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물에 녹는 생리대 기술까지 개발된 지금, 경제적인 이유로 생리대를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은 인류 역사의 퇴행이다. 최초로 일회용 생리대가 개발된 지 100년도 넘게 지났다. 누구도 라면과 생리대 중에서 택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시 생리대를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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