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10/12 21:44:53
Name   알료사
Subject   모태솔로
- 거참, 아까는 뭐땜에 나를 쫓아 버렸습니까? 내가 거기 있었다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텐데요...

- 하지만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었잖아요.

- 그러면 지금은 나를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 조금은요. 이를테면 당신은 지금 왜 떨고 계시죠?

- 아, 당신은 대번에 알아채시는군요. 그래요, 첫눈에 사정을 꿰뚫어 보았어요. 분명히 나는 여성 앞에서 수줍어합니다. 나는 지금 무언가에 놀라고 있습니다. 마치 꿈 같습니다. 아니 나는 꿈 속에서조차 언젠가 어떤 여성하고 말을 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정말이세요?

- 그렇습니다. 만일 나의 손이 떨린다면 그건 여태껏 이렇게 예쁜 손에 잡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성이란 존재에게 완전히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한번도 그들과 가까웠던 적이 없습니다. 아무튼 나는 혼자라서... 나는 그들과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할지조차 모릅니다. 지금만 해도 내가 혹시 당신에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라도 하지 않았는지요? 솔직히 말해  주십시오.

-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에요. 저는 그런 수줍음을 좋아해요. 알고 싶어하시니까 알려 드릴께요. 그리고 당신을 쫓아 버리지 않겠다는 것도요.

- 당신이 그러시다면, (나는 환희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당장 겁내는 일을 그만두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나의 방법과도 안녕이죠 ... !

- 방법이라뇨? 무슨 방법이요? 그런게 왜 필요하죠? 좀 불쾌한 말씀이시네요.

- 죄송합니다. 안 그러겠습니다. 그냥 말이 튀어나오다 보니... 그러나 당신이라면 이런 순간에 바라는 바가 없겠습니까...

- 제 마음에 들고 싶다는 그런 말씀이세요?

- 네, 그래요. 그러니 제발 노여워 마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여간 내 나이 벌써 스물여섯인데도 아무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훌륭하고 요령 있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서 심장이 이야기할 때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있겠습니까. 한 번도, 정말 한번도 어떤 여성과도! 그 어떤 교제도 없었습니다. 그저 날마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겠지 하고 꿈을 꿀 따름입니다. 아, 내가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사랑에 빠졌는지 당신이 안다면...

- 하지만 어떻게요, 그리고 누굴 사랑했다는 말씀이시죠?

- 아무도 아니죠. 그저 나의 이상, 내 꿈에 등장하는 여성입니다. 나는 꿈속에서 몇 편이나 소설을 지어내죠. 아,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 물론 만난 여자가 전혀 없을 수는 없죠. 두세 명의 여성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아줌마 같은... 아니, 그것보다 당신에게 우스운 얘기를 해드리죠. 나는 몇 번인가 이런 생각을 했죠. 거리에서 어떤 예쁜 아가씨에게, 물론 그녀가 혼자일 때, 허심탄회하게 말을 거는거죠. 정중하게 열정적으로 말을 하는 겁니다. 나는 혼자 죽어 가고 있다, 그러니 나를 쫓아 버리지 말아 달라, 누구라도 좋으니 여성과 교제하고 싶지만 방도가 없다, 뭐 이런 말을 하는 거죠. 그리고 그녀에게 나처럼 불행한 인간의 수줍은 애원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여성의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넌지시 암시하는 겁니다. 결국 내가 요구하는 것은, 무슨 말이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한 말을 두어 마디 해줄 것, 원한다면 나를 비웃어도 좋지만 내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줄 것, 내게 희망을 줄 것, 내게 두 마디, 단 두 마디 말을 해줄 것 등등이고, 그런 다음에는 우리가 영원히 안 만나도 좋다, 뭐 이 정도입니다. 당신은 웃고 계시는군요...

- 화내지 마세요. 제가 웃는 것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만일 실제로 그런 일을 시도해 보셨더라면 어쩜 성공하셨을지도 몰라요. 그저 거리에서 일어나는 그렇고 그런 일일지라도 말이에요. 단순할 수록 더 좋은 것 아니겠어요. 웬만큼 괜찮은 여자라면 공교롭게도 그 순간 무엇인가에 대해 화가 나 있다면 몰라도 당신이 그토록 간청하는데 두 마디 말도 안하고 쫓아 버릴 리가 있겠어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죠?! 저는 물론 당신을 미친 사람 취급했을 거예요. 저는 아무튼 제 방식으로 판단을 했을 테니까요.

- 아, 고맙습니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당신이 지금 내게 무슨 일을 해주셨는지!

- 됐어요. 됐어요! 하지만 말씀해 주세요. 당신은 어떻게 제가 그런 여자인지... 그러니까, 관심과 우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 한마디로, 당신 표현을 빌린다면, 아줌마 타입의 여자가 아닌지를 알아차렸는지요? 당신은 어째서 제게 접근할 생각을 하셨지요?

-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두렵습니다... 아까 당신을 보기 전까지 오늘 하루 저는 행복했습니다. 걸어가며 노래를 불렀죠. 시내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당신을 보았을 때... 괜한 일을 상기시킨다면 용서하십시오. 나는 당신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걸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거든요. 네, 그래요. 내가 당신 일에 안타까워하면 안되었던 걸까요. 내가 나도 모르게 당신에게 다가가려 했던 것이 당신을 모욕하는 일이었을까요?

- 그만, 됐어요. 이제 그만 말씀하세요. 제 잘못이에요. 말을 먼저 꺼낸건 저니까요. 하지만 제가 당신을 잘못 생각한게 아니라 좋네요. 벌써 집에 다 왔네요. 이쪽으로 가면 돼요. 안녕히 가세요. 오늘은 고마웠어요.

- 설마, 설마 이런 식으로 영영 헤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정말로 이게 다란 말입니까?

- 이보세요. 당신은 처음에 단 두 마디 말만을 원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 아무 말도 않겠어요. 어쩌면 다시 만나게 될지도...

- 내일 그리로 오겠습니다. 아, 용서해 주세요. 나는 벌써 당신에게 요구하고 있군요.

- 그래요. 너무 조급하시군요. 요구하고 계신 거나 다름없어요.

-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사실은 이렇습니다. 나는 내일 거기 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나는 몽상가입니다. 내게 현실적인 삶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같은 이런 순간이 날이면 날마다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꿈속에서 그 순간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밤새도록, 일주일 내내, 1년 내내 당신을 꿈꿀 겁니다. 나는 내일 그 자리에 와서 어제의 일을 회상하며 행복해 할 겁니다. 그런 장소가 나에게는 몇 군데 있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당신도 아까 옛 추억이 생각나 울고 계셨던 걸지... 아, 용서하세요, 내가 또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군요. 당신은 어쩌면 언젠가 그곳에서 특별히 행복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 좋아요. 저도 아마 내일 그곳에 올 거예요. 똑같이 열 시에. 어차피 저는 제 볼일 때문에 거기 와야 해요. 제가 당신을 만날 약속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오셔도 별로 상관은 없어요. 지금 저를 비난하고 계신 건 아니죠? 제가 그렇게 가볍게 만날 약속을 하는 여자라고는 생각지 마세요. 다만 미리 약속을 해주세요...

- 약속이라구요! 말씀하세요, 말씀하세요, 뭐든 말씀하세요. 뭐든 동의합니다. 무엇이든 다 각오가 되어 있어요. 나도 내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 저를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그건 안됩니다. 우정은 얼마든지 좋아요. 그러나 사랑은 안 돼요. 부탁이에요.

- 맹세합니다.

- 됐어요. 맹세 같은 건 하지 마세요. 아무튼 저는 당신이 화약처럼 폭발할 수 있는 사람이란걸 아니까요. 제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고 절 탓하지는 마세요. 정말 저를 배신하지는 않으시겠죠?

- 두고 보시면 알 겁니다.

- 편히 주무세요. 안녕. 그리고 잊지 마세요. 제가 이미 당신을 믿어 버렸다는 걸. 그래요. 당신의 열변을 듣고 당신에게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대체, 무엇을 말입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 내일 말씀드릴께요. 그때까진 비밀로 하겠어요. 그게 당신에게 더 좋을 거에요.

- 아, 그래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마치 내게 기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하느님,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당신은 화를 벌컥 내며 나를 쫓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단 2분 동안에 당신은 나를 영원히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가 나 자신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나의 의혹을 모두 해소시켜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그럼 내일 다 말씀드리죠. 당신은 모든 걸 알게 될겁니다...

- 좋아요. 그러기로 해요. 당신이 먼저 시작하는 거예요.

- 동의합니다.

- 그럼 안녕히 가세요!



.
.
.



타임라인에 간단히 올리려 했는데 글수 제한에 걸린걸 몰랐네요.

자게의 경량화와 허들 낮추기를 위할 겸 해서 이곳에 올립니다.

이상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 '백야'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요약발췌였구요.

뭔가 두 사람간의 거리가 너무 급격히 좁혀지는 감이 있고 처음 만난 사이에 지나치게 솔직한거 아닌가 싶기는 한데

남중 남고를 나온 이후 다시 2년여간 또래 이성을 만날 기회가 없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대학의 여초학과에 들어가 대 혼란을 겪었던 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모태솔로 남자가 여자를 상대하며 거치는 심리적 시향착오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묘사한 글은 본적이 없습니다. 최소한 남자의 입장에서는요.

오래도록 간절히 바래 왔으면서도 막상 현실 앞에 서니 두려워지고,

상대의 작은 호의에 필요 이상으로 감격해하고,

소심하게 구걸했던 관심을 얻고 나자 그 이상을 바라고,

여기까지가 끝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인연을 이어나갈 실오라기 같은 길이 열린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감내하고,

아... 누가 불러서 나가봐야겠습니다.

모태솔로신분들은 무신 얘긴지 아실걸로 알고 이만...




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47 6
    14625 의료/건강SOOD 양치법 + 큐라덴 리뷰 7 + 오레오 24/04/26 356 0
    14624 일상/생각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6 + kaestro 24/04/26 369 1
    14623 방송/연예요즘 우리나라 조용한 날이 없네요 6 니코니꺼니 24/04/26 687 0
    14622 IT/컴퓨터5년후 2029년의 애플과 구글 1 아침커피 24/04/25 393 0
    14621 기타[불판] 민희진 기자회견 63 치킨마요 24/04/25 1736 0
    14620 음악[팝송] 테일러 스위프트 새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김치찌개 24/04/24 144 1
    14619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8 자몽에이슬 24/04/24 602 17
    14618 일상/생각저는 외로워서 퇴사를 했고, 이젠 아닙니다 18 kaestro 24/04/24 1133 17
    14617 정치이화영의 '술판 회유' 법정 진술, 언론은 왜 침묵했나 10 과학상자 24/04/23 824 9
    14616 꿀팁/강좌[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20 *alchemist* 24/04/23 683 14
    14615 경제어도어는 하이브꺼지만 22 절름발이이리 24/04/23 1421 8
    14614 IT/컴퓨터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1) 2 kaestro 24/04/22 350 1
    14613 음악[팝송] 밴슨 분 새 앨범 "Fireworks & Rollerblades" 김치찌개 24/04/22 117 0
    14612 게임전투로 극복한 rpg의 한계 - 유니콘 오버로드 리뷰(2) 4 kaestro 24/04/21 338 0
    14611 사회잡담)중국집 앞의 오토바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22 joel 24/04/20 1244 30
    14610 기타6070 기성세대들이 집 사기 쉬웠던 이유 33 홍당무 24/04/20 1573 0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5 kaestro 24/04/20 692 6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135 1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5 kogang2001 24/04/19 395 8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370 10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4 kaestro 24/04/19 554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828 12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274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92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