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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5/01 23:15:41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비평은 솔직해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본서는 사실 사서 볼 필요가 없어요.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려서 그래요. 본문에 수록된 대부분의 글들이 09~11년대를 전후로 작성된 것들이고, 가장 최근에 쓴 것조차 13년 초에 나온 놈이에요. 책의 출간은 2014년이었으니 나온 즉시 사봤다면 모를까, 2017년의 절반이 다 지나간 시점에서 굳이 이렇게 시의성 높은 글들을 다시 꺼내볼 필요는... 없지요. (훗날 역사가들이 보기엔 좋아할 거예요. 시의성이 조금만 있어도 환장하니까)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본서가 저자의 직관에 매우 깊이 의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가만 보면 깜짝 놀랄 만한 비유를 만든다거나 키워드를 제시하는 걸 보니 직관력이 남달리 뛰어나긴 해요. 다만 직관과 감각은 위험한 물건이라 잘 쓰면 대박이지만 잘못하면 글을 크게 그르치기도 하지요. 저자 개인의 경험과 경향성에 영향을 받아 주어진 사태를 영 잘못 해석할 여지가 있거든요.

하지만 이런 직관러들은 좋은 인용거리들을 남겨주지요. 순간순간을 절개하는 날카로운 키워드들엔 분명 생명력이 있어요. 그러므로 여기에 적당히 인용하니, 본서를 굳이 사서보진 마시고 그저 이 직관의 향연만을 즐기시길.



사람들은 정말로 어려운 글을 싫어하고 쉬운 글을 좋아하는가?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어려운 글이 자신을 편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글의 어려움도 내용의 어려움이라기보다는 '누구 편을 드는지를 파악하기 힘든 어려움'이 아니었던가 한다. (중략) '우리편 전문가'라는 말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우리편임이 확실하면서도 뭔가 내가 모르는 맥락으로 상대편의 기를 죽이는 사람이다.

오 이거 맞는 말이에요.



"... ~한 성격을 계발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

책도 여러 권 내신 분이 이런 실수를 하면 안 돼요. 

계발은 논어에서 온 말로 '일깨워주다'에 가까워요. 성격을 계발하든 개발하든 다 이상하긴 하지만 그나마 개발이라고 했어야 옳아요.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은 전설적인 레전드 기업인가...



이를테면 시기라는 감정은 상대방이 내가 잘 모르는 어떤 쾌락을 누리고 있을 거라는 의구심에서 발생한다. 상대방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을 나보다 더 잘 누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부러움은 심각해지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는 가령 이등병이 가지고 있는 병장에 대한 부러움은 시기의 감정은 아니다. 이등병은 병장이 부러운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군대에서 혹은 과외를 하다가 강남 중산층 출신의 또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이 언제나 부러운 것은 아니었다. 가령 '돈이 많아도 여자가 나오는 술집에나 다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상황이 부럽지는 않다. 어차피 나는 여자 나오는 술집에는 안 가는걸. 그러나 그가 양주 맛을 감별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때부턴 얘기가 다르다. 그가 나보다 더 가진 자원으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이 있고, 그 일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는 것을 자각하면 미칠 듯이 부러워지는 것이다.

아. 그럴 수 있구나.



'88만원 세대'에 해당하는 지금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세대는 X세대의 등장을 지켜봤거나 적어도 그들이 열어젖힌 새로운 세계에 영향을 받았다. (중략) 1990년대 후반 HOT 팬덤과 잭스키스 팬덤의 대립은 '취향의 전쟁'을 벌이는 10대들에게 조직화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노사모의 핵심 인물로서 훗날 참여정부의 홍보 수석이 된 시인 노혜경이 "노사모는 HOT 팬클럽을 본떴다."고 말한 것도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386세대에게 '표준적인 조직'이 '운동권 서클'이었다면 이 세대에게 그것은 '팬클럽'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누리꾼의 정치 참여의 장을 열어젖힌 '노사모'는 이 두 문화의 융합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었다.

최근에 홍차넷에서도 정치팬덤 이야기가 좀 있었지요. 관련된 부분이라 메모해둠.



나는 2000년대 중반에 참여정부의 정치인 누구누구를 후원하는 사업가나 전문직들을 몇몇 만난 적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역시 대개는 기러기 아빠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한국 제도권 교육의 폐해를 역설하면서 자신의 아이가 외국에 가서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진정 어린 음성으로 증언하곤 했다. (중략) 내가 적극적으로 대안교육을 찾으려는 이들을 불신하게 된 것도 이런 세태를 본 이후였다. 사실 오늘날의 대안교육은 자식을 독일이나 핀란드로 보낼 정도의 재력은 없는 진보적인 부모들이 만들어낸 대한민국 안의 '작은 독일'이며 '작은 핀란드'다.

대안학교가 실상 대안학교가 아니란 이야기를 홍차넷에서도 들었던 것 같은데 정말 이런 느낌인가요 (전 잘 모름).



인터넷상에서 흔한 자칭 '키워'들은 '키워질'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 나는 상처입지 않고, 남은 상처입히는 게 승리라고. 그러려면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면서 남의 감정에 생채기 내는 술법들을 익혀야 한다.

그러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의식은 정부가 삶의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요구를 하는 것에 이르지 못했고, 여전히 '민주주의 vs 독재'의 구도로 사태를 파악한다. 이것은 '민주 vs 독재'의 구도이며, 더 나아가 '공익 vs 사익'의 구도가 된다.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각자 공익을 말하는 이들끼리의 의견도 다를 수 있고 그런 이들이 내세운 정책도 서민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상식'은 이들의 인지 체계에 들어오지 못한다.

<나는 꼼수다>의 김어준이나 한때 노무현을 가장 잘 계승한 존재로 여겼던 유시민 등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한국의 보수파는 사익 추구 세력이기 때문에 나쁘고 우리(편 정치인)는 다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한미 FTA라도 이명박 정부의 FTA는 가진자들의 배를 불리려고 했기 때문에 '나쁜 FTA'인 반면 참여 정부의 FTA는 국가와 민족을 생각한 발전 전략이었기 때문에 '착한 FTA'란 식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기준은 '박정희는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생각했기 때문에 독재라도 독재를 한 것이 아니다'라는 한국 극우파의 진술과 정확히 같은 형식의 것이다.

확실히 한윤형씨는 386세대 깔 때가 가장 찰진 것 같아요. 아마 참여정부시절 노동문제로 정치의식화한 저자의 직접경험이 386의 요상한 노동정책과 아마츄어리즘에 대한 환멸-->강한 거부감으로 이어졌을 거라고 짐작해볼 수 있어요. 본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한 차례 지나가듯 386이 너무 일찍 정권을 잡은 게 불행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저도 그 점에 동의해요. 02년 대선 때 이회창이 승리하고, 이어진 07년에 재수생 노무현이 승리하는 식이었다면 대한민국에게도 386에게도 조금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상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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