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9/04 21:23:30
Name   Raute
Subject   메론 한 통
집 근처 지하철역 앞에 과일을 파는 분이 있습니다. 비나 눈이 오지 않는 이상 거의 매일 나와 있죠. 서울 시내에 노점상이 있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분이 도드라지는 건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겁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크게 외치고 휠체어 위에서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보면 뇌성마비인가 싶습니다. 다들 한 번씩 힐끔 쳐다보고 갑니다만 막상 과일을 사는 사람을 본 기억은 없습니다. 저 역시 어떻게 저 과일들을 갖고 나오는 걸까 신기해하면서도 한 번도 산 적은 없었습니다.

장애인들이 언론에 나와 수없이 하는 말이죠. '우리를 동정하지 말아달라' 나름대로 이 말을 꽤 잘 지켜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을 보면서 신기해하지도 않고 특별히 도와주러 나서지도 않습니다. 건물 들어갈 때 뒤에 휠체어가 있으면 문의 손잡이를 잡아 기다려주고 서로 목례를 하는 정도. 가끔 추레한 차림의 장애인 노점상을 발견하면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만 어릴 적에 안 좋은 기억을 주었던 노점상들을 떠올리며 그들도 똑같은 노점상이라고 되뇌이며 지나치곤 했습니다. 지하철역 앞에서 과일 파는 분에게서 과일을 사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는데 저는 평소에 과일을 사는 일이 거의 없고, 굳이 저분에게서 과일을 사는 건 불필요한 동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분은 역 앞에서 과일을 팔고 있었습니다. 휠체어 없이 서있더군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굳이 지나가던 길을 되돌아와 과일을 샀습니다. 글쎄요 친구와 비싼 저녁을 먹고 난 뒤라 오만하게도 연민의 정을 느꼈던 걸까요?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이 얼마 없어 살 수 있는 과일이 사과와 메론 뿐이었습니다. 사과는 싫어하기 때문에 그나마 맛있게 먹는 메론을 한 통 샀습니다. 담아주겠다고 비닐봉투를 꺼내는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데다 미끄러운 비닐을 제대로 쥐지 못해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제가 했으면 5초면 끝날 일이 1분이 넘어가더군요. 메론과 돈을 쥔 채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마침내 비닐봉투를 열어주길래 그건 제가 하겠다고 주시라고 한 다음 돈을 드리고 직접 메론을 담았습니다.

마주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분의 얼굴'과 '실제 그분의 얼굴'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그분을 똑바로 바라본 게 아니라 오히려 동정심을 느낄까봐 회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장애인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게 아니라 굉장히 크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집에서 처음으로 직접 메론을 썰어봤습니다. 어머니의 칼놀림으로는 쉬워보였는데 어렵더군요. 몇 조각 먹어보니 맛이 괜찮았습니다. 다음에 또 메론을 사먹을 이유가 생겼습니다. 오직 맛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건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13
  • 엄마는 추천
  • 따뜻해졌어요
  • 춫천
  • 추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40 6
14624 일상/생각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4 + kaestro 24/04/26 287 1
14623 방송/연예요즘 우리나라 조용한 날이 없네요 4 + 니코니꺼니 24/04/26 528 0
14622 IT/컴퓨터5년후 2029년의 애플과 구글 아침커피 24/04/25 310 0
14621 기타[불판] 민희진 기자회견 61 + 치킨마요 24/04/25 1595 0
14620 음악[팝송] 테일러 스위프트 새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김치찌개 24/04/24 131 1
14619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8 자몽에이슬 24/04/24 582 17
14618 일상/생각저는 외로워서 퇴사를 했고, 이젠 아닙니다 18 kaestro 24/04/24 1116 17
14617 정치이화영의 '술판 회유' 법정 진술, 언론은 왜 침묵했나 10 과학상자 24/04/23 807 9
14616 꿀팁/강좌[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20 *alchemist* 24/04/23 674 14
14615 경제어도어는 하이브꺼지만 22 절름발이이리 24/04/23 1396 8
14614 IT/컴퓨터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1) 2 kaestro 24/04/22 348 1
14613 음악[팝송] 밴슨 분 새 앨범 "Fireworks & Rollerblades" 김치찌개 24/04/22 112 0
14612 게임전투로 극복한 rpg의 한계 - 유니콘 오버로드 리뷰(2) 4 kaestro 24/04/21 333 0
14611 사회잡담)중국집 앞의 오토바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22 joel 24/04/20 1232 30
14610 기타6070 기성세대들이 집 사기 쉬웠던 이유 33 홍당무 24/04/20 1560 0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5 kaestro 24/04/20 686 6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128 1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5 kogang2001 24/04/19 391 8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364 10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4 kaestro 24/04/19 551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822 12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266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87 2
14601 꿀팁/강좌전국 아파트 관리비 조회 및 비교 사이트 11 무미니 24/04/13 901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