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17/10/21 20:52:33 |
Name | [익명] |
Subject | 학창 시절 괴롭힘 때문에 불안증이 생긴 삼십대입니다. |
예민하다, 섬세하다, 까다롭다, 소심하다, 상냥하다, 시니컬하다, 우울하다... 제 주위 사람들은 제 성격을 이런 말들로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동의하고 원인에 대해서는 학창 시절의 괴롭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돈을 뺏기거나 맞는 것 자체도 싫었지만 다른 애들 앞에서 모욕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로 굉장히 내성적이고 또 가끔은 히스테리가 폭발하는 그런 십대를 보냈으나, 그래도 어떻게든 더 망가지지 않고 나름대로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그 시절 겪은 일들이 뼈대가 되고 새로운 스트레스의 단편들이 새로 붙은 살이 되어 악몽으로 저를 기습해 와요. 사람들 앞에 서면 여전히 목소리를 떨 때가 있고 누군가와 당황한 티 안 내고 눈 마주치고 이야기하려면 몰래 심호흡 좀 하고 와야 합니다. 누가 제 뒤에 있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누구와도 말하기 싫어서 엎드려 고개를 묻고 있으면 날아오던 스매시의 기억...) 안 좋은 상상(날붙이가 보이면 베이거나 찔리는 상상, 높은 곳에서 서면 떨어지거나 누가 뒤에서 미는 상상 등등)에 시달릴 때도 많은 편이고요. 20대 초반까지 연애는 꿈도 못 꿨습니다. 마음을 들키기 싫어하다 보니 좋아하는 사람 앞일수록 이상한 행동을 너무 많이 했달까요. 요즘도 가끔 상태 나빠질 때면 뭔가 치료가 필요하진 않을까 싶긴 하지만, 첫 직장 갓 들어갔을 때 우울증 상담 한 번 받은 것 빼면 병원 가는 일 없이 혼자(정확히는 혼자가 아니기도 하죠. 가까운 사람들은 제가 예민한 거 알고 배려해 주니까) 다스려 왔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좀 무뎌지고 유연해진 부분도 있는 것 같고요. 아무튼... 그런 사람에게 궁금한 게 있으시면 뭐든 물어보세요.ㅎ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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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두 분 다 제가 호주머니나 지갑에 손을 대는 건 어렴풋이 알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깊이 생각 안 하셨던 것 같고, 어머니는 가끔 지갑에서 돈이 없어졌는데 모든 상황을 따져 봤을 때 너 말고는 구멍이 없다, 왜 그랬냐 추궁했던 적이 있고요. 울음을 참으며 부정했고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그때는 그냥 제가 일탈 행위를 한다 여기셨을 것 같아요. 돈을 뜯기고 나면 오락실에 자주 갔어요. 몇백 원으로 시간 죽일 수 있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으니까요. 또 알리바이를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어요. 용돈이... 더 보기
부모님 두 분 다 제가 호주머니나 지갑에 손을 대는 건 어렴풋이 알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깊이 생각 안 하셨던 것 같고, 어머니는 가끔 지갑에서 돈이 없어졌는데 모든 상황을 따져 봤을 때 너 말고는 구멍이 없다, 왜 그랬냐 추궁했던 적이 있고요. 울음을 참으며 부정했고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그때는 그냥 제가 일탈 행위를 한다 여기셨을 것 같아요. 돈을 뜯기고 나면 오락실에 자주 갔어요. 몇백 원으로 시간 죽일 수 있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으니까요. 또 알리바이를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어요. 용돈이 빨리 사라지는 이유는 제가 오락실을 다니는 '나쁜 습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어머니께 신호를 줄 수 있었죠. 하지만 이미 뜯긴 다음에 이백 원, 삼백 원 들고 가서 오락실 사장님 눈치 보며 한두 시간에 한 게임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3 때, 어머니가 제 방을 치우다가 제 노트를 발견했어요. 얼마나 내 매일이 비참한지, 얼마나 이 삶을 살기 싫은지 사춘기 소년다운 과장을 섞어 몇 권의 노트를 써 두었거든요. 어머니가 그 노트들 갖고 저를 불러서 엄청나게 울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어요. 부모 없이 자란 자신의 어린 시절, 엉터리 같은 남편을 만나서 고생했지만 자식들에게 걸었던 기대 같은 것들... 네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는지 몰라 줘서 미안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게 제 삶의 변곡점 중 하나였답니다.
왜 이 글을 썼을까 생각해 봤어요. 말하자면 되새기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제 힘으로 제가 지금 제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나약하기 짝이 없는 나를 지탱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어리석은 제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않게 길을 보여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고등학교 때의 학원 친구들, 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어릴 때 담임 교사로부터 자폐아라느니 뭐라느니 얘기를 듣곤 했거든요. 저를 괴롭히던 애들은 저를 쓰레기라고 불렀죠. 많은 사람들이 이끌어 줘서 망가지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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