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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1/15 23:07:59
Name   tannenbaum
Subject   실생활유머 - 미러링
때는 늦더위가 한창이던 23년 전 대학캠퍼스. 푸르다 못해 젖 비린내 나던 신입생 시절 늦여름이었다. 막 개강을 하고 정신없는 2학기를 맞이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름 방학 내내 돈을 벌어야 해서 하루에 세탕 네탕씩 과외를 다니느라 방학은 오히려 학기 중보다 더 힘들었다. 정말이지 교사라는 직업은 3D 중 하나인 게 확실하다. 연봉 더 올리자고 세금 올려도 박수쳐야 한다. 뭐 오늘 이야기는 교사들의 연봉이 아니니 이쯤하고.....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과외를 가기전 저녁을 해결하려고 상대 뒤 식당으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거기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 김개똥(가명)을 만났다. 난 인상이 절로 써졌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그저.... 웃지요.... 가 아니고 바로 여러분의 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근검절약을 남의 돈으로 하는 '거머리'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동창 개똥이를 조금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 싶다.

시골 출신이었던 개똥이는 고딩때부터 늘 '한입만', '100원만', '빵 좀 사주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때는 친구들 모두 개똥이가 집이 가난해서 그런 줄 알았다. 자기 입으로 아버지 농사지으셔서 힘들다고 항상 얘기 했었으니까... 그래서 다들 내거 살때 하나 더사거나 돌려 받을 생각 없이 100원 200원씩 주고는 했었다. 같은 대학 같은 단대로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었다. 담배 나눠주고 커피 뽑아주고 점심 사주고 술자리에서 늘 면제해주고 버스 끊기면 택시비 받아가고(빌리는 거 아니고).......

그러다 진실이 알려졌다.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개똥이의 여자친구 말숙이(가명)가 자기의 친구(이자 또 다른 동창 녀석의 애인)에게 자랑을 한 게 화근이었다. 자기들 백일에 개똥이가 고가브랜드 반지와 함께 96NY에서 몇십만원을 들여 커플룩을 맞췄다고 자랑을 했다. 저녁에는 광주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썰며 두 사람의 백일을 축하했다는 것도.... 물론 비싼 와인과 함께... 그렇다. 친구들에겐 밥 얻어먹는 가난한 고학생이었지만 여친에게는 따뜻한 통 큰 남자였다. 이외에도 개똥이가 자기 여친에겐 평소 돈을 물 쓰듯 했다는 것도 동창들에게 다 퍼졌다. 한참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개똥이 부모님과 같은 고향동네 사는 다른 과 동기에게 우연히 들었다. 지역유지 까지는 아니어도 개똥이에게 충분한 생활비를 보내 줄 여력은 되는 집이라는 걸..... 시골이라고 다 찢어지게 가난한 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여튼간에 개똥이네 집이 실제로 가난하던 부자던 여자친구에게 늘 비싼 선물과 데이트를 하며 돈을 혼자 썼으면서 친구들에게 늘상 거머리처럼 빈대 붙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분노케 했다. 개똥이에게 따졌더니 미안해하기는 커녕 당당하더라.... '느그들이 사줘 놓고 이제 와서 왜 이러냐. 그렇게 싫었으면 안 사줬으면 될거 아니냐 사줘놓고 치사하게 왜 이러냐' 도리어 화를 내더라. 그리곤 우리는 여름 방학을 했고 한동안 개똥이를 보지 못했다. 2학기가 개강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날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개똥이를 다시 보게 된 것이었다. 방학전 그일이 있었음에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더없이 친근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개똥이 - 아따 오랜만이다이~ 수업 끝났는 갑다. 어디 가냐?

tannenbaum - 과외 가기 전에 저녁 먹고 갈라고.

개똥이 - 아 그냐. 잘 됐다. 나 오늘 한끼도 못 먹었시야. 나 밥 좀 사주라.

tannenbaum - 니 돈으로 사묵어야.

개똥이 - 돈이 하나도 없시야. 긍께 그라제.

tannenbaum  - 사줄돈이 하나도 없시야. 긍께 그라제.

개똥이 - 아따 너 진짜 넘한다. 친구끼리 밥 좀 사달라고 부탁도 못한대?

tannenbaum - 아따 너 진짜 넘한다. 친구끼리 니가 이라믄 곤란해 할거라는거 생각도 못한대?

개똥이 - 바바야(지갑을 보이며) 진짜로 하나도 없은께 그라제.

tannenbaum - 바바야(지갑을 보이며) 진짜로 나도 딱 밥먹고 택시비하믄 끝인께 그라제.(거짓말이다. 택시 안타도 되는 상황이었다.)

개똥이 - 좀 서둘러서 버스 타믄 사주고도 남것구만 그거시 그라고 이해 못 할 일이대?

tannenbaum - 밥 먹을 시간도 쪼개감시롱 돈 벌라고 택시 타는디 그거시 그라고 이해 못 할 일이대?

개똥이 - 아이 너 나 화나라고 일부러 따라하냐?

tannenbaum - 아이 내가 머단다고 너를 따라하것냐?

개똥이 - 아따 싫으믄 말어야. 치사해서 안먹을랑께. 됐은께 가기전에 담배나 하나주라.

tannenbaum - 치사한디 담배는 머단디 얻어 필라고야? 능력 없음 끊어야.


내가 생각하는 내 생에 최초이자 최고로 꼬시던 미러링이다. 이후로 개똥이와 되도록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고 같이 하더라도 호구 노릇은 하지 않았다. 졸업한 이후 남의돈으로 근검절약하는 습관덕인지 동창들 중 경제적으로 윤택한편으로 살고 있다. 그렇다고 개똥이가 그 버릇을 고쳤을까? 아니다. 동창들, 친구들 결혼식, 경조사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빠지려고 했지만, 자기는 자질구레한 것 하나까지 악착같이 다 챙겨먹으려 들었다. 하다 못해 자기 애 백일부터 얼굴도 모르는 지 동생 결혼식까지... 그때마다 난 무시하고 쌩깠지만 다른 친구들은 정이 약해서인지 그래도 중요한 일에는 찾아가더라. 순해빠진 것들.... 역시 난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닌게 확실하다.

p.s.
얼마전에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오지도 않고 몇 년간 연락이 없던 개똥이가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는지 단체 문자를 보내 왔다. 자기 부모님 고희연한다고.... 당연히 그냥 씹고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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