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관련하여 선조실록과 경연일기를 발췌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의 첫 부분에 나오는 요약을 올려 봅니다.
“실록에, 선조 10년에서 11년 사이에, 서울의 몇몇 사람들이 사적으로 관보를 인쇄·출판하여 판매하는 일을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추국하고 귀양보낸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율곡의 〈석담일기〉(경연일기)를 읽다가 알게 된 내용인데, 우선 “인출”하였다 했으니 활자를 만들었을 것이고, 실록에 마치 “고사처럼 인출하였다”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인쇄 품질도 상당했던 것 같다. 중국의 관보를 흉내내었다 하였으니 중국...더 보기
이거 관련하여 선조실록과 경연일기를 발췌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의 첫 부분에 나오는 요약을 올려 봅니다.
“실록에, 선조 10년에서 11년 사이에, 서울의 몇몇 사람들이 사적으로 관보를 인쇄·출판하여 판매하는 일을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추국하고 귀양보낸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율곡의 〈석담일기〉(경연일기)를 읽다가 알게 된 내용인데, 우선 “인출”하였다 했으니 활자를 만들었을 것이고, 실록에 마치 “고사처럼 인출하였다”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인쇄 품질도 상당했던 것 같다. 중국의 관보를 흉내내었다 하였으니 중국에서는 이미 이런 인쇄물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사대부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한다. 그러나 국왕은 기록에 공포감을 가졌던 듯하다. 말은 사국을 사사로이 설치한 것이라 하여, 안보에 관한 문제로 다스렸으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치리가 비판받을 소지를 만들기 싫었던 것일 터.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한 재미있는 사건이라, 여기 요약을 만들어 둔다. 〈선조수정실록〉은 율곡의 경연일기를 그대로 베낀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