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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5/13 14:40:04수정됨
Name   임아란
File #1   19039972.jpg (60.0 KB), Download : 0
Subject   은닉 / 배명훈


11년 만에 휴가를 얻게 된 킬러와 극단에 몸을 맡긴 채 죽음을 연기하고 있는 숙청된 권력자의 딸 그리고 연방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살해된 천재 정보분석가가 펼치는 스릴러물


단편집 예술과 중력가속도를 읽었을 때도 느꼈지만 배명훈은 무얼 가져와도 자기 방식으로 풀어낼 줄 아네요. 소재를 잘 흡수하는 것도 있지만 이야기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거 같아요. 이번에 이거 꺼냈으나 다음엔 저거 꺼낼까? 하는 식으로. 소재와 전개는 스릴러 물. 배경은 현대 정치와 권력 간의 암투.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다루는 건 끝까지 숨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 은닉에 관한 거였으니. 더 마음에 들었던 건 이 은닉이란 단어를 얇게 얇게 썰어 메인 주제와 트릭, 배경에 잘 넣어서 활용했단 점이에요.

어떤 식이냐면 이 소설의 배경은 체코에요. 너무 추워 말조차 나오지 않는데 주인공은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는 킬러에요. 그런 그가 보호하고자 하는 대상은 숙청된 권력자의 딸입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게 뻔한데. 또 그런 주인공의 조력자는 주인공이 속한 조직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사망 처리된 정보 분석가입니다. 배경에 한 겹의 막이 쌓여 있는데 인물들도 막이 쌓여 있어요. 그런데 한술 더 떠서 모든 걸 풀기 위한 열쇠는 내면의 악마에 달려 있어요. 이렇게 여러 겹의 막으로 촘촘히 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답답한 느낌이 없어요. 눈보라 속을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가지만 발걸음은 당차고 눈에는 힘이 가득한 사람의 뒷모습. 중반부 이후로는 우화 햇님과 나그네의 햇님처럼 이 사람의 옷을 벗기는데 조금 서두른 감이 있지만 능숙하고 속도감이 있어 좋았어요.


이 일치감은 그만큼 작가가 판을 잘 짰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것들이 다 한 곳에서 모이는데 시너지도 좋고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주제에 잘 도달해요. 개인적으로 스릴러 물을 즐겨하지 않아 그쪽에 입각한 말을 할 수 없단 점과 마지막에 봉인을 너무 서둘러서 풀었단 점만 빼고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 이건 다 쓰고 나서 생각난 말인데 이 소설은, 입김을 내뿜지 않고서야 자기자신을 자각할 수 없는 곳을 배경으로 아무 말 못하고 숨어지내야 하는 사람들이 펼치는 내면의 악마들의 이야기인 거 같아요. 서문에 넣고 싶은데 지금 고치긴 그래서 그냥 이렇게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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