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게시판입니다.
Date | 20/07/31 12:28:08수정됨 |
Name | 풀잎 |
Subject | 지식과 권력에 대하여 |
미셀 푸코의 명언 중에, ''지식은 권력의 일부가 아니다. 이것은 알려져서는 안된다." 라는 구절이 평소에 제가 생각하던 것과 어떤 연계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실제로 푸코의 전문을 좀 더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권력의 승계나 유지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너무나 잘 요약해 놓은듯한데요. 푸코 이전 이후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식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거나 한정하는 것 혹은 그런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 놓은 자료들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철학가라든가 책이라든가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촘스키의 비디오 대담 등에서 권력과 이런 지식에 대한 접근, 오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기는 했었는데요. 제가 궁금한 건 권력보다는 오히려 권력이 어떻게 지식을 권력유지를 위해서 이용하거나 이용되는지가 궁금합니다. 잘알잘 홍차넷의 힘을 빌려보고 싶습니다. 일단 이 자료를 찾아서 읽고 있는데 질문과는 좀 떨어진 이야기같지만, 재밌네요. 시간 많으신 분들 읽어보시길! 푸코를 위하여 - 지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재고찰 -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11050/1/phil_thought_v10_063.pdf 원래 질문에 대한 답은 못찾았는데요. 재밌는 내용들이 많이 있네요. 스탠포드 교수 Hans N. Weiler 분이 지식과 권력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이분은 인도 석학 아시스 난디의 말을 빌려서, 지식과 권력이 불평등하게 이용되는 것을 막기위해서 대학의 역할을 강조하네요. 대학에서 연구비를 상업적인 의미로 펀딩받지 않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연구하라는 이야기... https://web.stanford.edu/~weiler/Texts09/Weiler_Molt_09.pdf 그 외에 ...아래 석학들을 추천하시는군요. 볼프 레페니즈 호미 바바 - 탈식민지주의 헬가 노워트니 - 스위스 대학 교수 스티브 풀러 - 휴머니티 2.0 이런 교수님 강의나 책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결론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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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데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난속에 되풀이되어서 살고 있거나,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테크놀리지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져서 도태가 되어서 사회에서 어떤 부분에서 낙오자 - 익스트림하지만 - 가 되거든요. 저만 해도 집에서 티비와 오디오 앰프들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없어서 답답해하기도 하구요.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홍차넷이나 인터넷에 알게된 흥미로운 게임들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권력자의 행사를 하기도 했구요.
나는 너희들에게 재밌는 게임에 접근하게 해 주는 리소스이다 라는...
결국 ... 더 보기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난속에 되풀이되어서 살고 있거나,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테크놀리지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져서 도태가 되어서 사회에서 어떤 부분에서 낙오자 - 익스트림하지만 - 가 되거든요. 저만 해도 집에서 티비와 오디오 앰프들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없어서 답답해하기도 하구요.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홍차넷이나 인터넷에 알게된 흥미로운 게임들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권력자의 행사를 하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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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데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난속에 되풀이되어서 살고 있거나,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테크놀리지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져서 도태가 되어서 사회에서 어떤 부분에서 낙오자 - 익스트림하지만 - 가 되거든요. 저만 해도 집에서 티비와 오디오 앰프들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없어서 답답해하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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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들에게 재밌는 게임에 접근하게 해 주는 리소스이다 라는...
결국 사회적으로는 기형적으로 대학 - 유학 - 아니면 많이 배운 이에게 크레딧을 주고 있는데요. 인맥이 결국에는 정보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듯한 유형이 되기도 하구요. 정보가 자본이 되고 힘이 되는 걸 보게 되쟎아요.
대신에 개인들은 자신이 축척할 수 있는 정보/프로세싱의 한계가 있지만, 이재용처럼 권력자들?은 소위 가장 efficient 하게 정보를 축적한 이들을 통해서 효율적으로 정보를 활용하구요.
권력을 즐기거나 권력을 유지한다는 의미보다는 이런 권력과 지식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사회 지도층이 교육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배우는 것, 지식에 대한 접근이 생산성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사회에서는 오히려 소비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교육과 문화가 있어왔는데 어떤 접근이 좀 더 문명에 이로울런지 그런 생각이 이어지네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난속에 되풀이되어서 살고 있거나,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테크놀리지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져서 도태가 되어서 사회에서 어떤 부분에서 낙오자 - 익스트림하지만 - 가 되거든요. 저만 해도 집에서 티비와 오디오 앰프들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없어서 답답해하기도 하구요.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홍차넷이나 인터넷에 알게된 흥미로운 게임들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권력자의 행사를 하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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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회적으로는 기형적으로 대학 - 유학 - 아니면 많이 배운 이에게 크레딧을 주고 있는데요. 인맥이 결국에는 정보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듯한 유형이 되기도 하구요. 정보가 자본이 되고 힘이 되는 걸 보게 되쟎아요.
대신에 개인들은 자신이 축척할 수 있는 정보/프로세싱의 한계가 있지만, 이재용처럼 권력자들?은 소위 가장 efficient 하게 정보를 축적한 이들을 통해서 효율적으로 정보를 활용하구요.
권력을 즐기거나 권력을 유지한다는 의미보다는 이런 권력과 지식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사회 지도층이 교육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배우는 것, 지식에 대한 접근이 생산성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사회에서는 오히려 소비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교육과 문화가 있어왔는데 어떤 접근이 좀 더 문명에 이로울런지 그런 생각이 이어지네요.
다른 분들 설명이 없어서 알못인 제가 나섭니다 ㅋㅋ
이건 일단 푸코가 살았던 2차대전 종전-냉전기까지의 프랑스의 지적 정치구도를 알아야 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요. 종전 후 독일로부터 해방된 프랑스는 마치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한국처럼 좌파와 우파의 강력한 대립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치면 김일성파(프랑스 공산당)와 이승만파(드골파)가 중도연합(프랑스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과 더불어 한 나라 안에 공존하며 갈등을 벌이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차이라면 한국은 분단이 되고 내전을 치렀던 반면 프랑스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당시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들은 2차대전 당시 레... 더 보기
이건 일단 푸코가 살았던 2차대전 종전-냉전기까지의 프랑스의 지적 정치구도를 알아야 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요. 종전 후 독일로부터 해방된 프랑스는 마치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한국처럼 좌파와 우파의 강력한 대립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치면 김일성파(프랑스 공산당)와 이승만파(드골파)가 중도연합(프랑스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과 더불어 한 나라 안에 공존하며 갈등을 벌이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차이라면 한국은 분단이 되고 내전을 치렀던 반면 프랑스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당시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들은 2차대전 당시 레... 더 보기
다른 분들 설명이 없어서 알못인 제가 나섭니다 ㅋㅋ
이건 일단 푸코가 살았던 2차대전 종전-냉전기까지의 프랑스의 지적 정치구도를 알아야 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요. 종전 후 독일로부터 해방된 프랑스는 마치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한국처럼 좌파와 우파의 강력한 대립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치면 김일성파(프랑스 공산당)와 이승만파(드골파)가 중도연합(프랑스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과 더불어 한 나라 안에 공존하며 갈등을 벌이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차이라면 한국은 분단이 되고 내전을 치렀던 반면 프랑스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당시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들은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주축이었습니다. 독립군이다 이거죠. 그래서 도덕적 정통성을 상당 부분 확보하고 있었어요. 이들의 눈에는 프랑스 사회는 겨우 해방만 되었지 아직 청산해야할 적폐가 한창 산적한 인습적인 체제에 매여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개혁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소련 공산당과 공조하면서도 프랑스의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이들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진보적 논의의 중심에 있던 것이 사르트르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란 곧 프랑스식 사회주의이고 한국으로 치면 주체사상입니다. 이게 50년대를 지배하던 분위기죠.
근데 60년대가 되고 권위주의적인 드골의 제5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좌파들이 헤게모니에서 밀리자..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좌파의 논의에 대해 이대로는 안 된다며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실존주의는 너무 단순하지 않냐, 그러니까 드골에게 발리는 거 아니냐 이거죠.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되어 자유와 해방을 외치며 단결 투쟁하자는 사르트르류의 주장은 한 마디로 '하면 된다'입니다. 우리가 옳고 옳기 위해 노력하는데 안 될 게 무어냐 세계를 변혁하자 근성으로 파파팍! 이런 단호한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 사회란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인간은 기성 사회의 구조 속에서 예속되어 있는 무비판적 존재이기에 사르트르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으며 체제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의 작동 방식을 정교하게 분석하는 게 우선이라는 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의 입장을 [구조주의]라고 하죠. 이런 구조주의자들의 이론적 도전은 상당히 성과를 거둬서 60년대 중반 즈음 되면 사르트르는 거의 퇴물로 잊혀지게 됩니다.
근데..그 유명한 68 운동이 이런 구조주의식의 '냉정한' 접근법, 인간은 체제의 톱니바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체의 단결을 논하는 것은 사르트르 같은 좌파 지식인들의 오만이며 국으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회의적인 입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68운동이 벌어지는 걸 보아하니 대중들은 구조주의자들의 생각보다 자유롭고 열정적이고 해방적인 존재였다는 것이죠. 게다가 한편으로 자신들의 손익과 타산에 따라서 때로는 좌파들의 손을 들어주기도 때로는 우파들의 손을 들어주기도 할 만큼 빠르게 입장을 변화할 수 있었고, 운동권들이 자신들을 지휘하며 이끄는 데에 엄청난 반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구조주의자들의 생각보다 현실은 훨씬 역동적이었습니다. 반대로 실존주의자들이 생각한 것만큼 단순하지도 않았죠. 때로는 페미니즘을, 때로는 동성애를, 때로는 환경을, 때로는 락과 마약을, 때로는 질서와 안정을, 때로는 경제 성장을 요구하며 변화무쌍하게 표출되는 민의는 하면 된다는 실존주의vs기계적 구조주의라는 논쟁 구도에는 포괄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6월 항쟁의 에너지가 노태우의 당선과 3당합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혹은 00년대 후반과 10년대 초반 당시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시위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테고요. 박근혜 몰아낼 때는 대동단결 했지만 불과 몇 년 못 가 좌충우돌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죠.
그렇게 68운동의 열기가 프랑스 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서 70년대로 넘어갑니다. 이제 좌파들의 과제는 68운동 당시 자신들이 경험했던 사회와 현실과 한계를 진보적 논의에 반영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더 이상 50년대의 실존주의도 60년대의 구조주의도 답이 되지 못하니 새로운 논의를 짜야 하는 거죠. 우리는 프랑스가 수구 꼴통들에게 억압받는 낙후된 사회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유롭네? 자본가들 지배자들 압제 속에 노동자들 피지배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68을 하네? 심지어 우리가 통제할 수도 없을 정도네? 이거 공산당으로 대동단결하자 사회주의 혁명으로 세계를 변혁하자는 식의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해법이 안 되는 거 아닌가? 저렇게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하는데 피지배자라고 불쌍하게 여기는 게 말이 됨?
이때 공산주의에 니체를 한 스푼 섞어 보면 어떨까? 하고 나온 게 푸코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위와 아래로 사회가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아래에 깔려 있는 하층민 프롤레타리아들이 자본가 부르주아들을 효수해서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죠. 반면 니체의 관점에서는 모든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실현하고 생명력을 발휘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유로운 개개인이 존재할 뿐입니다. 68운동 당시 드러났던 프랑스 사회를 설명하는 데에는 니체가 더 적절한 데가 있었고요. 권력은 드골이나 청와대나 삼성이 휘두르는 게 아니라 5천만 6천만 사이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모든 관계망 속에 다 내재되어 있는 거죠.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엄마와 자식 사이에도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의사화 환자 사이에도 교사와 학생 사이에도 마트 캐셔와 손님 사이에도 예술가와 독자 사이에도 권력은 존재하고 세상 모든 게 권력이기에 누구도 권력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거죠. 심지어 권력 타파를 외치는 혁명 세력 역시 일종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고, 체제의 일부로서 행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반자본주의 메시지를 담은 티셔츠야말로 가장 훌륭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성품인 것처럼요. 이런 푸코를 비롯하여 70년대의 [포스트 구조주의]로 프랑스의 담론이 선회하게 됩니다.
이런 푸코의 주장은 '아직도 프랑스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는 아니야 적폐 청산이 필요해'라는 전통적인 좌파의 입장과 '적폐는 아군과 적군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거야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착한 계급 나쁜 계급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어'라는 시민사회적인 입장 사이의 일종의 절충이었습니다. 양쪽 모두 불만이 생길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양쪽 모두 푸코의 논의를 차용할 수 있었죠. 좌파들은 '이거 봐 푸코도 우리 사회가 완전하게 자유롭진 않다고 했어 오히려 예전처럼 총칼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지식과 돈과 소비와 여가와 가정 같은 걸로 섬세하게 지배하는 게 더 세련된 억압이지 이런 마당에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야'라고 말할 수 있었고 자유주의자들은 '이거 봐 푸코도 좌우가 중요한 게 아니고 상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관계와 충돌과 상호작용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잖아 쉰내나는 운동권들 아웃!'이라고 말할 수 있었죠. 이런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자들, 여성주의자들, 환경주의자들, 성소수자들, 장애운동가들 등등 너나 할 것 없이 푸코의 관점을 참고하게 됩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미시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권력이 뭔지, 가령 성폭력 같은 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말할 때 푸코를 인용하면 엄청 편해지니까요.
대충 맥락은 이렇고.. 여튼 이와 같은 푸코식 사유에서 지식은 권력 그 자체가 됩니다. 권력의 부분집합이나 도구가 아니라 지식이 곧 권력의 동의어인 거죠. 이건 '그 어떤 학문도 객관적이지 않으며 당파성을 띠고 권력으로서 작용하며 비정치적일 수 없다'는 입장으로 이어집니다. 현대인에게 아주 익숙한 지식사회학적 논의죠.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예는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에서 유럽 학자들이 행한 문헌학이나 비교언어학, 지리학, 역사학, 신화학, 종교 등에 대한 연구입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로 침투하고 행정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한 작업이 저런 '객관적 학문'의 방법론으로 식민지를 연구한 것이거든요. 이런 과학적 학문들은 제국이 식민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하면서 식민 통치에 조력했습니다. 이에 참여한 학자들이나 선교사들이 다 식민통치를 긍정했던 것은 아니예요.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학문을 위해서 과학을 위해서 중립적 연구를 위해서 혹은 때로는 식민지를 위해서 그런 연구를 성실하게 수행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 성과들은 식민지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졌고요. 그래서 지금조차도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대규모 식민지를 경영한 제국들이 피식민국가들 이상으로 그들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가령 나이지리아 학자가 나이지리아의 전통 민족의 관습이나 습속이나 전승 같은 걸 연구하려면 일단 영국 유학 가서 나이지리아에 대해 배워야 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는 거죠.
이게 마냥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지금도 일제시대 시기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치면 일본 학계가 한국 학계보다 훨씬 유리하거든요. 일제시대에 일본 정부가 작성한 원자료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저런 자료들이 꼭 정치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들이 아닙니다. 그냥 말 그대로 당시의 행정 명령, 통계 조사, 공문서 이런 것들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건조한' 사실관계를 보여주는 정보들이 그저 양국 관계에서 중립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권력으로 작용하죠. 이런 지점에 초점을 맞춰서 푸코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고요. 서양이 생각하는 동양, 서양인이 생각하는 동양인이란 게 무언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8719.html
이러한 사실은 '객관'과 '과학'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중심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지배자와 인싸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주변에 있으면 권력이 없으면 소외되어 있으면 객관을 논할 수가 없다는 거고요. 이걸 역사적으로 파헤치는 푸코식의 방법론이 [계보학]인 건데 말하자면 누가 지식의 이름으로 권력을 동원해서 족보를 바꿔치기하고 왜곡을 행했는지를 세세하게 따져 보자는 거죠. 이 역시도 니체가 기독교식 도덕이 족보 바꿔치기를 통해 실제 인간의 삶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한 것에서 빌려온 방법론이고요.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711
이게 한국 불교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보여주는 기사인데, 푸코의 관점을 통속적으로 바꾸면 대충 이 비슷한 게 됩니다.
이건 일단 푸코가 살았던 2차대전 종전-냉전기까지의 프랑스의 지적 정치구도를 알아야 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요. 종전 후 독일로부터 해방된 프랑스는 마치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한국처럼 좌파와 우파의 강력한 대립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치면 김일성파(프랑스 공산당)와 이승만파(드골파)가 중도연합(프랑스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과 더불어 한 나라 안에 공존하며 갈등을 벌이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차이라면 한국은 분단이 되고 내전을 치렀던 반면 프랑스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당시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들은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주축이었습니다. 독립군이다 이거죠. 그래서 도덕적 정통성을 상당 부분 확보하고 있었어요. 이들의 눈에는 프랑스 사회는 겨우 해방만 되었지 아직 청산해야할 적폐가 한창 산적한 인습적인 체제에 매여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개혁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소련 공산당과 공조하면서도 프랑스의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이들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진보적 논의의 중심에 있던 것이 사르트르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란 곧 프랑스식 사회주의이고 한국으로 치면 주체사상입니다. 이게 50년대를 지배하던 분위기죠.
근데 60년대가 되고 권위주의적인 드골의 제5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좌파들이 헤게모니에서 밀리자..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좌파의 논의에 대해 이대로는 안 된다며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실존주의는 너무 단순하지 않냐, 그러니까 드골에게 발리는 거 아니냐 이거죠.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되어 자유와 해방을 외치며 단결 투쟁하자는 사르트르류의 주장은 한 마디로 '하면 된다'입니다. 우리가 옳고 옳기 위해 노력하는데 안 될 게 무어냐 세계를 변혁하자 근성으로 파파팍! 이런 단호한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 사회란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인간은 기성 사회의 구조 속에서 예속되어 있는 무비판적 존재이기에 사르트르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으며 체제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의 작동 방식을 정교하게 분석하는 게 우선이라는 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의 입장을 [구조주의]라고 하죠. 이런 구조주의자들의 이론적 도전은 상당히 성과를 거둬서 60년대 중반 즈음 되면 사르트르는 거의 퇴물로 잊혀지게 됩니다.
근데..그 유명한 68 운동이 이런 구조주의식의 '냉정한' 접근법, 인간은 체제의 톱니바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체의 단결을 논하는 것은 사르트르 같은 좌파 지식인들의 오만이며 국으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회의적인 입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68운동이 벌어지는 걸 보아하니 대중들은 구조주의자들의 생각보다 자유롭고 열정적이고 해방적인 존재였다는 것이죠. 게다가 한편으로 자신들의 손익과 타산에 따라서 때로는 좌파들의 손을 들어주기도 때로는 우파들의 손을 들어주기도 할 만큼 빠르게 입장을 변화할 수 있었고, 운동권들이 자신들을 지휘하며 이끄는 데에 엄청난 반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구조주의자들의 생각보다 현실은 훨씬 역동적이었습니다. 반대로 실존주의자들이 생각한 것만큼 단순하지도 않았죠. 때로는 페미니즘을, 때로는 동성애를, 때로는 환경을, 때로는 락과 마약을, 때로는 질서와 안정을, 때로는 경제 성장을 요구하며 변화무쌍하게 표출되는 민의는 하면 된다는 실존주의vs기계적 구조주의라는 논쟁 구도에는 포괄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6월 항쟁의 에너지가 노태우의 당선과 3당합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혹은 00년대 후반과 10년대 초반 당시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시위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테고요. 박근혜 몰아낼 때는 대동단결 했지만 불과 몇 년 못 가 좌충우돌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죠.
그렇게 68운동의 열기가 프랑스 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서 70년대로 넘어갑니다. 이제 좌파들의 과제는 68운동 당시 자신들이 경험했던 사회와 현실과 한계를 진보적 논의에 반영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더 이상 50년대의 실존주의도 60년대의 구조주의도 답이 되지 못하니 새로운 논의를 짜야 하는 거죠. 우리는 프랑스가 수구 꼴통들에게 억압받는 낙후된 사회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유롭네? 자본가들 지배자들 압제 속에 노동자들 피지배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68을 하네? 심지어 우리가 통제할 수도 없을 정도네? 이거 공산당으로 대동단결하자 사회주의 혁명으로 세계를 변혁하자는 식의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해법이 안 되는 거 아닌가? 저렇게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하는데 피지배자라고 불쌍하게 여기는 게 말이 됨?
이때 공산주의에 니체를 한 스푼 섞어 보면 어떨까? 하고 나온 게 푸코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위와 아래로 사회가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아래에 깔려 있는 하층민 프롤레타리아들이 자본가 부르주아들을 효수해서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죠. 반면 니체의 관점에서는 모든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실현하고 생명력을 발휘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유로운 개개인이 존재할 뿐입니다. 68운동 당시 드러났던 프랑스 사회를 설명하는 데에는 니체가 더 적절한 데가 있었고요. 권력은 드골이나 청와대나 삼성이 휘두르는 게 아니라 5천만 6천만 사이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모든 관계망 속에 다 내재되어 있는 거죠.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엄마와 자식 사이에도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의사화 환자 사이에도 교사와 학생 사이에도 마트 캐셔와 손님 사이에도 예술가와 독자 사이에도 권력은 존재하고 세상 모든 게 권력이기에 누구도 권력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거죠. 심지어 권력 타파를 외치는 혁명 세력 역시 일종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고, 체제의 일부로서 행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반자본주의 메시지를 담은 티셔츠야말로 가장 훌륭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성품인 것처럼요. 이런 푸코를 비롯하여 70년대의 [포스트 구조주의]로 프랑스의 담론이 선회하게 됩니다.
이런 푸코의 주장은 '아직도 프랑스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는 아니야 적폐 청산이 필요해'라는 전통적인 좌파의 입장과 '적폐는 아군과 적군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거야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착한 계급 나쁜 계급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어'라는 시민사회적인 입장 사이의 일종의 절충이었습니다. 양쪽 모두 불만이 생길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양쪽 모두 푸코의 논의를 차용할 수 있었죠. 좌파들은 '이거 봐 푸코도 우리 사회가 완전하게 자유롭진 않다고 했어 오히려 예전처럼 총칼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지식과 돈과 소비와 여가와 가정 같은 걸로 섬세하게 지배하는 게 더 세련된 억압이지 이런 마당에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야'라고 말할 수 있었고 자유주의자들은 '이거 봐 푸코도 좌우가 중요한 게 아니고 상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관계와 충돌과 상호작용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잖아 쉰내나는 운동권들 아웃!'이라고 말할 수 있었죠. 이런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자들, 여성주의자들, 환경주의자들, 성소수자들, 장애운동가들 등등 너나 할 것 없이 푸코의 관점을 참고하게 됩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미시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권력이 뭔지, 가령 성폭력 같은 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말할 때 푸코를 인용하면 엄청 편해지니까요.
대충 맥락은 이렇고.. 여튼 이와 같은 푸코식 사유에서 지식은 권력 그 자체가 됩니다. 권력의 부분집합이나 도구가 아니라 지식이 곧 권력의 동의어인 거죠. 이건 '그 어떤 학문도 객관적이지 않으며 당파성을 띠고 권력으로서 작용하며 비정치적일 수 없다'는 입장으로 이어집니다. 현대인에게 아주 익숙한 지식사회학적 논의죠.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예는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에서 유럽 학자들이 행한 문헌학이나 비교언어학, 지리학, 역사학, 신화학, 종교 등에 대한 연구입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로 침투하고 행정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한 작업이 저런 '객관적 학문'의 방법론으로 식민지를 연구한 것이거든요. 이런 과학적 학문들은 제국이 식민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하면서 식민 통치에 조력했습니다. 이에 참여한 학자들이나 선교사들이 다 식민통치를 긍정했던 것은 아니예요.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학문을 위해서 과학을 위해서 중립적 연구를 위해서 혹은 때로는 식민지를 위해서 그런 연구를 성실하게 수행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 성과들은 식민지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졌고요. 그래서 지금조차도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대규모 식민지를 경영한 제국들이 피식민국가들 이상으로 그들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가령 나이지리아 학자가 나이지리아의 전통 민족의 관습이나 습속이나 전승 같은 걸 연구하려면 일단 영국 유학 가서 나이지리아에 대해 배워야 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는 거죠.
이게 마냥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지금도 일제시대 시기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치면 일본 학계가 한국 학계보다 훨씬 유리하거든요. 일제시대에 일본 정부가 작성한 원자료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저런 자료들이 꼭 정치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들이 아닙니다. 그냥 말 그대로 당시의 행정 명령, 통계 조사, 공문서 이런 것들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건조한' 사실관계를 보여주는 정보들이 그저 양국 관계에서 중립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권력으로 작용하죠. 이런 지점에 초점을 맞춰서 푸코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고요. 서양이 생각하는 동양, 서양인이 생각하는 동양인이란 게 무언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8719.html
이러한 사실은 '객관'과 '과학'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중심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지배자와 인싸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주변에 있으면 권력이 없으면 소외되어 있으면 객관을 논할 수가 없다는 거고요. 이걸 역사적으로 파헤치는 푸코식의 방법론이 [계보학]인 건데 말하자면 누가 지식의 이름으로 권력을 동원해서 족보를 바꿔치기하고 왜곡을 행했는지를 세세하게 따져 보자는 거죠. 이 역시도 니체가 기독교식 도덕이 족보 바꿔치기를 통해 실제 인간의 삶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한 것에서 빌려온 방법론이고요.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711
이게 한국 불교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보여주는 기사인데, 푸코의 관점을 통속적으로 바꾸면 대충 이 비슷한 게 됩니다.
근대 역사철학 수업 듣는듯 정리가 쏙 되고 특히나 프랑스의 사상과 근대 사회운동을 살펴보는 것이 배경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군요. 저는 푸코의 아이디어 개개인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점조직처럼 우리 사회에 연결되어서 권력이 어느 계층 어디에서든지 행사한다는데에 크게 공감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식민주의로 연결되어서 지식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쓰이는 점에도 주목해볼 수 있을 듯 하고 우리 사회 기득권과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기득권 제도들에 염증이 나거든요.
특히나 위에 인도석학이나 한겨레기사에서 처럼 오리엔탈리즘 식민지 이후... 더 보기
특히나 위에 인도석학이나 한겨레기사에서 처럼 오리엔탈리즘 식민지 이후... 더 보기
근대 역사철학 수업 듣는듯 정리가 쏙 되고 특히나 프랑스의 사상과 근대 사회운동을 살펴보는 것이 배경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군요. 저는 푸코의 아이디어 개개인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점조직처럼 우리 사회에 연결되어서 권력이 어느 계층 어디에서든지 행사한다는데에 크게 공감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식민주의로 연결되어서 지식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쓰이는 점에도 주목해볼 수 있을 듯 하고 우리 사회 기득권과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기득권 제도들에 염증이 나거든요.
특히나 위에 인도석학이나 한겨레기사에서 처럼 오리엔탈리즘 식민지 이후의 식민정책등을 제외하더라도 미국 또는 서구권내에서 탈세계적으로 현재 일어나는 같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부류들 (소위 기득권대의 공감대) 가 현대사회를 유지하는 큰 구심점일텐데요. 좀 더 휴머니스틱하게 전체를 위하여 과연 이 방법이 맞는건지 잘모르겠어요. 아마도 푸코도 답은 모름이라고 결론내지 않았나 싶은데요.
참..마지막으로 이런 지식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는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해요.
이전에 대학교수나 석학들의 수업, MBA 자료가 한정된 이들에게만 접근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인터넷 이후 변화로 집에서의 모든 정보에 대한 접근이 비교적 용이한것...내지는 역시나 경제논리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반면에 고급정보에 대한 fee 를 물리는 것들에 대해서 좀 더 사회나 국가가 발빠르게 대처하거나 공익을 위해서 정책적으로 규제내지는 공공제로 풀어 놓을때 좀 더 투자가 되고 사회가 유연하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시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당장 일에 도움이 되는 트래이닝 코스들 200-300불씩 내고 들어야하는 것이 생각이 나거든요.
복검님 국회로 나가셔서 ...일 좀 해 주시길!!! ㅎㅎㅎ 댓글 무척 감사합니다.
특히나 위에 인도석학이나 한겨레기사에서 처럼 오리엔탈리즘 식민지 이후의 식민정책등을 제외하더라도 미국 또는 서구권내에서 탈세계적으로 현재 일어나는 같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부류들 (소위 기득권대의 공감대) 가 현대사회를 유지하는 큰 구심점일텐데요. 좀 더 휴머니스틱하게 전체를 위하여 과연 이 방법이 맞는건지 잘모르겠어요. 아마도 푸코도 답은 모름이라고 결론내지 않았나 싶은데요.
참..마지막으로 이런 지식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는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해요.
이전에 대학교수나 석학들의 수업, MBA 자료가 한정된 이들에게만 접근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인터넷 이후 변화로 집에서의 모든 정보에 대한 접근이 비교적 용이한것...내지는 역시나 경제논리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반면에 고급정보에 대한 fee 를 물리는 것들에 대해서 좀 더 사회나 국가가 발빠르게 대처하거나 공익을 위해서 정책적으로 규제내지는 공공제로 풀어 놓을때 좀 더 투자가 되고 사회가 유연하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시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당장 일에 도움이 되는 트래이닝 코스들 200-300불씩 내고 들어야하는 것이 생각이 나거든요.
복검님 국회로 나가셔서 ...일 좀 해 주시길!!! ㅎㅎㅎ 댓글 무척 감사합니다.
객관적인 지식, 상식, 통념, 개념, 법, 규율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사실은 개개인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당파적 수단이라는 게 모두에게 알려지면 그 순간 지식이 가지고 있는 힘은 휘발되어버리니까요. 거창하게 정치적인 것만 생각하면 논의가 좀 협소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일상에서 예시를 찾자면, '관우 아세요?' 같은 것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관우 아세요 파는 아마도 '아니 말로야 삼국지가 걍 소설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독서량 일정 이상 되는 사람 치고 삼국지 부분적으로라도 안 접해 본 경우는 찾기 어렵다. 관우 정... 더 보기
객관적인 지식, 상식, 통념, 개념, 법, 규율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사실은 개개인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당파적 수단이라는 게 모두에게 알려지면 그 순간 지식이 가지고 있는 힘은 휘발되어버리니까요. 거창하게 정치적인 것만 생각하면 논의가 좀 협소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일상에서 예시를 찾자면, '관우 아세요?' 같은 것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관우 아세요 파는 아마도 '아니 말로야 삼국지가 걍 소설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독서량 일정 이상 되는 사람 치고 삼국지 부분적으로라도 안 접해 본 경우는 찾기 어렵다. 관우 정도면 신문이나 방송이나 교과서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언급되는 객관적 지식의 일부다. 관우도 모르는 사람이 뭐 영국이 섬인 줄은 알고 살겠냐'라고 주장할 겁니다. 근데 이때,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화타라는 사람이 '에휴 삼국지빠들이 여기에도 자기네들 깃발 꽂고 나와바리라고 우기려고 관우로 간 보는 거네. 요즘 애들은 삼국지 안 읽거든요? 틀딱들이 천년만년 자기네 세상일 줄 아나 맨날 관우가 어쩌고 삼삼좌가 어쩌고 무슨 커뮤 전세 낸 것마냥 떠들고 쌌네'라고 하면 기가 죽는 거죠. 왜냐하면 화타가 '사람들이 관우는 상식이라면서 관우 아냐고 묻고 다니지만 사실은 그건 철지난 삼국지를 아직까지 상식의 이름으로 주류에 밀어올리면서 위세를 과시하려는 삼국지빠들의 담론장 독점욕이 반영된 거다'라고 정곡을 찌른 거니까요. 이런 식으로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에서도 다양한 관계의 그물 사이사이에서 개개인이 서로 선문답 던지고 내외하고 세련된 수사를 주고 받으며 나 잡아 봐라 하는 식으로 권력 게임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누구나 [욕망]이 있으니까요. 푸코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욕망이라는 양성적인 기제가 계급 사이의 억압이라는 음성적인 기제보다 우선하기 때문에(전자가 곧 니체고 후자가 곧 막시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는 권력=지식 역시도 포지티브한 대상이 되는 거고요. 객관적인 권력=지식과 지식 따위는 없으며 그저 포지티브하게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명분만 그럴 듯하게 빌려온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똑같다는 게 밝혀지면 그 순간 폭동이 발생하는 거죠. 조국의 입시 비리가 까발려졌을 때 평범한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조국의 포지티브한 가정의 번영욕이 드러나고 그 전까지 청와대가 내세운 윤리적 명분은 대세를 쟁탈하고자 유행을 범람시켜 여론압을 형성하는 식으로 창조된 것으로 밝혀지는 것처럼. 공권력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들의 입소문과 대세론과 통념과 상식,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말과 글과 언어와 지식이야말로 진짜 무서운 광장의 권력이라는 것이 푸코가 의도한 바고, 그럼 그걸 누가 어떤 식으로 몰래몰래 그 명분을 선점하고 있는가가 관건이 되는 것이죠.
저는 철학 전공은 아니고 사회학 전공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푸코의 지식-권력은 미시세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특징을 기술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아는 것이 곧 힘이다라는 의미가 아니었지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현대사회에 들어서 의료적 지식이 대중들 속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행위가 몸에 좋은지, 어떤 행위가 해로운지 등을 대체로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상적인 몸매 유지를 위한 운동과 자기 관리 등이 있지요. 이런 사회에서 우리들은 좋은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규제하기 시작합니다. 이 행동은 해도 되는... 더 보기
저는 철학 전공은 아니고 사회학 전공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푸코의 지식-권력은 미시세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특징을 기술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아는 것이 곧 힘이다라는 의미가 아니었지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현대사회에 들어서 의료적 지식이 대중들 속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행위가 몸에 좋은지, 어떤 행위가 해로운지 등을 대체로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상적인 몸매 유지를 위한 운동과 자기 관리 등이 있지요. 이런 사회에서 우리들은 좋은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규제하기 시작합니다. 이 행동은 해도 되는 행동이고 선한 행동이야, 저 행동은 해선 안 되고 악한 행동이야, 이런 식으로요. 권력자가 지식이라는 수단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그 자체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사회에 넓게 퍼진 지식은 그 자체가 권력이며, 구성원들끼리의 감시와 처벌을 통해 작동합니다. COVID-19 시국에 마스크를 쓰라는 그 엄중한 지시는 대체 우리에게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시면 그게 푸코의 지식-권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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