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 게시판입니다.
Date 15/10/31 02:00:09
Name   kpark
Subject   노경은의, 노경은에 의한,노경은을 위한 하루(KS 4차전)
2승 1패로 시리즈 우위를 점한 두산, 1승 2패로 한층 힘겨워진 삼성.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 한 쪽이 궁지에 몰리거나 한숨 돌리고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일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양 팀의 선발 투수는 그런 경기의 무게감과 달리 한쪽으로 쏠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4차전 선발 매치업: 피가로(삼성) vs 이현호(두산)]

삼성은 1차전 선발 피가로를 3일만 쉬게 한 뒤 다시 내보냈습니다. 선발 투수는 통상 4일~5일 간 휴식을 취해야 이전 등판의 피로가 풀립니다. 그러나 '도박 파문'으로 인해 쓸만한 선발이 부족했던 삼성은 한국시리즈를 위해 짧은 휴식 후 에이스를 내보내는 강수를 뒀습니다.

삼성의 선발 피가로가 현재 삼성 측에서 가장 강한 카드였던 반면, 두산이 낸 이현호는 그다지 기대가 되지 않는 카드였습니다. 2011년 입단해 이제 5년차인 이현호는 올해가 사실상 데뷔 첫 해나 마찬가지였고, 딱히 낼 만한 선발이 없던 두산에서 복권 긁듯이 내놓은 패였습니다.

경기는 초반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이현호가 처음부터 고비를 만나는 흐름으로 전개됐습니다. 1회 볼넷-안타로 자초한 무사 12루 위기를 병살타로 잘 넘겼지만, 2회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3실점했습니다. 끝내 이닝을 마치지 못한 이현호는 32구만 던진 채, 2회 2아웃에서 교체됐습니다. 선취점을 따낸 두산이지만 곧바로 역전을 허용하며 좋지 않은 흐름을 탑니다. 점수는 3:2 삼성의 리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내려가는 이현호...]

뒤이어 올라온 노경은 역시 그렇게 듬직한 투수처럼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반전이 시작됩니다. 노경은이 8회 1아웃까지, 무려 5.2이닝을 장판파 틀어막듯이 지켜낸 것입니다.

노경은의 호투를 그 누가 예상했을까요? 올해 47경기에서 1승 4패 4.47 ERA(평균자책점)를 기록한 게 전부인, 지난해 109.2이닝을 던지면서 9.03이란 끔찍한 ERA를 기록한 투수가, 최강 삼성 타선을 상대로 한 점도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요.

노경은이 그렇게 태산같이 두산의 마운드를 지키는 동안, 타자들은 4회/5회 연달아 한 번씩 득점을 올리며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8회 1아웃, 볼넷을 허용한 뒤 교체된 노경은의 뒤를 이현승이 잘 책임져줬습니다. 최후의 순간 삼성이 만루를 만들며 끈질기게 쫓아갔지만 승부는 거기까지였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노경은총'이었습니다.]

사실 2회 노경은이 올라왔을 때만 하더라도 저는 거의 두산의 '버리는 카드'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뒤이어 승리조 계투진들이 몸을 풀기 전까지 잠시 바통을 이어받는 역할, 소위 땜빵 수준이라고만요.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노경은은 2012년 이후 너무도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으니까요. 단순히 받아든 성적표 뿐만 아니라 경기 내용을 봐도, 날카롭게 휘면서 타자의 방망이를 '갈아버릴 것 같은' 슬라이더가 계속 한가운데로 가면서 배팅볼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노경은은 승부의 분수령이 될 수 있었던, 1년 농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고비에서 자신의 역할을 100배 다했습니다.

5.2이닝 2피안타 2볼넷 5탈삼진 무실점(92구). 노경은의 2015년 최다 투구, 최다 이닝 경기였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못했던 자신의 임무를 오늘 하루로 완전히 다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기가 끝난 후 노경은은 '아무것도 못해 비참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의 야구인생은 다른 많은 2류 선수들과 같이 굴곡이 져 있었습니다. 기대가 큰 유망주로 들어왔지만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꽃을 피우지 못했고, 오히려 팬들과 언쟁을 벌이면서 아래로 아래로 침잠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2011년 팀의 마당쇠 역할을 맡으며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2012년 선발로 전향하며 커리어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허나 그렇게 지난 날의 인내를 보상받는가 했던 순간, 2013년 한번 부진한 뒤 2014년 2군 선수 수준의 부진을 겪으며 다시 빛이 바래는 듯 했습니다.

노경은은 올해 정말 큰 부침을 겪었습니다. 단순히 성적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그의 인생 자체가 그랬습니다. 선발에서 마무리로 보직을 변경했고, 성적이 좋아지는 듯 했으나 다시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모친의 병환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게 알려졌고, 6월 하순 결국 어머니를 하늘로 떠나보내며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사실 모친상 이후에 노경은의 성적이 크게 나아졌다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만화처럼 어깨의 무거운 짐을 털어버리고 각성하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런 일이 1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만약 두산이 우승을 한다면, 오늘 경기에서 노경은이 지워버린 5와 2/3 이닝은 그의 2015년 전체를 대변하는 사건이 될 겁니다.

아무것도 못해 비참했다던 그는, 심장이 아찔해졌던 파울홈런을 두고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 도와주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정말로 그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로 먼저 가신 어머니에게 닿은 걸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그가 하늘에다 무슨 소원을 바라도 이뤄졌을 것 같은 - 노경은의, 노경은에 의한, 노경은을 위한 하루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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