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머가 아닌 펌글, 영상 등 가볍게 볼 수 있는 글들도 게시가 가능합니다.
- 여러 회원들이 함께 사용하기 위해 각 회원당 하루 5개로 횟수제한이 있습니다.
- 특정인 비방성 자료는 삼가주십시오.
Date 21/07/24 01:25:11
Name   Ulsan_Whale
File #2   output_33591781.jpg (133.5 KB), Download : 37
Subject   그 애.txt


   우리는 개천쪽으로 문이 난 납작한 집들이 개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선 누구나 그렇듯 그 애와 나도 가난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번번히 월급이 밀리는 시원찮은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그 애의 아버지는 한쪽 안구에 개 눈을 박아넣고 지하철에서 구걸을 했다. 내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아놓은 개구리 인형에 눈을 박았다. 그 애의 어머니는 청계천 골목에서 커피도 팔고 박카스도 팔고 이따금 곱창집 뒷 방에서 몸도 팔았다. 우리집은 네 가족이 방 두개짜리 전세금에 쩔쩔맸고, 그 애는 화장실 옆 천막을 치고 아궁이를 걸어 간이부엌을 만든 하코방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이날 탕수육을 못 먹고 짜장면만 먹는다고 울었고, 그 애는 엄마가 외박하는 밤이면 아버지의 허리띠를 피해서 맨발로 포도를 다다다닥 달렸다. 말하자면 그렇다. 우리집은 가난했고, 그 애는 불행했다. 

가난한 동네는 국민학교도 작았다. 우리는 4학년때 처음 한 반이 되었다. 우연히 그 애 집을 지나가다가 길가로 훤히 드러나는 아궁이에다 라면을 끓이는 그 애를 보았다. 그 애가 입은 늘어난 러닝셔츠엔 김치국물이 묻어있었고 얼굴엔 김치국물 같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눈싸움인지 서로를 노려보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니네부엌 뽑기만들기에 최고다. 나는 집에서 국자와 설탕을 훔쳐왔고, 국자바닥을 까맣게 태우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사정이 좀 풀려서 우리집은 서울 반대편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친척이 소개시켜준 회사에 나갔다. 월급은 밀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부업을 그만두었다. 나는 가끔 그 애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에는 일년동안 쓴 딱딱한 커버의 일기장을 그 애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 애는 얇은 공책을 하나 보냈다. 일기는 몇 장 되지 않았다. 3월 4일 개학했다. 선생님한테 맞았다. 6월 1일 딸기를 먹었다. 9월 3일 누나가 아파서 아버지가 화냈다. 11월 4일 생일이다. 그 애는 딸기를 먹으면 일기를 썼다. 딸기를 먹는 것이 일기를 쓸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 애 아버지는 그 애 누나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그 애는 이따금 캄캄한 밤이면 아무 연립주택이나 문 열린 옥상에 올라가 스티로플에 키우는 고추며 토마토를 따버린다고 편지에 썼다. 이제 담배를 배웠다고 했다. 나는 새로 들어간 미술부며 롯데리아에서 처음 한 미팅 따위에 대해 썼다. 한번 보자, 만날 얘기했지만 한번도 서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어느날 그 애의 편지가 그쳤고, 나는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고3 생일에 전화가 왔다. 우리는 피맛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생일선물이라며 신라면 한 박스를 어깨에 메고 온 그 애는 왼쪽다리를 절뚝거렸다. 오토바이 사고라고 했다. 라면은 구멍가게 앞에서 쌓인 것을 그냥 들고날랐다고 했다. 강변역 앞에서 삐끼한다고 했다. 놀러오면 서비스 기차게 해줄께. 얼큰하게 취해서 그 애가 말했다. 아냐. 오지마. 우울한 일이 있으면 나는 그 애가 준 신라면을 하나씩 끓여먹었다. 파도 계란도 안 넣고. 뻘겋게 취한 그 애의 얼굴같은 라면국물을. 

나는 미대를 졸업했고 회사원이 되었다. 어느날 그 애가 미니홈피로 찾아왔다. 공익으로 지하철에서 자살한 사람의 갈린 살점을 대야에 쓸어담으면서 2년을 보냈다고 했다. 강원도 어디 도살장에서 소를 잡으면서 또 2년을 보냈다고 했다. 하루에 몇백마리 소머리에 징을 내리치면서, 하루종일 탁주와 핏물에 젖어서. 어느날 은행에 갔더니 모두 날 피하더라고. 옷은 갈아입었어도 피냄새가 베인거지. 그날 밤 작업장에 앉아있는데 소머리들이 모두 내 얼굴로 보이데.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 애는 술집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나직하게, 나는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는 걸까. 

그 애가 다단계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나지마. 국민학교때 친구 하나가 전화를 해주었다. 그 애 연락을 받고, 나는 옥장판이나 정수기라면 하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직하고 집에 내놓은 것도 없으니 이 참에 생색도 내고. 그 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면 가끔 만나서 술을 마셨다. 추운 겨울엔 오뎅탕에 정종.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천의 어느 물류창고에 직장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등학교때 정신을 놓아버린 그 애의 누나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홀아비에게 재취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애가 둘인데 다 착한가봐. 손찌검도 안하는 거 같고. 월급은 적어. 그래도 월급 나오면 감자탕 사줄께. 

그 애는 물류창고에서 트럭에 치여 죽었다. 27살이었다. 

그 애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였다. 한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우리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손도 잡은 적 없지만 그 애의 작고 마른 몸을 안고 매일 잠이 드는 상상도 했다. 언젠가. 난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을까. 그 말 뒤에 그 애는 조용히 그러니까 난 소중한 건 아주 귀하게 여길꺼야. 나한테 그런게 별로 없으니까. 말했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애가 좋았지만 그 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 아마 pc통신때부터 나돌았던 글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필두로 비슷한 시리즈가 나왔지만 원본만큼 여운이 남는 글은 없었습니다.

(링크 참조:  https://www.instiz.net/clip/503588)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 소설인지 실화를 기반한 허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도 몰라요. 화자가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여러번 읽으니 남자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4813 싱글벙글 가짜백신 11 swear 21/11/07 3021 10
54629 액자값은 이미 69년전에 지불하셨어요....jpg 3 cummings 21/10/28 2137 10
53459 화목한 가정이 중요한 이유.jpg 7 김치찌개 21/08/21 3553 10
52954 그 애.txt 3 Ulsan_Whale 21/07/24 3095 10
52306 1년 동안 2천만원 flex 한 것 인증 7 swear 21/06/12 2896 10
51078 세상을 바꾸는 못된 장애인들 이야기 6 토비 21/03/30 3206 10
49529 69년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jpg 7 김치찌개 20/12/30 2780 10
48954 뇌성마비 아버지를 둔 9살 딸의 속마음 그리고 4년 후 근황 3 swear 20/12/02 2527 10
47760 김하종 신부님 페이스북 4 swear 20/09/29 3393 10
46630 군인이 갑자기 사진찍어달라 함 7 쿠오레 20/08/02 2928 10
46278 이렇게 아빠가 되어간다... 8 Darwin4078 20/07/15 2341 10
46214 he was a boy she was a girl 13 수영 20/07/12 2911 10
45159 일본인들만큼 시간 안 지키는 넘들 없다 4 구밀복검 20/05/23 3127 10
44737 혈관기형으로 거대한팔과 고통을 참고 살던 여성....근황..jpg 김치찌개 20/05/02 2750 10
42843 고양이 색깔 정해지는 만화 4 다람쥐 20/01/31 3362 10
42362 나 6년 왕따 당했고 이번에 홍대 미대 합격했어.jpg 5 김치찌개 20/01/03 3007 10
42306 우리 사무실 고양이 미쳤다;;;진심 6 하트필드 19/12/30 3291 10
41358 영화 기생충으로 인해 밝혀진 한국에 반지하가 많은 이유 4 swear 19/11/09 4146 10
41302 아가냥줍 7 DX루카포드 19/11/06 3165 10
41171 요염한 고양이 5 퓨질리어 19/10/30 2991 10
43711 가랏 야옹이! 2 수영 20/03/12 2857 10
41079 할러윈 특집 악마의 수프 9 구밀복검 19/10/25 4006 10
41000 맛있는 저칼로리 아이스크림 헤일로탑 6 다람쥐 19/10/22 2688 10
40870 졸졸졸졸.gif 2 우유홍차 19/10/15 3286 10
45051 그날 광주와 주먹밥 3 Schweigen 20/05/18 2896 1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