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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1/03/11 20:54:48 |
Name | 자공진 |
Subject | [일본-아사히신문] "한 번 더 끌어안고 싶다" 쓰나미에 사라진 딸, 지금도 수색 중 |
https://news.yahoo.co.jp/articles/79997ea43bae28a6b13a20bd899f0d3cfcd69e5e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약 4km 떨어진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작은 비석이 있다. 후쿠시마 현 오오쿠마 정(町)의 키무라 노리오 씨(55세)가 2013년 여름, 쓰나미로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위해 집 뒤 언덕에 만들었다. 「계속 그대들과 함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옆에는 귀여운 지장보살님. 과자와 꽃으로 잔뜩 둘러싸여 있다. 1월 초순, 키무라 씨는 비석 앞에 웅크리고 앉아 헌화용 물을 갈고,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뒤에서 반려견 도베르만 '베르'가 몸을 부벼 온다. "알았어, 알았어." 키무라 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 찾으러 갈까" 하고 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진 이전, 키무라 씨의 자택은 모래 해변에서 약 100m 떨어진, 해면보다 조금 높은 농지 옆에 있었다. 부모님과 아내, 두 딸의 2세대 생활을 하고 있었다. 11년 3월 11일, 키무라 씨는 인근 후쿠오카 정의 양돈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큰 흔들림 이후 오오쿠마 정으로 돌아와 보니, 자택은 흔적도 없이 쓸려가 있었다. 피난소가 되어 있던 마을 체육관에 가 보니, 어머니 토모에 씨(82세)와 장녀 마유 씨(20세)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와타로 씨(당시 77세)와 아내 미유키 씨(당시 37세), 차녀 유우나 씨(당시 7세)가 행방불명이었다. 오후 5시 즈음, 자택 주변의 수색을 시작했다. "유우나― 미유키―" "있으면 목소리를 내 줘―" 땅거미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쳐 보지만, 대답이 없다. 오후 7시 즈음, 집 뒤 언덕에서 베르가 모래투성이로 뛰쳐나왔다. 평소와는 달리, 목줄이 매여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지진 후에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와, 베르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닌가. 그때 쓰나미에 휩쓸린 게......" 밤을 새워 찾아다녔지만, 결국 3명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원전이 위기상황에 빠졌다. 키무라 씨는 토모에 씨, 마유 씨와 함께 오오쿠마 정으로부터 피난을 강제당했다. 1주일 후, 키무라 씨는 피난을 갔던 아내의 친정 오카야마 현에서, 3명을 찾기 위해 오오쿠마 정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원전을 약 30km 앞둔 길에서 경비원에게 제지당해, 마을로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행방불명이 된 3명의 사진과 자신의 휴대전화번호를 적은 전단지를 만들어, 피난소 등지에 나눠주며 돌아다녔다. 4월 말, 집 근처에서 아버지 와타로 씨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6월, 해상에서 4월 10일에 발견된 시신이, DNA 감정 결과 아내 미유키 씨로 판명되었다. 키무라 씨가 휴대전화로 경찰의 미유키 씨 사망 확인 연락을 받았을 때, 곁에는 장녀 마유 씨가 있었다. 마유 씨는 온몸을 떨며, 두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데, 입은 크게 벌어진 채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침대 위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가 계속 울었다. 이듬해 12년 봄, 키무라 씨는 내륙부인 아이즈와카마츠시의 가설주택에 살기 시작한 토모에 씨를 남겨두고, 마유 씨가 방사능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오오쿠마 정에서 약 300km 떨어진 나가노 현 하쿠바 촌(村)의 옛 펜션을 구입하여 딸과 함께 이주했다. 그리고 거의 매주 출입허가를 취득하여, 찾지 못한 유우나 씨를 찾으러, 편도 약 7시간을 들여 오오쿠마 정을 다녔다. 방호복으로 몸을 감싸 땀투성이가 된 채로, 집 주변이나 바닷가의 흙을 삽으로 파냈다. 자원활동가도 힘을 합쳐 수색을 계속한 결과, 50점이 넘는 유우나 씨의 신발이나 옷 등이 발견되었다. 한참 지나서는, 미유키 씨의 글씨로 '쿠마 정 소학교 1학년 2반 키무라 유우나'라고 적힌 이름표를 붙인, 작은 파란색 체육복도 나왔다. 그리고 16년 12월 9일, 집 근처의 잔해 밑에서 어린이용 목도리와 함께 작은 목뼈와 턱뼈가 발견되었다. 키무라 씨가 "이 목도리 기억하니"라고 묻자, 마유 씨가 대답했다. "응, 나랑 똑같이 맞춘 목도리였어." DNA 감정으로 약 10일 뒤, 유우나 씨의 유골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진으로부터 6년이 지나던 시점이었다. 1월 초순의 오오쿠마 정. 집 주변의 풍경은 크게 바뀌었다. 주변은 제염으로 발생한 오염토를 쌓아 놓는 중간저장시설이 되어, 오염토를 나르는 덤프트럭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린다. 키무라 씨의 집도 저장시설 예정지에 포함되어 있으나, 정부의 매수 교섭에는 응하지 않고 있다. "유우나의 유골 중 8할은 아직 찾지 못했어요. 나라가 중간저장시설로 만들려고 하는 땅은, 저한테는 유우나의 뼈나 유품이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땅인 거예요." 비석이 있는 언덕 위에서는 태평양이 보인다. 때때로, 강한 바닷바람이 불어 올라온다. 키무라 씨는 언덕을 내려가 모래 해변으로 향했다. 지금도, 애견 베르와 함께 집 주변이나 바닷가를 걸으면서 유우나 씨의 유골을 계속 찾고 있다. 베르가 기쁜 듯이, 원래 가족 4명이 함께 놀았던 모래 해변을 뛰어 돌아다닌다. "어이, 베르!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모래 해변에서 육지 쪽으로 올라와, 키무라 씨는 마른 풀을 헤치고 원래 밭이었던 땅으로 들어갔다. 십수 미터 정도 나아간 배수로 옆에는 5미터 사방의 풀이 깎여 있고, 작은 꽃이 놓여 있었다. 유우나 씨의 목뼈와 턱뼈가 발견된 장소다. 키무라 씨는 웅크리고 앉아 두 손을 모은다. 더 이상 딸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만나고 싶다. 한 번 더 만나서, 이 가슴으로 끌어안아 주고 싶다― "부모라면 누구라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라고 키무라 씨는 바닷바람 속에서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무 자르듯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벌써 10년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제게는 아직, 겨우 10년이니까요." ----- 오늘은 3·11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떠난 사람들의 명복을 빕니다. 동아리방에 앉아 빈둥거리다가 뉴스를 보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해 가을 교환학생을 가서는,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자원활동 모집 전단지를 보고 도호쿠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쌀 2킬로그램과 감자 양파 몇 개와 무 반 토막을 받으러 나오셔서는, 멀리서 온 학생들 고맙다고 웃으시던 가설주택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폐허 한가운데의 분향소에 누군가가 갖다놓은 불상과 크리스마스 트리. 망가진 건물의 모습에 아연해지던 중 한쪽 벽에 적힌 '전원 무사합니다 090-XXXX-XXXX'를 보았을 때의 그 구원받은 기분. 몇 년 전부터 '2021년에는 도호쿠에 가야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코로나가 원망스럽네요. 그래도 언젠가는 꼭 다시 갈 거예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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