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게시판입니다.
Date 23/04/24 02:29:35
Name   [익명]
Subject   선택할 수 없었던 제가 왜 우는 걸까요
안녕하세요. 잠 안오는 밤에 새벽 감성을 빌어 홍차넷에 속풀이 좀 하러 온 대학생입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맞벌이 가정의 자녀' 입니다. 지방 광역시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그 때만 해도 유치원 어린이집 다 통틀어 한 반에 5-6명(그 안에서도 부모님이 모두 풀타임 정규직인 경우는 더 드물었습니다) 정도만 맞벌이 부부의 자녀였던 때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기억이 남아 있을 때부터 외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부모님 출근하시고 나면 할머니가 저 밥 먹여 버스 태워 보내시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픽업하셔서 저 집에 데려와 부모님 오실 때까지 tv 보여주시며 집안일 하시고...
다행히 저는 얌전한 아이였습니다. (제가 떠올리는 제 유년도 그랬습니다) tv 틀어주면 조용히 봤고, 그나마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유아동 채널 외에는 다른 거 볼 생각도 않았으니까요. 그러다 할머니 따라 신문지에 있는 콩나물 다듬기 달래 다듬기도 따라하고(지금도 콩나물, 멸치, 달래, 쪽파 등등 다듬을 줄 압니다. 콩도 깠었네요 ;;) 시간 되면 동네 상가 피아노 학원 가고 미술 학원 가고 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머니 옷 잡고 보챈다? 그런 건 일체 없었습니다. 지금도 할머니가 그러시거든요. '세상 다시 없을 순한 아이였다' 라고요.

아무튼 그렇게 자랐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익숙해졌던 건 '참는 법'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했습니다. 6살 아래 동생, 나이 드신 할머니, 직업상 출장이 잦으신 아버지, 외할머니 한 분을 제외하면 양가 어른들 모두 돌아가신 상황에서 직장까지 다니셨던 어머니께 저를 챙길 여력이 얼마나 있으셨을까요.
- 학교에서 열이 나도 참아야 한다. 집에 가면 나 돌보느라 결국 가족들 손 간다.
- 아파도 내가 하던 건 다 해야 한다. 결국 누군가는 할 일이다.
- 뭐 먹고 싶다, 뭐 해 달라, 갖고 싶다 투정 부리지 말 것. 돈 들고 수고롭다. 나중에 '왜 이런 거 먹고 싶다/ 갖고 싶다 하냐. 네 엄마/아빠 힘들어한다.' 소리만 듣는다.
이런 걸 아주 어릴 때부터 몸으로 체득했던 거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아플 때 제 눈앞에서 가족들이 움직이는 게 불편하고, 제 몸에 열이 나도 세탁기, 건조기 알람이 울리면 직접 가 봐야 마음이 편합니다. 어쩌다 서울에서 본가에 간 날도 어머니께서 제게 밥을 차려 주시는 것, 먹고 싶은 것 없냐 물어보시는 것도 불편해 하지 말라 말씀드렸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는 말씀도요(성인이 되며 좋은 점이 단기 알바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본가에서 딱 주말 동안만 머무를 때도 제가 설거지까지 다 해야 마음이 편하고, 괜히 집 안 먼지가 신경 쓰여 대청소하려다가 제 체력이 받쳐 주지 않아 뻗으면서도 '왜 내 몸이 이렇게 쓰레기인 건가'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을 졸업하신 선배님들이 재학생들을 위해 강연해 주시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과에서 개최한 자리라 여선배님, 남선배님 가릴 거 없이 많이 오셨고 상당히 큰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서 여선배님들은 (아무래도) 가정에서 본인의 역할과 회사에서 본인의 역할, '나'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아이를 맡길 기관을 최대한 빨리 알아봐라, 워킹맘으로 살려면 양가의 도움이 중요하다 등 현실적인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중 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고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 급히 학교 화장실로 가야 했습니다.
숨을 죽이며 울던 중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내가 우는 걸까. 나는 아무것도 선택한 적 없고 그냥 다 상황에 맞게 살았을 뿐인데 왜 내가 지금 여기서 울고 있는 걸까.'

제가 왜 우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왜 힘들어하는지도, 또 왜 '워킹맘'이라는 자리에 까닭 모를 답답한 느낌이 함께 따라붙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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