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게시판입니다.
Date | 15/12/28 13:48:12 |
Name | 뤼야 |
Subject | 영화 <더 헌트> 이상합니다? |
어제 <버드맨> 한번 더 보고 올해 개봉한 영화중 볼만한 것이 있나 뒤적거리다 토마스 빈터베르 감독의 <더 헌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충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주인공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로 아내와 이혼한 뒤 죽마고우의 딸인 5살 클라라의 거짓말로 인해 소아성범죄자로 몰리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어른들은 루카스와 그의 아들에게 위협과 폭력을 가하고 뒤늦게 클라라는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했다"라고 실토하지만, 어른들은 어린이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 속에서 기억을 지우는 거라고 믿습니다. 루카스를 둘러싼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한순간에 송두리째 단절돼 버린 뒤에야 루카스는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지만, 누군가가 루카스의 집 창문으로 돌을 던지고 애완견 패니를 죽이기 까지 하죠. 피해자 중심주의 폐해, 경직된 PC가 가져올 수 있는 역설적 모순등을 그린 수작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어딘가 모를 위화감이 느껴젔습니다. 절친의 딸인 클라라는 부모 대신 자신을 따뜻하게 돌봐준 루카스에게 애정을 표시하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루카스의 태도는 너무나 경직되어 있습니다. 루카스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헌신적인 교사인지는 영화의 초반에 잘 드러나 있고, 아이들도 이런 루카스와의 관계가 매우 원만합니다. 헌데 머리에 피도 안마른 절친의 딸이 만들어준 선물을 어찌하여 거절했는지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장면은 꼭 성인남성 선생님이 사춘기소녀의 성적 판타지가 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즉, 루카스와 어린 클라라의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로는 억지춘향격이라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아이가 조막손으로 만든 선물을 거절하는 루카스의 태도는 마치 소아성범죄자의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가 자기 운명을 맞이하는 장면처럼 되어버리지요. 그리고 이건 너무나 사후적인 해석이고요. 이 장면을 빼버리고 차라리 클라라가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 어른들의 언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 갈등이 커지는 쪽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들 어찌 보셨는지요. 0
|
[친구들과 함께 보던 포르노의 한 장면을 “이것 봐라, 낄낄낄”하면서 무심코 클라라에게 보여준 것이다. 프로이트적으로 봤을 때 남근 선망조차 해본 적 없었을 클라라에게 충격이 되었고, 클라라는 혼란에 빠진다. 클라라는 가장 가깝고 좋아하는 선생님인 루카스에게 정성껏 하트 조각을 만들어 몰래 주머니에 넣어놓기도 하고 아이들과 놀이를 하다 쓰러진 루카스의 입술에 뽀뽀를 한다. 평소와 다른 클라라의 태도에 놀란 루카스는, 클라라에게 하트 조각은 엄마께 드리는 게 좋겠다며 클라라를 달래고 입술 뽀뽀는 엄마 아빠한... 더 보기
[친구들과 함께 보던 포르노의 한 장면을 “이것 봐라, 낄낄낄”하면서 무심코 클라라에게 보여준 것이다. 프로이트적으로 봤을 때 남근 선망조차 해본 적 없었을 클라라에게 충격이 되었고, 클라라는 혼란에 빠진다. 클라라는 가장 가깝고 좋아하는 선생님인 루카스에게 정성껏 하트 조각을 만들어 몰래 주머니에 넣어놓기도 하고 아이들과 놀이를 하다 쓰러진 루카스의 입술에 뽀뽀를 한다. 평소와 다른 클라라의 태도에 놀란 루카스는, 클라라에게 하트 조각은 엄마께 드리는 게 좋겠다며 클라라를 달래고 입술 뽀뽀는 엄마 아빠한테만 하는 거라고 부드럽게 훈계했다.] 이렇게 써놨네요.
아마 저는 보면서 모범적인 유치원 교사였던 루카스가 일종의 훈육으로 거리를 두었다고 이해한 것 같습니다. 루카스는 클라라가 갑작스럽게 입술에 뽀뽀를 한 것이 단순한 친근감의 표시가 아니라 평소와는 다른 태도였다고 느꼈고 모든 사람이 향후에 걱정하게 될 사건을 똑같이 걱정한 것이죠. 클라라의 뽀뽀와 하트를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부러 경계하여 향후의 비극을 스스로 초래하였다고 생각하면, 우연과 오해라는 극 전반의 흐름이 약간 어색해지지 않나 싶네요.
아마 저는 보면서 모범적인 유치원 교사였던 루카스가 일종의 훈육으로 거리를 두었다고 이해한 것 같습니다. 루카스는 클라라가 갑작스럽게 입술에 뽀뽀를 한 것이 단순한 친근감의 표시가 아니라 평소와는 다른 태도였다고 느꼈고 모든 사람이 향후에 걱정하게 될 사건을 똑같이 걱정한 것이죠. 클라라의 뽀뽀와 하트를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부러 경계하여 향후의 비극을 스스로 초래하였다고 생각하면, 우연과 오해라는 극 전반의 흐름이 약간 어색해지지 않나 싶네요.
http://redtea.kr/?b=3&n=1864&c=26224
오이디푸스 관련 글에 써놓은 댓글에 제가 [비극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비극, 서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진정한 무지, 또는 실존의 실패가 오늘날 새로운 의미의 비극의 조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질문의 맥락으로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만약 루카스가 클라라에게 거리를 둔 것이 비극의 서막이라면,... 더 보기
오이디푸스 관련 글에 써놓은 댓글에 제가 [비극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비극, 서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진정한 무지, 또는 실존의 실패가 오늘날 새로운 의미의 비극의 조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질문의 맥락으로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만약 루카스가 클라라에게 거리를 둔 것이 비극의 서막이라면,... 더 보기
http://redtea.kr/?b=3&n=1864&c=26224
오이디푸스 관련 글에 써놓은 댓글에 제가 [비극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비극, 서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진정한 무지, 또는 실존의 실패가 오늘날 새로운 의미의 비극의 조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질문의 맥락으로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만약 루카스가 클라라에게 거리를 둔 것이 비극의 서막이라면, 브레히트적인 해석, 주인공이 비극의 운명을 \"알고\" 극을 시작하는 장면이 됩니다. 이 장면에서 어색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 전체가 커다란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그 서막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시간적 순서로 가장 최초의 갈등으로 보여지는 이 장면을 서막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루카스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극을 여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미스매치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 미스매치는 이 이야기를 이야기로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다. 모든 오해는 풀리고 사람들도 더이상 루카스에게 편견을 갖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이야기가 시작한 그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의 서사는, 비극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서사 구조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인 공포 앞에서 하염 없이 무너지고 공포가 사라지자 마자 바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애초에 서사를 이해하는 이성과 공포를 담당하는 뇌의 구조부터 다름을 생각했습니다. 공포는 사냥 때문에 생긴 감정이기에 마지막 사냥에서 루카스는 그 공포를 다시 한 번 온전히 느낀 것이죠.
이거 볼 때 쯤에 박민규가 이상문학상을 탔었는데 그 때 김윤식이 이런 심사평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서사는 가능한가?\" 하이데거가 그토록 비난하던 과학기술의 발전 앞에 의미를 잃어버린 형이상학처럼, 아무런 서사 없이 출현하는 공포와 사냥 때문에 이제 더이상 비극은 성립하지 못하는 거라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이디푸스 관련 글에 써놓은 댓글에 제가 [비극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비극, 서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진정한 무지, 또는 실존의 실패가 오늘날 새로운 의미의 비극의 조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질문의 맥락으로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만약 루카스가 클라라에게 거리를 둔 것이 비극의 서막이라면, 브레히트적인 해석, 주인공이 비극의 운명을 \"알고\" 극을 시작하는 장면이 됩니다. 이 장면에서 어색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 전체가 커다란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그 서막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시간적 순서로 가장 최초의 갈등으로 보여지는 이 장면을 서막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루카스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극을 여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미스매치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 미스매치는 이 이야기를 이야기로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다. 모든 오해는 풀리고 사람들도 더이상 루카스에게 편견을 갖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이야기가 시작한 그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의 서사는, 비극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서사 구조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인 공포 앞에서 하염 없이 무너지고 공포가 사라지자 마자 바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애초에 서사를 이해하는 이성과 공포를 담당하는 뇌의 구조부터 다름을 생각했습니다. 공포는 사냥 때문에 생긴 감정이기에 마지막 사냥에서 루카스는 그 공포를 다시 한 번 온전히 느낀 것이죠.
이거 볼 때 쯤에 박민규가 이상문학상을 탔었는데 그 때 김윤식이 이런 심사평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서사는 가능한가?\" 하이데거가 그토록 비난하던 과학기술의 발전 앞에 의미를 잃어버린 형이상학처럼, 아무런 서사 없이 출현하는 공포와 사냥 때문에 이제 더이상 비극은 성립하지 못하는 거라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트를 먼저 줬습니다. 클라라가 하트를 넣은 봉투를 연애편지처럼 루카스 옷주머니에 넣어뒀는데, 루카스는 그걸 본 즉시 돌려준 게 아니고, 클라라한테 진한 뽀뽀를 당한 뒤에 따로 불러 뽀뽀에 대해 훈계를 하면서 선물도 돌려주려고 하자 클라라가 \'그거 내거 아님\' 하면서 도망갔네요.. 물론 두 사건의 시간차는 얼마 안 되는 것 같습니다만, 클라라의 키스가 루카스에게 모종의 사후적 위기감을 던진 것은 확실해요. 어린아이의 선물을 정색을 하고 돌려주는 것은 지나치게 과도하죠. 보통 어른 같으면 \'이녀석 귀엽군\' 하고 넘어가거나, 뽀뽀는 뽀뽀대로 처리하고(야 임마 선생님한테 뽀뽀하지마) 하트는 또 하트대로 처리하지 않았을까요? 한번에 두 가지를 묶어서 합산 선고하는 것이 아이한테 가혹하다는 것쯤은 추측할 수 있으니까요. 이걸 경합범 처벌로 보면 흡수주의가 아니고 병과주의인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훈육이냐 아니면 클라라에 대한 루카스의 경계심이냐인데, 저는 일단 볼 때는 전자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거든요. 후자로 생각하면 클라라와 루카스의 갈등과 소통의 문제가 주변으로 확산되어 가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러면 전체적으로 뭔가 영화가 부자연스러워질 것 같아요. 루카스가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교사로서 성실하게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주어서 이 사건이 정말 누구도 잘못하지 않은 일임을 강조하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 영화에서는 루카스는 물론 클라라도 잘못한 게 있으면 안되는 것 같거든요. ... 더 보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훈육이냐 아니면 클라라에 대한 루카스의 경계심이냐인데, 저는 일단 볼 때는 전자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거든요. 후자로 생각하면 클라라와 루카스의 갈등과 소통의 문제가 주변으로 확산되어 가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러면 전체적으로 뭔가 영화가 부자연스러워질 것 같아요. 루카스가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교사로서 성실하게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주어서 이 사건이 정말 누구도 잘못하지 않은 일임을 강조하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 영화에서는 루카스는 물론 클라라도 잘못한 게 있으면 안되는 것 같거든요. 클라라가 괜히 루카스를 곤란하게 만드는 무지에서 비롯된 악한 행동이 원인이거나 루카스의 무심함과 냉대가 원인이라면 이야기는 누군가의 사소한 잘못으로 큰 오해가 생겼다가 풀리는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도가 되잖아요. 뭔가 이 장면의 직관적 부자연스러움이 남녀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군요.
아니, 저는 이 장면이 튄다는 걸 루카스에게 책임을 묻게 된다는 뜻으로 쓴 건 아니구요. 루카스가 어떤 식으로 행동했건, 하트를 거부했건 안 했건 이 문제에선 누구도 잘못한 게 없지요.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오빠와 친구놈인데, 그것도 뭐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거고... 클라라의 행동, 루카스의 행동, 마을 사람들의 행동 그 모든 것에 인과관계나 윤리적 단죄가 끼어들 여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루카스의 오버액션이라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과 그 사건은 클라라에게 치명적인 상처로 남았다는 것은 맞아요. 그건 영원히 반복되는 신화적 원형 같은 느낌입니다. 파이드라가 생각날라 그러는데...
이 장면만 가지고 영화 전체를 다시 재해석하라고 하면 저는 좀 힘드네요. 예전에 볼 때 마지막 부분의 의문을 정리 못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 장면만 가지고 영화 전체를 다시 재해석하라고 하면 저는 좀 힘드네요. 예전에 볼 때 마지막 부분의 의문을 정리 못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루카스가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비극을 스스로 자초했다고 여기게끔 만들어진 것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끼워맞추기이고 사후적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죠.
영화의 소재와 주제로 비추어 볼 때 그런식의 해석은 과도하다는 것이구요.
제 글을 잘못 이해하신 듯 합니다.
루카스가 훈육으로 거리를 두려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크게 잘못된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뽀뽀를 하거나 선물을 주는 행위가 제가 보기에 훈육을 해야할 행동은 아니었거든요.
루카스가 클라라가 아닌 다른 아... 더 보기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끼워맞추기이고 사후적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죠.
영화의 소재와 주제로 비추어 볼 때 그런식의 해석은 과도하다는 것이구요.
제 글을 잘못 이해하신 듯 합니다.
루카스가 훈육으로 거리를 두려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크게 잘못된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뽀뽀를 하거나 선물을 주는 행위가 제가 보기에 훈육을 해야할 행동은 아니었거든요.
루카스가 클라라가 아닌 다른 아... 더 보기
루카스가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비극을 스스로 자초했다고 여기게끔 만들어진 것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끼워맞추기이고 사후적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죠.
영화의 소재와 주제로 비추어 볼 때 그런식의 해석은 과도하다는 것이구요.
제 글을 잘못 이해하신 듯 합니다.
루카스가 훈육으로 거리를 두려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크게 잘못된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뽀뽀를 하거나 선물을 주는 행위가 제가 보기에 훈육을 해야할 행동은 아니었거든요.
루카스가 클라라가 아닌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준 애착과 클라라에게 거리두기를 시전한 것 사이에 일관성도 결여되어 있구요.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끼워맞추기이고 사후적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죠.
영화의 소재와 주제로 비추어 볼 때 그런식의 해석은 과도하다는 것이구요.
제 글을 잘못 이해하신 듯 합니다.
루카스가 훈육으로 거리를 두려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크게 잘못된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뽀뽀를 하거나 선물을 주는 행위가 제가 보기에 훈육을 해야할 행동은 아니었거든요.
루카스가 클라라가 아닌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준 애착과 클라라에게 거리두기를 시전한 것 사이에 일관성도 결여되어 있구요.
[이 영화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다. 모든 오해는 풀리고 사람들도 더이상 루카스에게 편견을 갖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이야기가 시작한 그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의 서사는, 비극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푸하하하핫 !!!!웃자고 하신거죠?
어떤 시대에 뒤떨어져 한참 뒤떨어진 모더니스트가 이런 말을 주워섬기던가요?
삼공파일님.
박민규와 김윤식 이야기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박민규가 왜 이상문학상을 탔는지도 모르겠고,
김윤식은 왜 가라타니 고진 따라지... 더 보기
푸하하하핫 !!!!웃자고 하신거죠?
어떤 시대에 뒤떨어져 한참 뒤떨어진 모더니스트가 이런 말을 주워섬기던가요?
삼공파일님.
박민규와 김윤식 이야기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박민규가 왜 이상문학상을 탔는지도 모르겠고,
김윤식은 왜 가라타니 고진 따라지... 더 보기
[이 영화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다. 모든 오해는 풀리고 사람들도 더이상 루카스에게 편견을 갖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이야기가 시작한 그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의 서사는, 비극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푸하하하핫 !!!!웃자고 하신거죠?
어떤 시대에 뒤떨어져 한참 뒤떨어진 모더니스트가 이런 말을 주워섬기던가요?
삼공파일님.
박민규와 김윤식 이야기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박민규가 왜 이상문학상을 탔는지도 모르겠고,
김윤식은 왜 가라타니 고진 따라지가 되어서 엄살을 부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 앞에 형이상학이 의미를 잃었다는 말도 엄살이에요.
반박해 드려요? 안해도 돼죠?
우리가 모두 기계가 되지 않는 한 서사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비극이 되었던 희극이 되었던 말이죠.
푸하하하핫 !!!!웃자고 하신거죠?
어떤 시대에 뒤떨어져 한참 뒤떨어진 모더니스트가 이런 말을 주워섬기던가요?
삼공파일님.
박민규와 김윤식 이야기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박민규가 왜 이상문학상을 탔는지도 모르겠고,
김윤식은 왜 가라타니 고진 따라지가 되어서 엄살을 부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 앞에 형이상학이 의미를 잃었다는 말도 엄살이에요.
반박해 드려요? 안해도 돼죠?
우리가 모두 기계가 되지 않는 한 서사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비극이 되었던 희극이 되었던 말이죠.
제 글이 짧았던 데 먼저 사과드리죠. 예전에 라캉과 관련된 글로 심력을 쏟고나서 생각하길 거대한 말을 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어요. 왜냐하면 그런 말이 가진 엄청난 함의를 감당할 수 없을 게 뻔하거든요. 저는 한번도 그런 말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을 인터넷에서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위에 삼공파일님께서 이 영화의 감상을 링크해주시고 그 말을 뒷받침하는 의미로 김윤식의 말을 덧붙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영화의 비극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삼공파일님의 말과 김윤식이 \'오늘날 서사는 가능한가\'라는 말... 더 보기
위에 삼공파일님께서 이 영화의 감상을 링크해주시고 그 말을 뒷받침하는 의미로 김윤식의 말을 덧붙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영화의 비극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삼공파일님의 말과 김윤식이 \'오늘날 서사는 가능한가\'라는 말... 더 보기
제 글이 짧았던 데 먼저 사과드리죠. 예전에 라캉과 관련된 글로 심력을 쏟고나서 생각하길 거대한 말을 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어요. 왜냐하면 그런 말이 가진 엄청난 함의를 감당할 수 없을 게 뻔하거든요. 저는 한번도 그런 말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을 인터넷에서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위에 삼공파일님께서 이 영화의 감상을 링크해주시고 그 말을 뒷받침하는 의미로 김윤식의 말을 덧붙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영화의 비극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삼공파일님의 말과 김윤식이 \'오늘날 서사는 가능한가\'라는 말은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이런 엄청난 비약을 제가 감당할 깜냥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삼공파일님이 어떤 맥락에서 이런 글을 써주셨는지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지요.
1.
일단, 김윤식의 말을 인용하며 [오늘날 서사가 가능한가]라는 심사평을 남겼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가라타니 고진은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책 한질(한 권이 아닙니다)을 썼습니다. 책 장 한줄을 가득 채우는 분량이에요. 철학, 문학이론, 정치와 사회를 넘나들어요. 당연한 일입니다. 따로 떼어놓고는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제대로 다 이야기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삼공파일님의 댓글을 부정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던 이유죠.
2.
저는 가라타니 고진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뱉은 말을 책임지려는 그의 성실함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박민규의 작품에는 당연히 서사가 없겠죠. 왜냐? 박민규는 제대로된 서사를 조탁할 재주가 없고 어설프게 포스트모던을 흉내내고 있으니까요. 김윤식은 그에 걸맞게 어설픈 심사평을 내야하니까 저런 거대한 말을 함부로 던져서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해야 했을 테고요. 독자를 기만하는 작가와 문학평론가. 제가 가장 싫어하는 문학계의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삼공파일님의 \'비극은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뒷받침하려고 써주셨으니 문학덕후인 제 기분이 좋을리는 없죠.
3.
또한 이 영화의 결말로서 \'모든 오해가 풀렸다\'라는 말이 일단 오류입니다. 루카스는 \'혐의 없음\'으로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이지 그가 사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방법은 이미 사라져버렸어요.\'혐의 없음\'이라는 법적선고는 그러므로 \'비극이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말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서사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질됩니다. 비극도 희극도 모두 변질됩니다. 그것이 서사의 본질이에요. 시간을 강렬하게 의식하지 않는 서사는 일반적인 서사가 아닙니다. 신화적 서사가 \'신화적\'이라는 타이틀을 다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이 일반적인 서사와 다르기 때문이에요. 이 차이를 모르고 계십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루카스와 사회적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메모리 이레이져같은 것이 쏴진 것처럼 루카스에게 덧씌여진 오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루카스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 겁니까? 다시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칩시다. 이게 뭔... 이건 말도 안돼는 삼류 희극이죠. 인간의 섬세한 휴머니티를 다룬 드라마가 아닙니다. 정말로 모든 오해가 풀렸다고 그래서 비극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면 인간에 대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신 겁니다. 아니면 서사를 단지 어떤 물리적 결말에 다다름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신 탓일 수도 있죠. 둘 다 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삼공파일님의 영화평에 그닥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설명된 셈입니다.
4.
하이데거가 과학기술의 발전 앞에 형이상학이 의미를 잃었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하이데거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자는 예언을 해요. 그러나 예언은 예언이기에 틀리기도 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인문학으로 인간을 규정하려는 인문학적 시도가 인기가 없어진 것은 사실이지요. 인정투쟁을 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인문학이 끝났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없어요. 뇌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종種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론전 응결점이 있어요. 한 철학자는 그것을 두고 정신적 귀족주의라고 했지요. 정신적 귀족주의는 분명 누군가 알아주기 때문에 택하는 길은 아닐 겁니다. 인정투쟁이 속물화되어가는 것에 대한 반발이지요. 저는 과학기술의 발전때문에 유물론적 허무주의가 심해질수록 자신의 삶에서 형이상학을 구가하려는 시도도 계속되리라 생각합니다. 빨간약을 삼킬 것인지 파란약을 삼킬 것인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죠. 그리고 어떤 것이 더 낫다라는 절대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역설力設하면 역설逆設이 되고 마는 이치를 아는 형이상학을 하는 사람의 태도죠.
5.
저는 삼공파일님처럼 과학을 전공한 과학도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썼듯이 저는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존재론적 반발로 형이상학을 제 나름대로 공부하고 있어요. 그리고 삼공파일님도 그렇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해를 했나요? 제가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형이상학적 시도를 냉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진화심리학과 뇌과학에 관한 책도 남부럽지 않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제가 그런 태도를 혐오하는 이유는 냉소하기에는 오연하고 나태한 상상력의 부재라는 정치적으로 무책임하고, 현명하지 못한 나약한 태도가 숨어있기 때문이에요.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그 소실점이 결국 인간일진데, 냉소하기로 닿을 수 있는 지점은 아무데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위엄만을 지키며, 유폐되어 스스로 삶의 그늘로 들어서고 싶은 마음은 제게 없습니다.
위에 삼공파일님께서 이 영화의 감상을 링크해주시고 그 말을 뒷받침하는 의미로 김윤식의 말을 덧붙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영화의 비극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삼공파일님의 말과 김윤식이 \'오늘날 서사는 가능한가\'라는 말은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이런 엄청난 비약을 제가 감당할 깜냥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삼공파일님이 어떤 맥락에서 이런 글을 써주셨는지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지요.
1.
일단, 김윤식의 말을 인용하며 [오늘날 서사가 가능한가]라는 심사평을 남겼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가라타니 고진은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책 한질(한 권이 아닙니다)을 썼습니다. 책 장 한줄을 가득 채우는 분량이에요. 철학, 문학이론, 정치와 사회를 넘나들어요. 당연한 일입니다. 따로 떼어놓고는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제대로 다 이야기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삼공파일님의 댓글을 부정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던 이유죠.
2.
저는 가라타니 고진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뱉은 말을 책임지려는 그의 성실함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박민규의 작품에는 당연히 서사가 없겠죠. 왜냐? 박민규는 제대로된 서사를 조탁할 재주가 없고 어설프게 포스트모던을 흉내내고 있으니까요. 김윤식은 그에 걸맞게 어설픈 심사평을 내야하니까 저런 거대한 말을 함부로 던져서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해야 했을 테고요. 독자를 기만하는 작가와 문학평론가. 제가 가장 싫어하는 문학계의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삼공파일님의 \'비극은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뒷받침하려고 써주셨으니 문학덕후인 제 기분이 좋을리는 없죠.
3.
또한 이 영화의 결말로서 \'모든 오해가 풀렸다\'라는 말이 일단 오류입니다. 루카스는 \'혐의 없음\'으로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이지 그가 사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방법은 이미 사라져버렸어요.\'혐의 없음\'이라는 법적선고는 그러므로 \'비극이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말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서사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질됩니다. 비극도 희극도 모두 변질됩니다. 그것이 서사의 본질이에요. 시간을 강렬하게 의식하지 않는 서사는 일반적인 서사가 아닙니다. 신화적 서사가 \'신화적\'이라는 타이틀을 다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이 일반적인 서사와 다르기 때문이에요. 이 차이를 모르고 계십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루카스와 사회적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메모리 이레이져같은 것이 쏴진 것처럼 루카스에게 덧씌여진 오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루카스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 겁니까? 다시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칩시다. 이게 뭔... 이건 말도 안돼는 삼류 희극이죠. 인간의 섬세한 휴머니티를 다룬 드라마가 아닙니다. 정말로 모든 오해가 풀렸다고 그래서 비극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면 인간에 대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신 겁니다. 아니면 서사를 단지 어떤 물리적 결말에 다다름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신 탓일 수도 있죠. 둘 다 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삼공파일님의 영화평에 그닥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설명된 셈입니다.
4.
하이데거가 과학기술의 발전 앞에 형이상학이 의미를 잃었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하이데거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자는 예언을 해요. 그러나 예언은 예언이기에 틀리기도 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인문학으로 인간을 규정하려는 인문학적 시도가 인기가 없어진 것은 사실이지요. 인정투쟁을 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인문학이 끝났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없어요. 뇌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종種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론전 응결점이 있어요. 한 철학자는 그것을 두고 정신적 귀족주의라고 했지요. 정신적 귀족주의는 분명 누군가 알아주기 때문에 택하는 길은 아닐 겁니다. 인정투쟁이 속물화되어가는 것에 대한 반발이지요. 저는 과학기술의 발전때문에 유물론적 허무주의가 심해질수록 자신의 삶에서 형이상학을 구가하려는 시도도 계속되리라 생각합니다. 빨간약을 삼킬 것인지 파란약을 삼킬 것인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죠. 그리고 어떤 것이 더 낫다라는 절대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역설力設하면 역설逆設이 되고 마는 이치를 아는 형이상학을 하는 사람의 태도죠.
5.
저는 삼공파일님처럼 과학을 전공한 과학도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썼듯이 저는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존재론적 반발로 형이상학을 제 나름대로 공부하고 있어요. 그리고 삼공파일님도 그렇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해를 했나요? 제가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형이상학적 시도를 냉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진화심리학과 뇌과학에 관한 책도 남부럽지 않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제가 그런 태도를 혐오하는 이유는 냉소하기에는 오연하고 나태한 상상력의 부재라는 정치적으로 무책임하고, 현명하지 못한 나약한 태도가 숨어있기 때문이에요.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그 소실점이 결국 인간일진데, 냉소하기로 닿을 수 있는 지점은 아무데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위엄만을 지키며, 유폐되어 스스로 삶의 그늘로 들어서고 싶은 마음은 제게 없습니다.
[비극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비극, 서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진정한 무지, 또는 실존의 실패가 오늘날 새로운 의미의 비극의 조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와..........표현력이........
저는 삼공파일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해한 것을 풀어보자면 (틀리면 어쩐담;;),
원인이 반드시 일어나고 결과가 따르는 스토리란 건 이제는 진부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꼭 아귀가 맞아 떨어지게 기승전결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에요. 누군가의 비극이... 더 보기
와..........표현력이........
저는 삼공파일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해한 것을 풀어보자면 (틀리면 어쩐담;;),
원인이 반드시 일어나고 결과가 따르는 스토리란 건 이제는 진부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꼭 아귀가 맞아 떨어지게 기승전결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에요. 누군가의 비극이... 더 보기
[비극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비극, 서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진정한 무지, 또는 실존의 실패가 오늘날 새로운 의미의 비극의 조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와..........표현력이........
저는 삼공파일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해한 것을 풀어보자면 (틀리면 어쩐담;;),
원인이 반드시 일어나고 결과가 따르는 스토리란 건 이제는 진부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꼭 아귀가 맞아 떨어지게 기승전결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에요. 누군가의 비극이 다른 누군가의 희극이 되기도 하고 그 사이의 논리와 정당성은 찾아볼 수도 없으며 희비의 원인은 이벤트의 결과를 직면하고서야 되짚어보는 끼워맞추기식 합리화가 아니고선 어디서도 찾아볼 길이 없이 그저 갑작스럽고 어리둥절하고 전례가 없어 생소하기도 하고, 영문을 모를 일들에 따라 오는 청천벽력같은 비극은 인간의 희한한 속성에 의해 언제든지 일어나요. 인간의 근거없는 공포가 집단적으로 표출되는 건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발생하는 것이 가능해요. 휘몰아쳤다가는 인간들 사이에 생채기를 내고 집단광기가 가라앉으면서 잠잠해지곤 하는데 상처에서 새살이 돋으려면 고행이 따르죠. 외상 후 증후군 같이요. 상처받은 이가 있는데 딱히 손가락질할 대상도 없고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는 수밖엔 없어요. 저 인간의 공포에 대해 관심 많아서 뭔말인지 알 것 같은데 맞나여? 맞나여?
와..........표현력이........
저는 삼공파일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해한 것을 풀어보자면 (틀리면 어쩐담;;),
원인이 반드시 일어나고 결과가 따르는 스토리란 건 이제는 진부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꼭 아귀가 맞아 떨어지게 기승전결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에요. 누군가의 비극이 다른 누군가의 희극이 되기도 하고 그 사이의 논리와 정당성은 찾아볼 수도 없으며 희비의 원인은 이벤트의 결과를 직면하고서야 되짚어보는 끼워맞추기식 합리화가 아니고선 어디서도 찾아볼 길이 없이 그저 갑작스럽고 어리둥절하고 전례가 없어 생소하기도 하고, 영문을 모를 일들에 따라 오는 청천벽력같은 비극은 인간의 희한한 속성에 의해 언제든지 일어나요. 인간의 근거없는 공포가 집단적으로 표출되는 건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발생하는 것이 가능해요. 휘몰아쳤다가는 인간들 사이에 생채기를 내고 집단광기가 가라앉으면서 잠잠해지곤 하는데 상처에서 새살이 돋으려면 고행이 따르죠. 외상 후 증후군 같이요. 상처받은 이가 있는데 딱히 손가락질할 대상도 없고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는 수밖엔 없어요. 저 인간의 공포에 대해 관심 많아서 뭔말인지 알 것 같은데 맞나여? 맞나여?
당분간 뤼야님 차단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홍차넷에 들어오는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가 뤼야님의 매력적인 글을 읽고 시덥잖은 댓글을 달아보는 일이니까, 저 자신한테 꽤 큰 벌칙입니다. 제가 그렇게 클린한 것도 아니고 결벽증이 강한 것도 아니지만,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성실한 대화 상대를 모욕하는 현장에 어중간한 방관자로 남겨지는 건 차마.. 그렇네요. 그냥 뤼야님의 글에 댓글만 안 달고 차단은 하지 말까 생각해 봤는데, 그럴 자신도 없을 뿐더러 이 한 사람이 없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기분 상하시지 않길 빌어요.
진지하지 않으라는게 아니겠죠. 모름이나 다름을 냉소하지 말라는거지. 만약 그걸 냉소하고 싶더라도 냉소를 걷어내고 이러해서 저러하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제 생각에는 가장 친한 친구나 가까운 이에게도 \'설마, 그 소리 진지하게 하는 거 아니겠지?\'하며 모멸적으로 대화를 시작하는걸 \'진지하게 받아들인\'자세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겁니다.
[제가 그런 태도를 혐오하는 이유는 냉소하기에는 오연하고 나태한 상상력의 부재라는 정치적으로 무책임하고, 현명하지 못한 나약한 태도가 숨어있기 때문이에요. 과학... 더 보기
[제가 그런 태도를 혐오하는 이유는 냉소하기에는 오연하고 나태한 상상력의 부재라는 정치적으로 무책임하고, 현명하지 못한 나약한 태도가 숨어있기 때문이에요. 과학... 더 보기
진지하지 않으라는게 아니겠죠. 모름이나 다름을 냉소하지 말라는거지. 만약 그걸 냉소하고 싶더라도 냉소를 걷어내고 이러해서 저러하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제 생각에는 가장 친한 친구나 가까운 이에게도 \'설마, 그 소리 진지하게 하는 거 아니겠지?\'하며 모멸적으로 대화를 시작하는걸 \'진지하게 받아들인\'자세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겁니다.
[제가 그런 태도를 혐오하는 이유는 냉소하기에는 오연하고 나태한 상상력의 부재라는 정치적으로 무책임하고, 현명하지 못한 나약한 태도가 숨어있기 때문이에요.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그 소실점이 결국 인간일진데, 냉소하기로 닿을 수 있는 지점은 아무데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위엄만을 지키며, 유폐되어 스스로 삶의 그늘로 들어서고 싶은 마음은 제게 없습니다.]
생각이 다르거나 혹은 차이가 있는, 또는 지식에 대한 관심과 깊이가 각자 다른 이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이 태도를 정말 유지하시려고 하신걸까요? 진지함으로 도망치고 탈퇴로 꼬리자름을 보니 그 해박한 철학과 인문학과 문학의 깊이들이 결국 한 인간의 태도조차 성숙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되려 \'인문학\'과 \'인간\'에 대한 냉소를 보이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런 태도를 혐오하는 이유는 냉소하기에는 오연하고 나태한 상상력의 부재라는 정치적으로 무책임하고, 현명하지 못한 나약한 태도가 숨어있기 때문이에요.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그 소실점이 결국 인간일진데, 냉소하기로 닿을 수 있는 지점은 아무데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위엄만을 지키며, 유폐되어 스스로 삶의 그늘로 들어서고 싶은 마음은 제게 없습니다.]
생각이 다르거나 혹은 차이가 있는, 또는 지식에 대한 관심과 깊이가 각자 다른 이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이 태도를 정말 유지하시려고 하신걸까요? 진지함으로 도망치고 탈퇴로 꼬리자름을 보니 그 해박한 철학과 인문학과 문학의 깊이들이 결국 한 인간의 태도조차 성숙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되려 \'인문학\'과 \'인간\'에 대한 냉소를 보이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흠.. 뤼야님께서 이 글을 보실지 잘 모르겠네요
http://www.podbbang.com/ch/8720
저와 구밀복검, 그리고 친구녀석이 진행하는 팟케스트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18화 입니다.
http://www.podbbang.com/ch/8720
저와 구밀복검, 그리고 친구녀석이 진행하는 팟케스트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18화 입니다.
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