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9/07 00:44:52
Name   Schweigen
Subject   어른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사람 되지 마세요.
작년에 우리 형이 죽었습니다. 간도 망가지고 신장도 고장나고 혈관계도 작살나 수년만에 빈털털이로 나타났죠. 당시 형수님과 이혼했기에 법적으로 남남이었지만 형수와 조카내외가 형 병원비를 대겠다 했어요. 근데 그림이 보여요. 형수님은 시골에서 편의점 운영하며 근근히 먹고 살며 둘째 대학도 보내야 하고, 외벌이 조카네는 아파트 대출금 갚아가며 애기들 키우느라 앞가림도 힘들고... 매달 병원비 감당하려면 허리를 얼마나 더 졸라매야 할지... 너무 잘 보였어요. 그래서 형수랑 조카내외 뜯어 말리고 제가 댔습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아주 어릴적부터 니네 키우느라 아빠 힘들게 고생하시니 너라도 힘이 돼 은혜에 보답하거라. 말썽만 부리고 다니는 형보다 말 잘 듣던 저에게 식구들 일가친척 모두 볼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 했습니다. 아버지도 옛날분이시라 장남몰빵 디폴트셨고 늘 형이 우선순위에 저는 뒷전이었고요. 구구절절 이야기 하기엔 좀 찌질해보이겠네요. 헿...

본격적으로 형이 막나가기 시작하던 중학생 시절... 긍까 저 열살 무렵부터 넌 착해야된다는 강요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특히나 너까지 속 썩이면 니네 아버지 돌아가신다는 어른들 말은 협박이었어요. 아니 공포심에 가까웠겠네요. 어른들이 기대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버거웠어요. 아무리 어른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착한 어린이가 되어도 형이 학교에서 사고쳐 며칠이고 잠수타면 집안 분위기는 더없이 험악했고 어른들 화풀이는 제가 감당해야 했었죠. 그럴때마다 전 주늑이 들어 더더욱 착한 아이 연기를 했습니다.

어느덧 저도 중학생이 되었고 반항심이었는지 사춘기였는지... 성적이 떨어진 어느날이었어요. 성적표를 보신 아버지는 밥상을 엎고 제 뺨을 때리셨죠. 그리고 걸어다니지도 못할 만큼 매를 맞았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못된 아이였거등요. 매보다 더 숨막혔던건 잘못했다고 빌라던 할머님이셨어요. 너까지 이렇게 말 안들으면 어떡하니. 니네 아빠 고생하는것도 모르고 [안그러던 아가 왜 이러니] .... 그렇다고 제가 2호선 라인 대학 갈 수준 머리 좋은 애도 아니었고 그냥 고만고만한 애들중에 좀 잘하는 축이었는데도 전 말 안듣는 못된 아이가 되었어요.

그날 이후 다시 전 어른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아이로 살았습니다. 딱 학력고사 날까지만요. 졸업과 동시에 연을 끊다시피 집에서 독립한 순간 그 착했던 저는 더이상 없었어요. 이기적이고 못된 슈바만 있었습니다. 친척들이 그러더군요. 어릴때 그렇게 착하더니 애가 영 배려부렀다. 또 피눈물도 없는 불효막심한 놈이라고도 했어요. 그말을 들은 전 웃었어요. 아니 통쾌했어요.

아닌데... 그동안 착한 척 했던건데... 이 악물고 오늘만 기다렸던 건데... 이게 원래 난데... 바보들 ㅋㅋㅋㅋㅋ

이후로는 그냥 최소한의 자식 노릇만 하며 데면데면 살았어요. 그래서 전 완벽하게 착한아이에서 벗어난 줄 알았습니다. 집 대문을 나서고 20년을 훌쩍 그리 살았으니 착한 아이 연기하지 않아도 되었거든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형이 나타났을 때 그 지긋지긋한 저주가 스멀스멀 살아 났어요. 누워 있는 형과 걱정스런 얼굴의 형수, 조카네 얼굴을 보자 메아리치듯 머리속을 울렸어요. 넌 착해야 돼 넌 착해야 돼 착해야 돼... 솔직히 저도 병원비 대기 싫었습니다. 형이란 인간에게 10원 한장도 쓰기 너무 싫었어요. 매달 병원비 내면서도 욕했어요. 다른 식구들 피해주지 말고 빨리 죽으라구요. 나도 더이상 착한척 하기 싫고 그러고 있는 나도 너무 싫고...

그런 제 바램이 통했는지 1년 조금 안되게 있다 형은 떠났습니다.

형의 장례를 마치고 49제가 끝난 날 전 무언가 홀가분해졌습니다. 이젠 착한아이 노릇 더이상 안해도 되겠구나. 해야할 가족이 이젠 한명도 없으니... 참 잘되었다.

정말 좋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9-21 11:33)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70
  • 토닥토닥.
  • 힘내시길 바래요
  • 행복하시길...
  • ㅠㅠ
  • ...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87 일상/생각천하장사 고양이 3 아침커피 20/07/21 4380 9
988 문화/예술지금까지 써본 카메라 이야기(#03) – Leica X2 (이미지 다량 포함) 12 *alchemist* 20/07/23 5142 7
989 여행속초, 강릉 여행 가볍게(?) 정리 36 수영 20/07/27 5602 9
990 역사1911년 영국 상원의 탄생 2 코리몬테아스 20/07/27 4580 6
991 문학사랑하는 법 26 아침커피 20/07/28 5470 36
992 창작내 작은 영웅의 체크카드 4 심해냉장고 20/08/05 5369 16
993 일상/생각설거지 하면서 세탁기 돌려놓지 말자 24 아침커피 20/08/06 6099 49
994 철학/종교최소한 시신은 없었다 6 아침커피 20/08/10 5359 17
995 일상/생각풀 리모트가 내 주변에 끼친 영향 16 ikuk 20/08/12 5094 30
996 여행[사진多/스압]푸른 파도의 섬 - 울릉도 이것저것 23 나단 20/08/15 4851 18
997 요리/음식대단할거 없는 이탤리안 흉내내기. 15 legrand 20/08/16 5187 22
998 문화/예술술도 차도 아닌 것의 맛 7 아침커피 20/08/17 4557 19
999 정치/사회섹슈얼리티 시리즈 (7) - 마이 리틀 섹시 포니 28 호라타래 20/08/18 7147 25
1000 일상/생각뉴스 안보고 1달 살아보기 결과 10 2020禁유튜브 20/08/18 6074 29
1001 일상/생각타임라인에서 공부한 의료파업에 대한 생각정리 43 거소 20/08/25 8715 82
1002 요리/음식토마토 파스타 맛의 구조와 설계 그리고 변주 - 1 21 나루 20/08/26 5856 14
1003 문화/예술한복의 멋, 양복의 스타일 3 아침커피 20/08/30 4847 5
1004 철학/종교나이롱 신자가 써보는 비대면예배에 대한 단상 14 T.Robin 20/08/31 4959 6
1005 일상/생각어른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사람 되지 마세요. 27 Schweigen 20/09/07 7616 70
1006 기타온라인 쇼핑 관련 Tip..?! - 판매자 관점에서... 2 니누얼 20/09/16 4313 12
1007 일상/생각가난해야만하는 사람들 53 rustysaber 20/09/20 6710 25
1008 일상/생각나는 대체가능한 존재인가 15 에피타 20/09/23 5541 26
1010 경제주식투자, 튜토리얼부터 레이드까지 37 기아트윈스 20/09/23 7704 28
1009 문화/예술초가집과 모찌떡과 랩실 7 아침커피 20/09/24 4496 17
1011 문화/예술여백이 없는 나라 13 아침커피 20/09/29 6217 36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