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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 23:49:15
Name   아복아복
Subject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나고
1주일 뒤의 엄마 생일을 미리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고향에 간 김에 2년 넘게 보지 못했던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났다.

5년 전 결혼한 친구는 결혼한 다음 해에 태어난 아들이랑 이제 7개월이 된 딸이 있다. 친구가 아이들 때문에 밖에 나올 수가 없으니까 내가 친구네 집으로 갔다.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이렇게 진득하니 앉아 얘기를 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학부 시절에야 집에 가면 이틀, 사흘씩 있다 오면서 친구들도 만나고 그랬었다. 그러던 것이 서울살이가 10년을 넘어가다 보니 이제는 서울의 조그만 내 자취방 한 구석 침대가 고향보다는 훨씬 더 편해서 고향엘 가도 엄마 아버지랑 겨우 식사나 한 끼 하고 바로 서울로 오기에 바쁘다. 그러다 보니 고향에 있는 친구들하고도 카톡이나 전화나 주고 받지 만날 일이 정말 없다. 이번에도 집에만 잠깐 있다 오려던 것을 얼마 전 친구가 생일 축하한다고 카톡을 줬던 게 생각나 급하게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친구 첫째가 태어난 다음에 친구를 봤던 건 첫째 돌잔치랑, 아직 둘째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친구가 엄마에게 첫째 아기를 맡기고 잠깐 짬을 냈던 때가 전부였다. 친구도 오랜만이었지만, 친구 아기들을 제대로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친구 아기들은 너무 예뻤다. 첫째랑은 낯을 좀 가리다가 좀 친해진 다음에는 늑대인간 물리치는 장난을 하면서 재밌게 놀았다.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 신이 난 꼬마 친구랑 놀아주는 사이사이 친구와 근황 토크를 한다고 하는데, 못 본 지 너무 오래 된 데다 아기들이 있다 보니 계속 대화가 끊겼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동창들끼리 만나면 항상 그러듯이 자연스럽게 중고등학교 시절 얘기가 나왔다. 같은 중학교 졸업한 애들 중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는 애들은 대부분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로 진학했기 때문에 내 고등학교 친구들은 두어 명을 제외하면 중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같은 재단에 소속된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에서 6년을 함께 보냈다.

모교는 면 단위 학군과 가까웠던, 역 근방의 쇠락한 구도심에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주일과 하춘화의 조우와 관련해 기억하는 폭발 사고가 난 바로 그 역 근처에 내 모교가 있다. 천 몇 백 년 전 패망한 왕조의 전설이 담긴 유적지들이 남아있을 뿐이었던 내 고향은 일제가 곡창지대에서 수탈한 물산들을 좀 더 빨리 본토로 실어 나르기 위해 철로를 놓으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해방 이후 조국 근대화를 위해 몸 바칠 것을 천명했던 대통령이 고향을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하면서 더 이상 농사로만 먹고 살 수 없게 된 곡창지대의 사람들은 일제가 놓았던 철로를 따라 소도시 외곽에 위치한 공단에 모여들었다. 60년대에 설립된 모교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 그렇게 흘러 들어온 시골 출신 '공순이'들을 위해 야간학급을 개설했다.

값싼 노동력이 경쟁력이 되었던 시기가 지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고향에는 신도심이 조성되었고 그곳엔 우후죽순으로 아파트가 생겨났다. 면 소재지나 구도심에 살았던 이들 중 어떤 이들은 그곳에 다시 자리를 잡았지만, 그러지 않은, 또는 못한 이들도 있었다. 내 동창들 중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학교는 그저 가까운 곳이 좋은 학교라고 믿는 부모들에 의해 집에서 제일 가까운 학교에 진학한 애들이 좀 더 많았다. 나를 포함해 그런 애들은 논밭으로 둘러싸인 촌구석 아니면 기껏해야 2층 이상이 되지 못하는 낮은 건물들이 즐비한 구도심에 집이 있었다.

우리들은 야간학급이 사라지고 거의 10년이 지나 같은 재단의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IMF 직후 2000년대 초반의 시골 부모들이 딸과 아들에게 바랐던 건 산업체특별학급이 있던 시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나 같이 특히 더 시골에서 온 애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여자애가 서울로까지 대학을 가다니 시집은 다 갔다는 진심 어린 걱정을 친척들에게 들어야 했고 고등학교 동창들도 이걸 듣고는 다들 기함을 했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에 학교라고 해서 크게 다른 분위기였던 건 아니다. 대부분이 남자였던 선생님들은 여자 직업으로 교사가 얼마나 좋은지를 역설했고, 대학 원서 접수 전 나는 교장실에 끌려가 여대에 가면 시집을 잘 간다는 훈계를 들어야 했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을 꿈꿨던 몇몇조차도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엄마들의 말을 -비록 엄마들이 그렇게 말할 때는 미친듯이 화를 냈어도-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틀린 말은 아니라고 뇌까렸다. 원체 지방이라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마그넷이니 씨지브이니가 있는 신도심 주변의 학교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판검사나 교사, 의사 말고는 좋은 직업을 상상할 수 없었던 우리들 중 공부를 잘한 대부분은 '가성비가 좋은' 지방 교대에 진학했다. 여자애들의 성적을 그저 최소 비용 최대 효과 식의 경제 논리로만 이해하는 어른들을 뒤로 하고 나는 드물게 유복했거나 또는 죽어도 엄마 아버지처럼은 살고 싶지 않았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왔다. 물론 이들은 매우 소수였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고향에 남았다. 어제 만난 친구도 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고향의 자기 집에 머물렀다.

오전 일찍 도착해서 저녁 시간 맞춰 동생이 날 데리러 올 때까지 한참을 친구 집에 있었다. 꽤 오래 있었는데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절반도 채 다 얘기하질 못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동생 전화를 받고 급하게 짐을 챙겨 나오면서 친구랑 친구 아기에게 곧 또 보자고 인사를 했다. 동생 차를 타고 집에 가는데 친구가 괜히 눈물이 난다고, 주책이라고 카톡이 왔다. 친구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나도 좀 울었다. 대학 친구들이나 사회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이들 중에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이들을 만났을 때는 눈물이 나진 않았다. 결혼 생활이나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짐작을 하고, 그만큼 그이들과 내 생활이 다르다는 것도 알지만, 그런 그이들을 만나 슬픈 적은 없었다. 그이들은 나와 물론 다르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다르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친구랑 헤어지고 온 저녁 밤에도, 그 다음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도 계속 울컥했던 건 시간이 흐른 만큼 벌어진 우리의 거리를 새삼 실감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공유한 그 시절, 300원 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생각 없이 까르르 웃기만 해도 됐던 그 시절로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꿈 많았던 그 시절로부터 10년 넘게 지나온 시간, 그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는 그 시간 동안 우리들은 서울과 고향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어져 버렸다는 것. 주체할 수 없이 목이 메어왔다. 어릴 적 너무나도 떠나고 싶었던 내 고향, 정말이지 지긋지긋하지만 결코 떠날 수 없는 그 지방소도시로부터 멀어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친구 말마따나 주책 맞게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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