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06/29 11:33:14
Name   순수한글닉
Subject   안티테제 전문
지금껏 제 직업을 말씀드린 적이 없었는데,
저는 편집자예요. 작가들의 안티테제를 맡고 있죠.
타고나길 정반합의 반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언어적으로 못난 적도 없어서 이 직업을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스아실 좀 잘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모르겠네요.
별로 잘하는 거 같지 않아요.
지친 걸까요?

편집자는 사실 마취과 의사같은 존재입니다.
있는데? 없어요.
환자는 마취과 전문의를 본 적이 없는데, 마취과 전문의는 환자를 보죠.
독자는 편집자를 접한 적 없지만, 편집자는 독자를 봅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아드님은 마취과 전문의의 이런 쓸쓸함을 좋아하셨다고 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나의 손길이 닿은 책을 서점에서 사가는 것을 보고 비록 사람들은 날 모르지만
그저 바라보고 있는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근데 지금은 아닌 거 같아요.
시작은 나의 작업이 부정당하는 경험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진심을 글로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지만
전문 작가가 아닌 이상(전문 작가여도!) 못 합니다(not good이 아니라 impossible).
몇몇 분은 나는 아닌데! 라고 하시겠지만
그리고 대형 커뮤니티 홍차넷에서는 능력자 분들이 많아서 진짜로 아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편집자는 행간과 자간 사이 스며든 진심를 잡아내어 새 언어로 다듬곤 하죠.
그 결과 내가 쓴 것도 쓰지 않은 것도 아닌 글이 나오지만 튼.....
얼마 전에 그렇게 작업한 결과물이 그대로 폐기되었어요. ㅠ_ㅠ
작가가 자신의 글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다고 해서.
사람에 따라 아니꼽게 볼 사상도 있고, 맞춤법도 주술도 안 맞는 이상한 글이 천지인데
그냥 그래라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힘이 쭈욱-빠지네요.
지금까지 이런 경험이 없어서. 칭찬을 들었으면 들었지.....

그러고 나니 누군가의 뒤에서 보조해 주고 그 영광(?)을 지켜보기만 하는 게 답답해졌습니다.
나도! 나도! 유명해지고 싶어!!! ㅋㅋㅋㅋㅋㅋㅋ
그렇다고 작가가 될 떡잎은 아닌데 나는.....

안티테제의 한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죠.
어디까지나 테제가 나온 후에야 등장하는 존재입니다.
실제로 안티테제 전문인 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 서툴죠.
(작가들의 이야기의 구멍들을 찾아내고 지적하고 메우기는 잘합니다만....)

그래서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원고 볼 시간에 이러고 있다는 게 이에 대한 반증이고요.

저번에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만, 이런 주저리가 가능한 곳은 여기뿐이라 남기고 갑니다.
어느날 지워져 있을지도?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7-11 22:3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4
  • 자신있게 해오던 업무에 대한 회의감이 절제된 문장으로 표현된 것이 인상적입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39 일상/생각아주 작은 할아버지 20 소라게 17/11/03 6628 36
465 정치/사회홍차넷 20000플 업적달성 전기 89 파란아게하 17/07/04 7956 36
401 기타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나라 15 烏鳳 17/03/28 6978 36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594 35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787 35
1234 일상/생각우리는 조금씩 성장한다. 4 whenyouinRome... 22/09/05 3803 35
1144 일상/생각어느 유서깊은 양반가문 이야기. 18 Regenbogen 21/11/16 5489 35
1119 일상/생각족보 4 私律 21/08/20 3951 35
1094 일상/생각엄마는 내 찢어진 츄리닝을 보고 우셨다 3 염깨비 21/06/04 4803 35
1087 일상/생각어느 개발자의 현타 26 거소 21/05/04 7541 35
1085 기타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키즈카페 추천 2 쉬군 21/05/04 5812 35
1046 정치/사회만국의 척척석사여 기운내라 15 아침커피 20/12/29 5998 35
928 역사역사학 강연에서 의용대를 자처하는 이들을 만난 이야기 13 Chere 20/02/29 5391 35
743 정치/사회한 전직 논술강사의 숙대 총학의 선언문 감상 40 烏鳳 18/12/11 7456 35
735 정치/사회형벌의 목적, 책임주의, 그리고 음주운전 28 烏鳳 18/11/20 6352 35
715 여행이별 후 홀로 여행 6 곰돌이두유 18/10/14 6828 35
595 일상/생각따듯한 난제 10 Homo_Skeptic 18/02/23 5769 35
441 기타사람은 아픈만큼 성숙해지지 않는다 11 소맥술사 17/06/01 6383 35
378 일상/생각내 잘못이 늘어갈수록 20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7/03/02 5902 35
1388 기타잡담)중국집 앞의 오토바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27 joel 24/04/20 3436 34
1317 일상/생각사랑하는 내 동네 7 골든햄스 23/08/01 2679 34
1251 일상/생각농촌생활) 7.8.9.10.11월 23 천하대장군 22/11/15 3047 34
1128 게임월간 스타여캠 9월호 (비정기 간행) 25 알료사 21/09/18 5606 34
1100 일상/생각안티테제 전문 29 순수한글닉 21/06/29 4885 34
1072 기타그럼에도 사랑하는 너에게. 9 쉬군 21/03/22 4451 3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