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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11/19 17:05:20
Name   순수한글닉
Subject   회사 식당에서 만난 박수근

저희 회사의 점심밥은 공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맛집을 기웃거리게 되는 건
흰밥에 반찬이 토스트가 올라오는 날이 꽤 많고
영양사 분이 유튜버인가 라는 생각이 킹리적갓심일 정도로 괴식이 자주 출몰하며
채소 양이 너무 적다는 이유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이 "공짜잖아."라는 말로 퉁 쳐지는 곳, 그곳이 저의 일터입니다.

황량한 월급통장을 어떻게든 윤택하게 써 보자고 마음먹으면 사내식당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끼 9000원을 호가하는 도심의 맛집 가격은 부담스러우니까요.
면발과 소스만 가득한 쫄면에서 얇게 채썬 오이와 당근을 뒤지고 뒤져 식판에 덜고
국보다 간장맛이 강한 맹물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액체에서 어떻게든 유부와 두부를 찾아 먹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버팀입니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버팀이 아니고
그저 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꽉꽉 눌러 담는 버팀이죠.

얼마 전에 박수근 전시를 다녀왔는데
그림 속에서 문득 저의 버팀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없던 시절에 그는 화가로서의 일도, 가족을 부양하는 것도 저버리지 않았다'는 작가 박완서의 증언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의 그림 속에 똑같지만 다른 노동자들, 길가의 여인들, 집에 들어가는 여인들을 보면 느껴집니다.
그가 먹고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먹고살았다는 것을.


전시관 한켠에 자리잡은 "청소부"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2002년에 발견되었죠.
그 전까지 평론가들은 박수근이 남성은 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수근은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청소며 설거지며 빨래며 진짜 살림을 도맡아야 했기에 여성의 노동에 존경심을 가졌을 겁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전쟁으로 남성들이 목숨을 잃고 가정의 생계를 여성이 책임져야 했던 때였기에
그림에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요.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기존 평론가들은 박수근을 여성을 그리는 화가라고 단편적으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소부라는 그림은 당당하게 그 납작한 편견을 깼고요.
일하는 사람들을 화폭에 담는 일을 하며 박수근은 버팀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라던데, 어쩜 그가 각자의 버팀을 알아줘서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그에게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는 버팀을 바라보는 제3자이자, 그 자신도 하루를 부끄럽지 않게 버티는 당사자이기도 했어요.
박수근의 그림 특징이라 하면 역시, 우둘투둘한 마티에르죠.
그가 물감을 쌓아 마티에르를 자유자재로 구현하기 위해 연구한 흔적이 전시 내내 보였습니다.
프로타쥬를 그려 울퉁불퉁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현되는지 연구했어요.
50년대 그림은 물감의 뭉침이 불규칙적이고 우연의 합이지만 말년이 될 수록 물감의 뭉침은 의도적이고 표현의 일부가 됩니다.




그 정점을 저는 "고목과 여인" 그림에서 보았습니다.
까맣게 벌어진 나무껍질이 내 앞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입체감, 고단했던 나무의 흔적이 마티에르로 표현되어 있었어요.
이것을 표현하기까지 그는 가족들의 부양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많은 시간 혼자 고심했겠죠.



켜켜이 쌓인 물감 자국을 가까이서 보면 회색과 흰색 안에 민트와 다홍, 빨강과 파랑 물감이 숨겨져 있답니다.
마치 샤넬 트위드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은 느낌 (물론 샤넬은 사치품이지만)

겸손하지만 당당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던데, 정말 그 성품이 화폭에 있어서
존경심이 났습니다. 자신이 남긴 것에 자신을 담아 불멸의 삶을 사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엘리트 교육을 받아서,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여서가 아니라
그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버텨낸 결과물이라는 점이 절 더 겸허하게 만듭니다.
천재 예술가의 작품은 절 위압하며 누르는 느낌이 있었는데(작품은 좋았지만)
박수근의 작품은 품어준다는 느낌이었어요.

박수근은 초등학교만 겨우 마쳤습니다. 그림은커녕 공부 자체를 할 형편이 되지 않았거든요.
초등학교 담임이었던 오득영 선생님의 격려 덕분에 꿈을 버리지 않고 화가가 되었죠.
훗날 박수근은 선생님께 자신의 작품을 많이 선사합니다.
그중 하나가 이 "도마 위의 조기"예요.

전쟁 중(1952년) 완성된 작품인데, 물자가 부족했던 때라 캔버스가 아니라 미군이 쓰고 버린 박스 종이 위에 그려졌답니다.
조기를 살 형편이 되지 않지만, 캔버스를 마련하기도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답례하는 그의 성품이 느껴지지 않나요.
또박또박 쓴 연하장의 글씨도 그래서 더욱 감동적입니다.


연말을 코앞에 두고 나도 조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현실 속의 많은 사람들이 있네요.(다행히도!)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곳에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하소연 한풀이 하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홍차넷 횐님들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박수근 전시도 꼭 가보시고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 중이에요)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11-30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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