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2/12/09 21:29:34
Name   문학소녀
Subject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세계관 최강자가
  아이들 낳아 키우면서 제일 피곤한 건 엄마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 같아요. 가장 흔한 예로는 여름에 열 많은 아기 시원하게 입혀나가면 아기 춥다고 뭐라하는 사람 꼭 만나거나, 햇빛 가리려고 시원한 여름 가디건 입혀나가면 아기 덥다고 뭐라하는 사람 꼭 만나는 게 있을거고요. 어련히 아기 엄마가 알아서 했겠죠? 알아서 할 수 있는 아기 엄마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저런 발언과 참견이 나올 수 있는거여요.


  전 별명이 청교도라 거의 검은색 옷만 입는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아기 키우면서 검은 옷 입지 말라는 소리도 들어봤답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에게 제가 이미 들킨만큼 싸가지가 없어서 속으로 씨발 데오도란트 사는대신 검은 옷 산건데 이러고 말긴 하는데 누군가가 저에게 자격 없는 고나리질 하는 상황 자체를 종종 겪어야 하니까 빡이 많이 쳐요. 저희 쌍둥이들 18개월 무렵이었나, 18개월이면 아직도 한참 짐썽일때입니다, 제가 고려대 앞 사거리에서 저희 애들 유모차에 가둬놓고 신호 기다리다가 한 여학생이 본인 남자친구에게 어휴 나는 결혼해서 쌍둥이 낳으면 절대 옷 똑같이 안 입힐꺼야! 라고 저를 흉보는 소리도 들어보았어요.


  이때부터였어요.. 제가 고대생이면 싸잡아서 싫어하게 된게.. ㅋㅋㅋㅋㅋ


  이야기속의 여학생, 굉장히 무례하죠? 어째서 저렇게까지 무례할 수 있는걸까요? 이 역시 엄마의 권위를 무시하기 때문에 저런 무례함이 가능한거겠지요. 이 세상에(주 양육자가 엄마였을 때) 엄마보다 아이들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엄마보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이 절대적인 위치를 무시당하는 경험을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정말 수백 수천번은 겪은 것 같아요.


  특히 저는 첫째들이 성별이 같은 딸쌍둥이여서 불시에 취조도 참 많이 당했답니다. 둘 중에 더 이쁜 애가 있냐고 검문 참 많이 받았더랬어요. 어투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죠. 이 사람이 그냥 단순히 쌍둥이를 만나서 궁금해진건지 혹시 제가 쌍둥이를 차별하고 있을까 의심하는건지 알 수 있어요. 전 이럴 때도 속으로 씨발 둘 다 싫어하는데 이러고 말긴 하지만 새삼 너무나 놀라워요. 사람들이 모두가 아기 엄마는(혹은 주양육자는) 자격이 없고 틀림없이 잘못 키우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아기가 잘못 자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다들 왜 이렇게 단정짓는 걸까요. 재미있게도 그건 엄마의 위치가 엄마의 역할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어요. 다들 성장과정에서 주양육자에 의한 상처가 있지요. 그리고 다들 저 아기는 내가 받아야만 했던 상처를 부디 모른 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랐으면 하는 것이고요. 생판 모르는 아기지만 여름이라도 발이 안 시렸으면 좋겠고 그런데 여름에 땀띠도 안 났으면 좋겠고 아무리 어린 아기지만 아기 엄마가 잘 존중해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줘서 옷을 입혀줬으면 그렇게 자라줬으면 하는 거겠지요. 각자의 오래된, 그러나 아물기는 요원한 상처에서 시작된 감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엄마의 역할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 권의는 인정해주지 않는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모순이 저는 이해가 되면서도 무척 안타깝습니다.


  주양육자와 아기 사이에는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역사가 있어요. 우리가 보는 단편적인 모습은 주양육자와 아기가 오랜 시간 상호 작용을 통해 합의된 최선의 것일 거고요. 그래서 그 모습은 혹 문제가 있어 보일지라도 둘 사이에서는 문제가 안 될 확률이 높고 또 설령 진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아기한테 대부분 괜찮아요. 아이들은 생각 이상으로 건강하고 단단하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잘못되지 않습니다.


  돌아와서 저는, 제가 귀찮아서 혹은 쌍둥이들을 고유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아서 옷을 똑같이 입힌 게 아니었답니다. 제가 타임라인에도 한번 쓴 적이 있는데 다르게 입히면 상대방이 더 예쁘게 느껴지기 때문에, 저 년이 나보다 예쁜것은 용납할 수 없어 하기 때문에 똑같이 입혀주었어요. 이 규칙은 저와 아이들이 우리만의 시간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생성되게 된 것인데 이 시행착오는 엄마의 고유의 영역이자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 이것이 치매당했을 때 유독 개빡친답니다. 실제로 전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보다 저의 엄마로서의 능력과 노력을 의심당했을 때 맘 속에 이는 불길을 잠재우느라 더 많은 공력을 써 온 것 같아요.


  저희 아이들이 걷지도 못하는 아기들일 때 하루종일 집에서 씨름하다보면 전 우리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같았답니다. 우리 아이들이 주인공이라면 전 조력자 역할을 맡은 킹왕짱 쎈 주요인물이겠지요. 얘들이 각성하여 찐 주인공이 되기 전까지의 시절 속에서는 세계관 최강자인 것이어요. 그리고 이 역할은 그 누구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12-18 18:09)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74
  • 추천! 많은 분들이 읽어야, 알아야, 소문내야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ㅎㅎ
  • 대존잼
  • "다르게 입히면 상대방이 더 예쁘게 느껴지기 때문에, 저 년이 나보다 예쁜것은 용납할 수 없어 하기 때문에 똑같이 입혀주었어요" ㅋㅋㅋㅋ
  • 킹.갓.소.녀.사.랑.해.요.
  • 눈나아~~~
  • 글빨 좋은 수필글은 늘 추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72 정치/사회비전문가의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 향후 추이 예상 20 호타루 22/02/28 4853 28
460 역사삼국통일전쟁 - 2. 살수대첩 22 눈시 17/06/26 4863 14
1160 일상/생각리을 이야기 23 아침커피 22/01/10 4864 68
1100 일상/생각안티테제 전문 29 순수한글닉 21/06/29 4868 34
1091 정치/사회섹슈얼리티 시리즈 (완) - 성교육의 이상과 실제 18 소요 21/05/18 4878 27
437 일상/생각[회고록] 그녀의 환한 미소 17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7/05/24 4881 13
1052 정치/사회건설사는 무슨 일을 하는가? 13 leiru 21/01/13 4894 16
459 일상/생각급식소 파업과 도시락 3 여름 소나기 후 17/06/30 4899 5
1159 경제OECD 경제전망 - 한국 (전문번역) 8 소요 22/01/06 4906 21
747 역사1592년 4월 부산 - 충렬공(忠烈公) 1 눈시 18/12/19 4908 8
1256 기타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세계관 최강자가 68 문학소녀 22/12/09 4911 74
957 기타출산과 육아 단상. 16 세인트 20/05/08 4926 19
968 정치/사회미국 제2의 독립기념일과 트럼프 - saying the quiet part out loud 8 다시갑시다 20/06/12 4930 15
284 일상/생각보름달 빵 6 tannenbaum 16/10/14 4932 14
814 역사삼국통일전쟁 - 14. 고구려의 회광반조 3 눈시 19/06/03 4938 12
1004 철학/종교나이롱 신자가 써보는 비대면예배에 대한 단상 14 T.Robin 20/08/31 4939 6
1058 문학오늘부터 5월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는 20 순수한글닉 21/02/04 4944 24
1195 정치/사회검경수사권 조정- 국가수사총량은 얼마나 증발하였나 36 집에 가는 제로스 22/05/02 4954 44
893 역사역사 교과서 속 신문들, 어디로 갔을까? 2 치리아 19/11/25 4974 6
1053 일상/생각34살, 그 하루를 기억하며 8 사이시옷 21/01/21 4975 30
954 일상/생각큰고모님 4 Schweigen 20/05/02 4984 27
768 역사삼국통일전쟁 - 11. 백제, 멸망 8 눈시 19/02/10 4985 19
1148 기타서울대병원 응급실에 대한 단상 6 경계인 21/12/03 5001 14
279 역사러일전쟁 - 개전 13 눈시 16/10/10 5012 4
1109 게임워크래프트 3)낭만오크 이중헌의 이야기. 첫 번째. 21 joel 21/07/22 5022 16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