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3/03/30 00:19:53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전두환의 손자와 개돼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나, 집안의 강권으로 강남 인근 입시학원 주말반을 다녔다.
당시 나는 그다지 공부할 의지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삼삼오오 자기들끼리 친한 그룹 사이에서 홀로였다.
그럼에도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갈 수는 없었으므로 교실 안에서 시간을 한땀씩 저며내거나,
가끔은 PC방으로 도망가 게임을 하고 손으로 썼던 소설을 텍스트파일로 옮기는 식으로 하루를 흘려보냈다.

어느날인가 같이 땡땡이 치는 놈이 하나 있었다.
흔히 말하는 근육돼지 스타일로 풍채가 좋았고, 머리는 바짝 깎은 놈이었는데 목소리가 낮았다.
덕질에 조예가 있다는 점에서도 어째 쿵짝이 맞아서 어느샌가 매주 PC방으로 도망가는 동료가 되어 있었다.
인터넷 아이디로 '개돼지'를 쓰던 녀석이라 그 뒤로 늘 개돼지라고 불렀다.

대학 진행 후에도 몇년인가 교류가 계속되었다.
내가 즐겨찾던 IRC 채널에 개돼지를 초대하고, 종종 만나 술을 마셨다.
건대 근처에선 로티보이서 파는 바닐라아이스크림에 바카디151을 부어 먹었고,
군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엔 율동공원으로 놀러가 번지점프를 하기도 했다.

개돼지는 꽤나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다.
말술이었고, 키스방에 들락거렸고, 온갖 여자들과 자고 다녔다.
대학교 입학 후 1~2년이 지났을 즈음에는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었다.

내가 제대하기 전에 사소한 문제가 관계가 틀어졌고, 그 뒤로 보지 않았다.
페북 친구도 야멸차게 끊어버렸다.
언젠가 전화인가 문자가 왔었는데, 나는 먼저 사과나 하라고 요구했었던 게 기억난다.

3년 전 즈음에 문득 생각나 페이스북을 들여다 보니 개돼지는 이미 몇년 전에 죽었고,
그 친구들이 와서 개돼지를 그리는 글들을 몇개인가 남겨두었을 뿐이었다.
나와 개돼지 사이의 관계에는 겹치는 인맥이 없어 상황을 물어볼 곳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개돼지가 왜 20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매일 같이 마시던 술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오늘 헬스장에서 쇠질을 하고 있자니 전두환의 손자가 불구속 입건되어 석방되었고, 석방 직후 광주로 향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보았다.
20대 중반을 갓넘긴 그 손자가 어떤 삶과 날을 살아왔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가십 수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고, 어떤 연유에서 마약을 하고 종교에 빠지고 할아버지를 학살자로 지칭하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찌되었던 5.18 희생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학살자의 손자는 그 일가 중 그나마 바람직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문득 개돼지를 떠올렸다.
개돼지는 종종 자신을 송요찬의 손자로 규정했었다.

송요찬은 일본 육군 상사까지 진급했었고, 해방 이후 한국군 장교로 활동했다.
4.3 사건 때에는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6.25 때는 맹장으로 활약했으며,
4.19 때는 무력 사용 금지 지시를 내려 혁명이 성공하도록 도운 반면, 5.16으로 세워진 군사정권에서는 국방부장관을 맡았다.
그러다 개돼지가 태어나기 8년 전인 1980년에 시카고에서 죽었다.

개돼지는 송요찬의 손자였고, 그다지 깨끗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은 외가의 외손주였다.

개돼지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중력에서 항상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개돼지는 압구정에 사는 부유층이었으나, 그 재산은 선대의 부정에서 비롯했다는 걸 알았다.
개돼지는 흔히 말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나, 집안은 선대의 유산을 떠받들고 있었다.
개돼지는 독재정권의 부당함을 이야기했지만, 먹고 사는 데에 쓰는 돈은 그 부당함에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그래서 개돼지는 아마 무너졌던 게 아닐까 싶다.

이렇든저렇든 시간의 굴곡은 굽이치고, 개돼지가 죽은지도 이제 10년이 다 되어간다.
천수를 누리고 간 독재자의 손자는 아직 죽지 않고 광주에서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러한 실존의 고민 없이 과실만을 맘 편히 누리는 자들은 오래, 그리고 잘 살 것이다.  개돼지와는 달리.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4-11 07:4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45
  • 지려버렸습니다...ㄷㄷ;;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69 기타2022 걸그룹 결산 10 헬리제의우울 23/01/23 3225 22
1270 경제인구구조 변화가 세계 경제에 미칠 6가지 영향 14 카르스 23/01/27 4205 10
1271 일상/생각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한 때 12 스라블 23/01/27 3245 25
1272 일상/생각내 인생 가장 고통스러운 명절연휴 6 당근매니아 23/01/31 3055 33
1273 정치/사회석학의 학술발표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왜곡되어 소비되는 방식 14 카르스 23/02/03 4083 33
1274 정치/사회통계로 본 비수도권 청년 인구유출 추이 8 카르스 23/02/06 3781 9
1275 일상/생각8년 프리터 수기 14 아이솔 23/02/06 4025 32
1276 일상/생각내돈내산 뷰티템 리뷰 13 Only 23/02/08 3274 20
1277 기타참깨, 들깨 생육 개론 19 천하대장군 23/02/08 3550 14
1278 정치/사회인생을 망치는 가장 손쉬운 방법 22 아이솔 23/02/13 5860 18
1279 정치/사회한국인과 세계인들은 현세대와 다음 세대의 삶을 어떻게 보는가 7 카르스 23/02/15 3912 6
1280 일상/생각자격지심이 생겨났다가 해소되어가는 과정 14 골든햄스 23/02/22 4449 43
1281 일상/생각직장내 차별, 저출산에 대한 고민 26 풀잎 23/03/05 3964 17
1282 기타느긋함과 조급함 사이의 어딘가 8 하마소 23/03/08 2751 17
1283 기타아빠. 동물원! 동물원에 가고 싶어요! 27 쉬군 23/03/14 3214 61
1284 일상/생각20개월 아기 어린이집 적응기 18 swear 23/03/21 3025 29
1286 꿀팁/강좌농업용 관리기 개론 8 천하대장군 23/03/23 3367 10
1285 일상/생각챗가놈 생각 4 구밀복검 23/03/25 2845 19
1287 정치/사회미국 이민가도 지속되는 동아시아인의 저출산 패턴 30 카르스 23/03/28 5809 16
1288 일상/생각전두환의 손자와 개돼지 3 당근매니아 23/03/30 3314 45
1289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1. 원작 만화처럼 로맨스 즐기기 16 서포트벡터 23/04/03 3135 9
1290 의료/건강70일 아가 코로나 감염기 9 Beemo 23/04/05 2467 6
1291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2. 샐리의 짝사랑 14 서포트벡터 23/04/05 3041 12
1292 정치/사회미국의 판사가 낙태약을 금지시키다 - 위험사회의 징후들 4 코리몬테아스 23/04/11 3333 27
1293 일상/생각인간 대 사법 3 아이솔 23/04/11 2592 17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