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4/03/03 12:52:00
Name   김비버
Subject   소회와 계획
1.
중고등학교 때는 문학소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교조 활동 열심히 하는 좌파 국어 선생님들을 시작으로 사회운동 하시는 아버지 친구 좌파 변호사님을 많이 따랐었고, 일찌감치 '철학과굴뚝청소부' 부터 (왠지 모르는 과정을 거쳐) '통일'로 이어지는 커리큘럼을 접했습니다. 진달래를 주제로 한 시들을 쓰기 시작했고, 철쭉피는 4월이 오면 꼭 사진을 찍으러 나가곤 했습니다. 지금도 마음 한켠에 갖고 있는 파르티잔 감성이 어쩌면 저 때 배양됐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2.
자연스럽게 대학에서는 운동권으로 분류되는 동아리에 가입하였고, 각종 좌파 사회과학 책들을 계보와 체계 없이 막 읽었습니다. 그러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탈퇴하고, 2학기부터는 0점대의 처참한 학점을 복구하고자 전공인 경영학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말랑말랑한 20살 학생의 뇌는 경영학에 전제된 광활한 우파적 세계관을 거부할 수 없었고, 그때부터는 스스로를 시장주의자, 반재벌주의자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시장을 통한 자원분배가 정치적 의사결정을 통한 자원분배보다 우월하고, 이 사회를 그대로 놓아두면 '정치'로써 시장효율성을 왜곡, 이기적 지대추구행위로 적폐화하는 집단들이 발생한다고 생각했고, 국가의 역할은 강력한 법과 원칙으로써 '시장의 룰'을 깨는 그런 집단들을 공정경쟁으로 내모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재벌'이야말로 역사적으로나 현상적으로나 시장의 룰을 가장 왜곡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여 재벌개혁 관련 상법과 공정거래법 공부를 하기도 하고, '재벌-검찰-언론' 트로이카를 깨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한편, 'KT 구조조정과 민영화 성공사례'에 대한 발표를 하여 교수님께 칭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3.
군대에 가서는 '자유'를 뺏긴다는 것의 충격을 경험하였고, 열렬한 정치적 자유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자유권적 기본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롤즈, 드워킨, 노직, 아렌트, 토인비, 칸트 등의 책을 관물대에 쌓아두고 뜻도 모르고 계보도 없이 막 읽었고, 힘든 진지공사나 훈련이 끝나는 날이면 싹~목욕재계를 하고 가부좌를 틀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책을 읽는 개주접을 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위 2.번 시기에 저와 함께 시장주의를 신봉하고 다녔던 준재벌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같은 시기에 군대에 끌려가 비슷한 충격을 받았던 친구녀석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변혁회'라는 요상한 독서모임도 만들어서 전체주의 타파와 모병제 로드맵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과거 '운동권 감성'을 전체주의의 잔재라고 보아 부정하게 되었고, 최악의 악마는 민족주의에 숨어 있다는 말을 곧잘 하고 다녔으며, 역사는 크게 보아 전체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라는 도식적 사관을 가졌던 적도 있습니다.

4.
제대하고 우연히 사업을 시작하고, 달리는 호랑이에서처럼 내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팀빌딩을 하고, BM을 기획하여 '스타트업 업계'라는 제도권 내에서 사업을 했던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매출이 발생하여 이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더니 더 많은 매출이 감당 못하게 발생하고, 그걸 감당하기 위해 또 시스템을 만들고, 그랬더니 더 감당 못하게 들어오고, 하는 식으로 '어어'하면서 커진 것이라, 당시 흥했던 이른바 '스타트업씬'과의 네트워크나 그로부터의 지원 없이 고생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고 '현금영수증 발행해주세요'라는 고객의 말에도 덜컥 긴장하고 '현금영수증이란?'부터 검색해야 했으며, 세무사 앞에 가서는 '부가가치세가 뭔가요?'부터 질문해야 했던 24살 학생으로서 혼자 각종 사건들을 경험하고, 20대의 남은 에너지를 전부 짜내듯 투입하고, 매일 불안과 외로움에 떨면서 야식 처먹다가 뚱뚱한 사람이 되면서 과거의 생각들이 한낮 책쪼가리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중요한 사건들은 학문적 거시세계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미시세계에서 발생하고, 그 매일매일을 잘 해나가는 것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거시세계는 그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도 마찬가지로 어떤 기획이나 전략이 아니라, 직원 한명한명의 고객 한명한명에 대한 미소, 라포 형성 등 미시적 세계에서의 최선의 노력들이 중첩되어 흥하고 망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Alignment란: 브랜드 컬러-브랜드명-사소한 UI/UX에서 느껴지는 감성과 분위기-사업 비전에 대한 나 자신의 진정성-나와 직원들 사이의 공명-직원들도 공감하는 그 꿈이 서비스를 통해 투사되는 정도-입소문과 커뮤니티 바이럴로 아웃바운드 마케팅 없이 인바운드 모객만으로 유지되는 영업-아낀 마케팅비로 인건비에 투자, 선순환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저 나름의 경영관도 정립해보기도 했고, 그 때문인지 머리가 굳어 3학년때까지 줄곧 4.4~4.5점대를 유지하던 경영학 학점이 4학년 들어서는 3점 후반대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5.
사업이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고 나서는 필리핀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필리핀 역사와 정치에 깊게 몰입하고, 이입하고, 가슴이 저려올만큼 슬퍼했습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미국과 영국 유수의 대학에서 화려한 학력을 쌓고 돌아온 필리핀 '귀족' 출신의 명사들이 만들어내는, 실체를 잡을 수 없는 연성의 폭력과 체제. 그런 서구식 자유주의자를 표방하는 명사들이 모인 국회에서는 서구의 것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진보적 입법과 제도개선, 아름답고 희망찬 언어가 난무하지만 정작 민중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민중의 집단지성이 포퓰리스트 독재자를 소환하는 것이나 그마저도 서구세계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리핀 지식인들에 의해 '전체주의' 내지는 '반인권적'이라는 말로 격하되고, 필연적으로 폭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비서구권 개발도상국 환경에서의 개혁은 거의 언제나 (지배층의 이권이 걸려 있는 경우로서 민중의 기본권이 문제되는 경우가 아닌 한) 누군가의 '기본권'을 이유로 저지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과거 자유주의 사관에 의해 갖고 있던 전체주의 방법론에 대한 철저한 배제가 어느 정도 상대화되는 경험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지금도 갖고 있는 꿈인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VC를 설립하여 시장에서부터 해방구를 만들자]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6.
그리고 로스쿨에 입학하면서 바로 휴학을 했고, 사업을 정리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여자친구를 만났고, 변호사가 되어 로펌에 다니는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법학 공부를 하고 특히 로펌에서 실무를 접하면서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앞서 가졌던 사상과 생각들이 어느 하나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과 사건, 법리와 판단에서 각자 하나의 지지와 반박의 근거가 되고, 이들이 모두 종합되어 비록 신의 관점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의 지혜로서 짜내어 한 하나의 '판단'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은, 자유주의도 전체주의도 민족주의도 휴머니즘도 시장주의도 좌파도 우파도 사회주의도 혁명이론도 개혁주의도 귀족주의도 중산층우월주의도 그 무엇도 아니고, 이들 각 사상과 생각들이 갖고 있는 '좋은 점'들이 서로 조화, 견제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이 사회를 해롭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도 전체주의도 민족주의도 휴머니즘도 시장주의도 좌파도 우파도 사회주의도 혁명이론도 개혁주의도 귀족주의도 중산층우월주의도 그 무엇도 아니고, 이들 각 사상과 생각들이 갖고 있는 '나쁜 점'들이 서로를 강화, 극단화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7.
내일부터 저와 제 친구들의 아지트가 생깁니다. 지금까지는 사상과 생각의 계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았고, 그냥 교양 쌓듯 막 읽고 각각 저 나름의 인상을 정리할 뿐이었습니다. 이유는 어차피 한명의 개인으로서는 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이 세상에 영향이 없고, 그래서 제 생각이든 사상이든 사실 중요하지 않고 아무도 관심도 없으며 이 사회에서 제가 할 일과 역할은 어차피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인이 아니라 세력이 됐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고, 그 세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 내지 생산수단의 소유가 필수적입니다. 이에 지금까지의 사상과 생각을 뒤로 제쳐두고, 향후 10년 내에 피를 토하는 열정으로 무조건 저 또는 우리의 사업을 런칭, 캐쉬카우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와 제 친구들의 아지트를 거점으로 이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정말 천운이 따라서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 때에 3년 정도의 공백기를 선언하고 조용한 곳에서 스승을 모시고 저의 생각과 로드맵을 계보와 체계, 균형감을 갖춘 방식으로 정립해보려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저의 '생각머리'라는게 의미가 있어지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3-19 12:2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73 정치/사회미국의 배심원 선택 제도 24 까페레인 16/09/30 10975 5
    203 일상/생각육아일기 - 2016년 5월 23 까페레인 16/05/10 5166 5
    372 의료/건강우울은 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38 깊은잠 17/02/22 8647 22
    356 정치/사회트럼프와 패권이라굽쇼?.... 25 깊은잠 17/02/02 5830 14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54 13
    1392 정치/사회취소소송에서의 원고적격의 개념과 시사점 등 9 김비버 24/05/02 2238 7
    1371 일상/생각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1850 20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2283 16
    1340 경제주식양도소득세 정리(2022. 12. 31. 법률 제19196호로 일부개정된 소득세법 기준) 7 김비버 23/11/22 2683 8
    1320 경제사업실패에서 배운 교훈, 매출 있는 곳에 비용 있다 7 김비버 23/08/12 3467 28
    882 의료/건강마음의 병에도 골든 타임이 있습니다. 12 김독자 19/10/31 6899 47
    271 정치/사회미국의 트럼프 열풍에 대한 소고 23 길도현 16/09/28 6631 11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2106 23
    1319 정치/사회개평이 필요하다 19 기아트윈스 23/08/05 3537 65
    1174 문화/예술한문빌런 트리거 모음집 27 기아트윈스 22/03/06 5288 53
    1077 철학/종교사는 게 x같을 때 떠올려보면 좋은 말들 34 기아트윈스 21/04/02 8001 31
    1010 경제주식투자, 튜토리얼부터 레이드까지 37 기아트윈스 20/09/23 7701 28
    981 철학/종교자제력, 지배력, 그리고 이해력 13 기아트윈스 20/07/10 6256 30
    942 정치/사회[데이빋 런시만] 코로나바이러스는 권력의 본성을 드러냈다. 10 기아트윈스 20/04/02 6127 22
    936 역사[번역] 유발 노아 하라리: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 13 기아트윈스 20/03/21 8062 33
    937 과학[코로나] 데이터... 데이터를 보자! 20 기아트윈스 20/03/22 6598 12
    923 문학일독김용(一讀金庸): 김용 전집 리뷰 40 기아트윈스 20/02/16 7895 27
    879 기타영국 교육 이야기 16 기아트윈스 19/10/23 6673 34
    842 정치/사회한일간 역사갈등은 꼬일까 풀릴까? 데이빋 캉, 데이빋 레헤니, & 빅터 챠 (2013) 16 기아트윈스 19/08/10 6119 14
    820 일상/생각전격 비자발급 대작전Z 22 기아트윈스 19/06/19 5849 50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