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4/04/24 18:00:25
Name   자몽에이슬
Subject   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97년 98년 그 어느 해, 정확한 연도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마고치 광풍이 불던 때였다.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씩 들고 오는 그 조그마한 게임기가 신기했다. 그 작은 기기에서 애완동물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밥도 줄 수 있고 똥도 싸고 아프면 약도 준다고 했다. 나 빼고는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부모님께 물어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당시 자장면 한그릇이 2500~3000원 하던 시절에 2~3만원이 훌쩍 넘는 그런 장난감을 부모님이 절대로 사주실리가 없었다. 세식구가(당시 한명의 식구는 시골에 있었다) 유일하게 함께 머리를 맞대는 저녁시간에는, 테레비속 아저씨가 요즘 유행하는 다마고치가 얼마나 학생들에게 안 좋은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랬다.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모든 필요조건이 성립되어 버렸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내가 모르는 것을 키우며 희노애락을 논하고 있을 때 나는 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었다.

생각해보면, 매우 어린 시절의, 흐려진 몇 없는 기억을 겨우겨우 헤집어 보면 나는 게임을 참 좋아했다. 높은 산, 깊은 곳, 적막한 시골에서 살다가 처음 서울로 올라와 숫기라고는 전혀 없었던 아이는 놀이터에서 쭈뼛거리다가 어떤 동네아이에게 이끌려 처음 낮선 이의 집에 놀러가게 되고 거기서 게임이라는 것을 접했다. 당시 짧지 않은 한 아이의 생애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이후, 나는 동네 친구를 사귀는 제 1조건이 친구집에 게임기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먼지 낀 게임팩을 후후 불며 볼록한 브라운관을 쳐다보다 보면, 어느 날은 탱크조종사가 되었고, 어느날은 아랍거리 어딘가를 뛰어 다녔으며, 어느 날에는 풍선을 들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삼성겜보이였던가 알라딘보이였던가 게임기 이름은 정확히 몰랐다. 나는 가져본 적이 없는 기계였고 그냥 생긴거 별로 돌릴 수 있는 게임이 다르다는 것 뿐이었다.
그 많은 친구들의 집을 들락날락 거리며 친구 어머니가 해주시는 분홍소시지에 계란을 부친 반찬이 나오는 저녁까지 먹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나도 집에 저 겜보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나도 겜보이를 가지고 친구를 초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가치관 속에 게임이란 불량청소년들이나 하는 질 나쁜 무언가였다.
좀 더 나이를 먹고 집에 컴퓨터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게 되니 나는 나를 통제하지 못했다. 밤중에 화장실 가려고 깨었다가도 게임 생각이 나서 키보드 달그닥 소리를 내고는 했다. 그런 모습을 본 아버지는 나를 보고
"저거 완전 미친 새끼네, 돌았네 돌았어."
라고 했다. 그 단어들이 얼마나 뾰족했는지 나이를 먹은 지금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쭈볏이 서고 피가 쏠린다.

잠시 다시 뒤로 돌아가서 98년 99년도 쯤 그 어느 해, 다마고치의 광풍이 1년정도 지난 어느날, 할머니가 내게 선물로 다마고치를 사주었다. 비록 정품은 아닌 1만원이 조금 넘는 짝퉁 다마고치였지만 전혀 생각도 안하고 있던 다마고치를 선물 받은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 이후 몇일 간은 하루종일 다마고치만 쳐다봤다. 드디어 나도 내 다마고치에게 밥도 주고 똥도 치워줬으며 점점 커가는 내 다마고치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다른 아이들이 1년 먼저 느꼈을 흥분과 행복감을 나도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그 작은 기기를 잠시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어렴풋이 배우긴 했었다. 전자기기에 물이 들어가면 안된다고... 하지만 어린 나는, 매일 매일 다마고치를 키우는 도파민에 중독된 나는, 가지고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되는 판단을 내렸다.
[나의 삶, 나의 분신, 나의 2세, 나의 애완동물, 나의 신, 나의 다마고치!!!]
이것을 잠시도 내 손에서 떨어트리고 싶지 않았나보다. 화면이 들어오지 않는 작은 액정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세상 겪어보지 못한 상실감을 강렬하게 느꼈다. 아아... 나는 지금 무슨 행동을 한 것인가.

(다마고치)님의 침묵
(다마고치)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기기가 정말로 맛이 가버렸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감히(비교하기 죄송스러우나) 만해선생님이 느꼈을 슬픔과 회한, 분노를 당시의 나도 절절히 느꼈던 것 같다. 욕조 안에서 발가벗은 나는 숨 죽여 흐느꼈다.

욕조에서 나온 이후 나는 대학교 교양시간에 배웠던 이별의 5단계를 약 10년 후 이수하기도 전에 절절히 선체험했다.

켜지지 않는 다마고치의 버튼을 괜시리 계속 눌러보며 켜지겠지, 잠깐 꺼진 것일 뿐이라며 [부정]했다.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는 다마고치를 보며 [분노]에 찬 나는 기기를 몇번이고 바닥에 집어 던지며 속으로 소리쳤다. '켜지라고! 켜지라고!!!'
던지다 못해 지친 나는 생각했다. 부모님한테 말해볼까? 할머니한테 다시 사달라고 할까? 여러 생각들이 스치면서 [타협]점을 찾아보려 했다.
[우울]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방안들만 떠올랐다.
결국 나는 이 현실을 [수용]하기로 했다.

이제 다마고치는 내게 없다.

---------------------------------

얼마 전 수원에 와이프와 함께 숨겨진 맛집을 찾아간 김에 어디를 더 구경할지 고민 하다가 스타필드에 가보기로 했다.
하남 스타필드의 장대한 차량 행렬에 매번 가기를 망설였던 곳이었는데 저녁 시간대에 가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수원은 비교적 빠르게 입장이 가능했다.
다양한 맛집들과 상점들이 많아서 눈이 휘둥그레져서 구경을 하던 찰나에 반다이 가챠샵을 발견했다. 피규어 구경을 좋아하는 와이프가 시시콜콜 떠드는 와중에 갑자기 내 눈에 다마고치가 눈에 띄였다.

어릴적 가지고 놀았던 그 기기. 물론 당시 가지고 놀던 건 정품도 아니였고 그 기간도 짧았다. 하지만... 내게 남다른 기억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
뭔가 속에서 울컥하는 뜨거운 게 올라왔다. 강산이 두번도 더 변할만한 시간이 흐른 이 나이에, 이 작은 기기를 보며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북받쳐 오름을 느꼈다. 내가 다마고치에 시선을 때지 못하는 것을 느낀 와이프는 내게 사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어제 일을 하던 도중 갑자기 지난번 봤던 다마고치가 떠올랐다. 검색을 해보니 요즘에도 다마고치가 계속 업그레이드 되서 나온다고 한다. 요즘에는 컬러화면에 다마고치끼리 결혼도 되고 자식들을 다시 키워서 계속 세대교체가 가능하다고 한다. 계속 글과 사진들을 보다 보니 묘한 흥분감이 들었다.
하고 싶다. 다시 키워보고 싶다. 사야겠다. 마음이 빠르게 바뀌었다. 와이프에게 문자를 했다. 재미있어 보인다고 같이 하자고 한다. 반다이 공홈에 들어가보니 가격이 5만원이 넘는다. 아니 스마트폰이 나오는 시대에 이딴게 5만원? 하다가도 옛날 가격을 생각보니 살만하다. 할인쿠폰과 포인트 등을 먹여 3만원 대로 줄였다.

이제 나는 다마고치를 직접 구매할 수 있을정도의 능력이 된다. 스위치도, 플스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어릴적 마냥 미친듯이 게임을 하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미친놈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게임을 한다고 해도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때는 없던 것들을 이제는 원하면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어릴적 친구네 집 앞에서 고래고래 "철수야 노올자~" 불러가며 마치 갑질이라도 하는 친구에게 때론 비굴하게 눈치를 봐 가면서도 아득바득 게임은 하고 싶어했던 그 기억들과 즐거움, 추억들은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되돌릴 수 없는 그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배 나온 아저씨가 되서도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부질없는 것을 말이다.

며칠내로 배송될 그 망할 기기를 기다리면서 오랜만에 설렘과 흥분을 감출 수 없다. 월급루팡으로 파티션 너머 지나다니는 직원들의 눈길을 피해가며 이 글을 써가는 두근두근한 이 감정만이 그나마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보라색의 귀염뽀짝한 이 작은 기기를 회사에 가지고 간다면 아마 나를 변태 오타쿠정도로 볼 것 같아 감히 회사에 가져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 아아 내가 봐도 이건 좀 너무 디자인이 어른스럽지 못하다. 이걸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다른 의미로 침묵해야 될 것 같다.

----------------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없었고 다마고치 구입에 대한 감동을 다른 분께도 조금은 나누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뭐 자꾸 살이 추가 되어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덕분에 옛날 기억들을 되집어보고 좋네요. 엄연히 키덜드 취미 분야 입니다. 절대 이상한 피터팬 뭐시기 그런 것 아닙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5-06 16:53)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9
  • 20세기 게임 소년들은 짠한 일화 하나씩은 가슴 속에 가지고 있는 겁니다.
  • 다마고치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3 일상/생각나는 순혈 오리지날 코리안인가? 50 사이시옷 20/10/05 6605 24
622 기타나는 비 오는 아침의 엄마 12 짹짹 18/04/23 5808 42
1008 일상/생각나는 대체가능한 존재인가 15 에피타 20/09/23 5644 26
1390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12 자몽에이슬 24/04/24 2716 19
956 일상/생각나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9 켈로그김 20/05/06 5177 34
803 일상/생각끝나지 않은 투병기 25 Chere 19/05/16 6417 76
894 의료/건강꽃보다 의사, 존스홉킨스의 F4(Founding Four Physicians) 11 OSDRYD 19/12/06 5436 21
1187 꿀팁/강좌꼬맹이를 위한 마인크래프트 서버 만들어주기 17 덜커덩 22/04/19 8372 21
293 일상/생각꼬마 절도범 6 tannenbaum 16/10/26 5642 6
978 체육/스포츠깊게 말고 높게 - 축구력과 키의 관계 22 다시갑시다 20/07/03 6237 9
1173 기타깃털의 비밀 - 친구 없는 새 구별하는 방법 11 비형 22/03/03 4929 46
407 일상/생각김치즈 연대기: 내 반려냥이를 소개합니다 52 lagom 17/04/06 5928 33
536 문학김애란 10 알료사 17/10/29 7175 8
436 체육/스포츠김성근의 한화를 돌아보다. 31 kpark 17/05/24 6553 6
408 정치/사회김미경 교수 채용논란에 부쳐 194 기아트윈스 17/04/07 10341 32
1168 일상/생각길 잃은 노인 분을 만났습니다. 6 nothing 22/02/18 4457 45
706 여행긴 역사, 그리고 그 길이에 걸맞는 건축의 보물단지 - 체코 6 호타루 18/09/29 7385 13
912 과학기업의 품질보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3 Fate 20/01/22 6093 19
1216 일상/생각기록하는 도구에 대한 욕망... (1) 25 *alchemist* 22/06/22 4214 18
946 창작기대 속에 태어나 기대 속에 살다가 기대 속에 가다 3 LemonTree 20/04/09 5164 15
1417 체육/스포츠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959 32
459 일상/생각급식소 파업과 도시락 3 여름 소나기 후 17/06/30 5003 5
593 IT/컴퓨터금융권의 차세대 시스템이 도입되는 과정 41 기쁨평안 18/02/13 10778 26
697 일상/생각글을 쓰는 습관 4 호타루 18/09/15 6154 8
370 정치/사회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국제 개발,원조의 경우) 7 하얀 17/02/19 6078 1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