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는 스타워즈나 마블, DC처럼 전형적인 가공의 세계관입니다. 우연히 필을 받으면 계속 파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덕후들의 놀이로 치고 멀리하게 되지요. 다행히(?) 21세기 한국에서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불멸의 작품(쿨럭;;)이 탄생하여 많은 어린이들에게 신화의 즐거움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꽤 의미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퀄리티나 독창성은 제쳐두고 대중이 어떤 문화적 양식을 나름대로 재양식화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대중이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리스 신화 이미지의 통로는 대개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양식에서 재해석된 회화와 조각입니다. '그림으로 배우는 그리스 신화' 라든가 '세계의 명화' 같은 책들은 대부분의 이미지를 여기서 빌려오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너스' 하면 새침한 보티첼리가 떠오르고, '파리스' 하면 뭉실뭉실한 루벤스가 떠오를 거예요. 너무 익숙해서 좀 식상하기도 해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런 교과서적 화가들을 바탕으로 일본 만화의 틀을 입혔기 때문에 상당히 대중적인 설득력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에겐 마이너하게 느껴지지만 좀더 흥미로운 이미지들의 전달자는 그리스 항아리들입니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반도의 몇몇 도시들이 중요한 생산지로, 주로 기원전 6세기 이후부터 헬레니즘 시기까지 지중해 동부의 그릇 시장을 석권했던 핫 아이템이지요. 수많은 항아리와 접시, 병에 그려진 다채로운 그림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서 당시 그리스 일상생활의 모습을 일별하게 해줍니다. 플라톤의 <향연>을 읽을 때 등장인물들이 어떤 컵으로 술을 마시고 어떤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었을까 상상하게 해주기도 하고요. 주로 박물관이나 전문서적을 통해 유통되는 이미지들이긴 하지만 처음 접했을 때의 시각적 충격과 쾌락은 오히려 가까운 근대의 예술작품들보다 이쪽이 더 강한 거 같아요. 마치 선만으로 이루어진 만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쾌락처럼.
BC 570-560년경.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스 단지 그림이에요.
전성기 그리스 도예의 기본은 흑색과 적색의 대조입니다. 인물이 흑색으로, 바탕이 적색으로 표현되는 도기들을 흑색상(black figure), 반대로 인물이 적색 바탕이 흑색이면 적색상(red figure) 도기라고 부릅니다. 적색상이 좀더 후대에 나온 기법이긴 하지만 둘 다 오랫동안 공존하였습니다. 위의 그림은 당연히 흑색상입니다. 19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발굴된 이른바 '프랑수아 단지'(François Vase)에 그려진 200여 개의 그림들 중 하나예요. 단지의 한쪽 손잡이 부분에 그려진 그림이라서, 위 그림의 화면은 약간 굴곡져 보이고 하단에서는 인물의 발이 손잡이 장식문양 부분을 밟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도기는 당시 그리스에서 만들어져 이탈리아로 수출된 수많은 그릇들 가운데 회화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서, 발굴자인 프랑수아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릅니다.
흑색상은 화가가 행동 묘사, 특히 전투 장면 묘사를 얼마나 잘 하는가 시금석이 될 만한 기법입니다. 검은 그림자 같은 인물 속에 강렬하고 투박한 몇 개의 선을 그어 대상의 역동성을 포착해야 합니다. 위 그림은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갈 무렵 전쟁터에서 파리스의 화살을 맞고 전사한 영웅 아킬레우스의 시체를 그의 사촌형제 아이아스가 짊어지고 도망가는 장면입니다. 이런 장면 자체를 묘사한 문헌은 (제가 아는 한도에서는) 없지만, '아이아스가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메고 가다'라는 이 모티브는 상당히 유명한 것이어서 150점 이상의 유사 도기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서 아이아스의 머리와 상반신은 똑바로 세워져 있고 팔다리는 완벽한 직각을 이루며, 들고 있는 창은 대각선으로 화면을 가로지릅니다. 이 수직선 구도가 장엄한 비극의 분위기를 전달하지요. 아킬레우스의 시체 역시 직각이고 긴 레게 머리카락과 열 손가락은 평행하게 늘어져 있습니다. 아킬레우스의 힘없이 감긴 눈과 비교해 아이아스의 진지하고 커다랗게 부릅뜬 둥근 눈이 인상적입니다. 죽은 자를 보호하려면 산 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겠지요. 혹은 이 둥근 눈은 장엄한 수직 구도 속에서 가슴받이의 소용돌이 모양과 나란히 공포를 암시하는 구멍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방금 전까지 열심히 싸우고 있었을 아킬레우스가 여기서 발가벗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혼전 중에 흔히 벌어졌을 갑옷 탈취 때문일 수도 있고 죽은 자를 나체로 그리는 회화양식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아스는 가슴받이, 정강이받이, 그리고 위엄 있는 투구를 걸치고 있지만 당시의 유행대로 하의를 입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 회화에서 남성의 포경하지 않은 작은 성기 노출은 지극히 정상이며 불문율입니다. 현대의 그라비아 모델들이 큰 가슴을 노출하지 않으면 욕을 먹듯이..(욕먹나요?;;) 옛 그리스 미술에서 나체는 대개 남성의 나체로서, 남성은 현대의 여성이나 마찬가지로 모든 관음증을 견뎌야 하는 성이었습니다. 여성의 나체를 표현한 작품들은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사실 여성의 나체 자체가 시각적으로 불유쾌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흐물흐물하고 절도가 없다! 헬스장도 안 가는 건강하지 못한 육체라는 이유로.
아이아스(Aias)는 보통 아약스(Ajax)라고 표기가 전이되어 불리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트로이아 전쟁 당시 그리스 연합군 측의 중요한 장수이지만, 아킬레우스 원탑 시절에는 그닥 빛을 보지 못하다가 중간에 아킬레우스가 삐쳐서 전투를 이탈한 시기에 대활약을 보입니다. 아킬레우스의 연애의 파트너는 파트로클로스, 전우애의 파트너는 아이아스로 보아도 될 만큼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의 인간적인 관계를 다룬 도기 그림들이 여럿 남아 있는데, 그것은 당시 많은 그릇 수요자들이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의 브로맨스' 또는 그들끼리의 대결구도를 원했기 때문이겠죠.
이런 그릇들이 땅속에서 발굴되었을 때 도상학 연구자들은 가장 먼저 뭘 눈여겨볼까요? 척 보고 영퀴 풀듯이 '아 얘는 아킬레우스구나 얘는 아이아스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리기는 힘들 것입니다. 가장 손쉬운 단서는 그림 옆에 새겨진 글자입니다. 위 그림의 왼쪽에는 '아킬레우스', 오른쪽에는 '아이아스'라고 세로로 새겨져 있습니다. 물론 유사한 양식의 그림들이 이미 여럿 발견되어 카탈로그가 만들어져 있다면 글자 없이도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겠지만요. 어쨌건 많은 그리스 도기들은 인물의 그림 옆에 친절하게 이름을 적어주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극 드라마에서 같은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한명회(세조의 브레인)' 이런 식으로 친절하게 캡션을 달아주듯이요. 그러니 우리도 희랍어 알파벳을 공부해 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영박물관이라든가 바티칸이라든가에 갈 때 말이죠...
BC 540-530년경
위의 단지는 저 위의 단지보다 한 세대 정도 후대의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 도기들은 출처 미상이지만 개중 일부는 작가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몸에 가지고 있는데, 이 단지도 그러합니다. 이 아름다운 단지를 만든 장인은 엑세키아스(Exekias)라는 사람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 활약한 그는 흑색상 기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거장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이 단지에는 '엑세키아스가 (저를) 만들고 그렸어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당시의 그리스 도기 산업에서는 도공과 화가를 구분했다는 사실, 그리고 사물의 시점을 1인칭으로 하여 도기에 새기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엑세키아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단지로서 위작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것은 14점인데, 그 중 위의 그림과 또 한 점을 제외한 나머지 12점에는 '엑세키아스가 저를 만들었어요'라고만 새겨져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그가 스스로 흡족하다고 여긴 도기에만 자기 이름을 새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특히 그림을 보는 눈이 까다로웠겠지요.
위 그림의 두 등장인물은 첫 그림과 마찬가지로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입니다. 어느 쪽이 아킬레우스 같나요? 그림을 눌러 확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론 이들의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만, 그러지 말고 그림만 봤을 때 누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신화의 한 장면에서 도상학적 모티브를 가져온 그림이 아니라 화가가 상상해낸 일상 장면이기 때문에 추측하기가 좀더 어렵긴 해요.
두 사람은 전쟁 도중 한가한 틈을 타서 보드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무장 상태, 옆에 놓여 있는 무구들을 보면 이들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둘 다 한쪽 손에는 창을 쥐고 있어 언제라도 싸움터로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지요. 가운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게임판은 아마 장기나 체스의 오래된 버전일 것입니다. 실제로 보면 두 사람의 화려한 망토가 그리는 등 라인이 항아리가 자아내는 라인과 곡선의 평행을 이루고 있어서 감탄스럽다고 해요. 그밖에도 섬세한 손가락과 발가락, 머리털 묘사, 미묘하게 흐르는 긴장감 등 이 그림은 그리스 도예사상 흑색상 기법이 낳은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들 합니다.
구도를 보면, 둘 중 오른쪽 전사는 투구를 벗고 있고, 왼쪽 전사는 쓰고 있어 그의 앉은키가 더 크고 위압감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오른쪽 전사가 아주 약간 더 몸을 굽히고 있어 머리가 상대적으로 아래에 내려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화적인 기법도 가미되어 있어서, 그림 가운데 여백에 새겨진 글자를 보면 왼쪽 전사는 '4점이네'라고 말하고 있고 오른쪽 전사는 '3점이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왼쪽 전사가 더 우월한 존재인 겁니다. 아킬레우스지요.
이 그림을 보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감정이 느껴지신다면, 당신은 그리스 신화라는 세계관에 완벽하게 진입하셨다고 보아도 좋아요. 나는 도통 알 수 없지만, 배트맨과 수퍼맨이 서로 무뚝뚝하게 얼굴을 맞대고 있는 장면만 봐도 어떤 사람들은 오만 감정을 느낄 거잖아요.
음 쓰다 보니 지나치게 아짐체가... 아킬레스 아이아스 커플의 뒷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할게요. (후다닥)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5-0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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