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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5/30 03:49:30 |
Name | 원더월 |
Subject | 아버지는 꿈꾸던 시베리아의 새하얀 벌판을 보지 못할 것이다. |
집 앞의 편의점에서는 수입 맥주를 네 캔에 만 원을 받고 팔고 있다. 하이네켄, 기린 이치방, 1664, 아사히 하얀 거 검은 거.... 1년 전 까지만 해도 술담배라곤 입도 대지 않던 하던 내가 근 몇 달 간 100캔은 마신 것 같다. 매일 밤 몰래 한 두 캔은 마셨으니까... 내 방 책장 위에는 맥주 빈 캔 십여개가 굴러다니고, 자판을 두들기는 지금 내 옆에 있다. 오늘도 나는 불가항력의 환경에 의해 정해진 운명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나 결국은 굴복당하고 비극을 맞이하거나, 선하고 아름다워, 진실되어 질투가 나지 않고 오히려 응원하고 싶은 이들이 결국은 행복을 맞이하는 영화나 드라마, 만화를 보면서 위로받고 있다. 내일은 다시 일어서서 달리기 시작하자고 마음 먹은 게 몇 번인지 기억이 안 난다. 우울증 탓인지 맥주 탓인지, 아니면 지난 일은 잊으려는 자기방어의 일환인지, 당장 어제 내가 뭘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24살의 군필 백수인, 미래를 위해 무언갈 하는 건 진작에 포기해버린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이다. 이를 절절하게 확인 할 수 있는 때는 드물게 있는 친분있는 이와 연락할 때이다. "잘 지냈어? 요즘 뭐해?" "그냥 뭐..." 할 말이 없으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연락을 끊는다. 그래도 전화기는 개통해야 하지 않냐는 아버지의 권유도 거부하고 요금제를 끊어버렸다. 얼마 남지 않는 사람들과 라인할 때 외엔 내 휴대폰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할 말이 없다. 아무것도 안해왔고 지금도 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지만 깊이도 일관성도 없으며 미래에, 그러니까 먹고 사는 데에 필요한 돈벌이에 도움 하나 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기에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좁아 터진 취향이 훗날 사회 생활에 방해나 안되면 다행이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아버지는 교사였다.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고등학생 시절 수킬로미터를 걸어다니며 통학하고, 스스로 등록금을 벌어 마을에서 최초로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 친가를 위해 살아왔다. 아버지의 동생 하나가 이혼하고, 다른 동생 하나가 도박에 빠져 친가를 말아먹기 전까지는.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했던 아버지는 자신에게 엄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장남인 나에게도 이어졌다. 나는 학교를 다녀야 했고 학원을 다녀야 했으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다. 공부를 소홀히 하거나 시험 성적이 좋지 않으면 아버지께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게 맞는였다. 아버지처럼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계셨고, 나를 가르쳤던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부모님은 내게 있어서 보호자라거나 동반자라기보다는 심판자였다. 그리고 손목을 그은 내가 병원으로 달려온 부모님께 당신들을 이렇게 느꼈다고 말씀을 드렸을때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고 어머니는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나는 소심하고 내향적인 학생이었다. 학교 선생님께서, 부모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던, 부모님을 공경하고 선생님을 존경하던, 학교와 가정의 규칙을 한 치의 의심없이 지키던, 어른들의 입장에서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아마 독서를 좋아하던 나의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과 왜소하고 어려보이는 내 외모가 한 몫 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친구들이 놀자고 해도 굳이 거절하고 집에서 혼자서 놀던 날이 많았다.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편했다. 그런 주제에 때때로 외로움을 타서 우정을 갈구했다. 힘 꽤나 쓰는 애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사람을 원했다. 운좋게도 따돌림을 당하거나, 맞거나 소위 빵셔틀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언제나 친구는 몇 없었다. 나는 잘생기지 않았고, 달리기도 느리고, 웃기는 재주도, 돈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른들의 말씀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에 의문이 든 건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수험을 포기했다. 허울만 좋았던 인간관계를 포기했다. 공부하는 척만 했고 나를 맡길 무언가를 찾아 헤매었다. 첫 수험 때에도 그리고 재수할 때에도... 소심하고 내향적인 내가 내 미래에 대해,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내비칠 수 있었던 건 내 손목에 칼을 덕분이었다. 수험에 대한 의지도도 열정도 없던 나는 방구석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군에 입대했고 당연히 그곳엔 탈출구같은 건 없었다. 여전히 부모님께 내 솔직한 생각을,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나를 실으러 온 구급대원은 군인이라는 나의 말에 어떠한 답을 바라듯이 계속해서 읊조렸다. "일지에 이걸 뭐라고 적어야 하나..." 나는 혼잣말을 중얼중얼 늘어놓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문뜩 떠오른 기억에 비명을 지르고, 나와 일말의 관계도 없는, 예를 들어 소방관이 순직했다는 뉴스에 눈물이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내게 눈에 띄게 살가워졌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단 1분도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했고 그저 무거운 침묵만이 깔렸었는데, 나는 일부러 실없는 소리를 했었고 아버지는 일부러 웃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막걸리를 마시며 늘 그렇든 여행 프로그램을 보시던 아버지는 문뜩 내게 말씀하셨다. 시베리아의 새하얀 벌판을 보고 싶다고.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던 나는 그 여행에 얼마가 필요하나고 여쭤보았고 아버지는 인당 오백만원, 어머니까지 해서 천만원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리곤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나에게 상상하지 못했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삼십대였던 시절에 그 광활한 대지를 보고 싶어 각종 여행책을 구입하셨다고. 그랬다.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짖밟았던 것은 다름아닌 아버지의 아들인 나였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 나는 그 일말의 희망조차도 뭉개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아버지의 꿈을 날려버린게 나였다니... 그리고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다시 수능을 보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나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비단길을 마다하고 공동체를 위해, 사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분들처럼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나의 다짐은 친했던 동생과 다툼으로, 믿었던 삼촌의 끔찍한 훈계로 나는 낡은 탑처럼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지만 다시 일어서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진심으로 달려본지도 너무 오래됬더라. 그렇지만 전부 핑계일 뿐이다. 11월이 지나면 아버지는 다시 지독한 위염을 겪을 것이고 정수리의 머리가 더 빠질 것이다. 어머니는 잇몸병이 도져 이가 빠질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나는 또 다시 실망을 드릴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내 다리는 풀려있고 마음은 산산조각나있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끔칙한 친가를 견뎌내야 했고, 어머니는 그런 환경을 견뎌내고 성공한 자랑스런 아들은 둔 할머니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다. 두분 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전부 내 탓이 아니겠는가. 내게 보이는 미래는 뒤틀려있고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늘도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본다. 이기적이게도 하늘이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사실 나만 사라졌으면 좋겠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6-13 09:0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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