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09/09 18:04:49
Name   Terminus Vagus
File #1   image.jpeg (1.70 MB), Download : 21
Subject   하나님 한 번만 더 할아버지와 대화하게 해주세요.


할아버지를 뵈러간다. 내가 미국을 다녀온 사이 건강이 많이 악화되셔 병원에 입원하셨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고 할아버지를 뵈러가는 길. 오늘따라 유독 먼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사랑받는 존재였다. 대가족을 이룬 집안의 첫 장손이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아기였던 나를 데리고 어디든 다녔다. 고모들은 지금 남편들과 데이트 할 때,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내 기저귀를 챙기며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도 마찬가지셨다. 내가 태어났던 서울을 떠나 대구로 내려갔을 때 두 분은 시간이 될 때마다 대구로 오셨다. 인천에서 대구 사이의 네 시간은 두 분에게 잠깐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걸쳐 오시면 내 손을 꼭 잡고 아파트 공원으로 갔다. 공원 중앙에 자리한 배드민턴 코트에서 배드민턴을 하고 난 다음 슈퍼에 들러 과자나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집으로 가는 하루.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한 추억이었다. 할아버지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셨다. 언제나 말이 없고 근엄하셨다. 그럼에도 내겐 사랑의 표현을 아끼지 않으셨다. 손자를 향한 미소와 웃음은 그 분의 얼굴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 사랑을 물질로도 보여주셨고 넉넉치 못한 내 삶에 주신 그 은혜는 지금도 가득하다. 이렇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갚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 참 마음이 힘들다.

할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신지 벌써 4년이 지났다. 그래도 손주들과 함께 공원에 산책 가는것이 무리가 아니셨는데 최근 서고 앉는 것도 가족의 도움없이 움직이는게 힘드신 상황이다. 올해 팔순잔치까지 정정셨는데...

할아버지의 건강이 악화 될 때 많은 것을 잃으셨다. 그 중엔 목소리도 있다. 할아버지의 육성을 못 들은지 오래다. 간혹 말씀하시더라도 뭉개져 나오는 단어들은 조금이나마 능숙하게 말할 줄 아는 아기의 그것과 비슷하다. 해서 할아버지댁을 방문할때면 나를 맞아주시느라 눈이 바쁘시다. 눈으로 인사하고 눈으로 대화한지 어언 1-2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오늘 찾아뵈었을 땐 눈으로 나를 반겨주시지 못했다.

생각하는거보다 더 심각할거라는 어머니의 말에 각오를 하고 갔지만 찾아뵈니 눈에 고이는 눈물은 어쩌지 못하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호흡기도 목석과 같은 다리하며 힘을 잃은 손도 내가 알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할아버지하고 대화를 하려고 눈을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손자왔어요."

낯익은 목소리를 들으시고는 피곤으로 가득했던 눈을 힘겹게 뜨셨다. 그러나 눈에 초점이 없으셨고 내 눈과 마주치지 못하셨다. 이내 잠이 드신 할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게 없어 하염없이 차가운 그의 손만 어루만졌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이기적인 마음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 할아버지와 한 번만 더 대화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또 예전처럼 내 손을 잡고 동네를 거닐었던 것처럼 한 번만 손자 손을 잡고 함께 산책 할 수 있게...

무언가 할 수 있는게 없어 지금도 애꿎은 할아버지의 손만 만지고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9-19 11:0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0
    이 게시판에 등록된 Terminus Vagus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73 기타필름포장지 이야기 24 헬리제의우울 17/07/14 14563 3
    161 정치/사회필리버스터와 총선, 그리고 대중운동. 11 nickyo 16/02/24 5873 13
    563 체육/스포츠필승법과 그그컨 사이(브금 주의) 17 구밀복검 17/12/20 8553 15
    41 기타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모르겠다는 그대에게 32 ArcanumToss 15/07/08 18948 3
    262 일상/생각하나님 한 번만 더 할아버지와 대화하게 해주세요. 7 Terminus Vagus 16/09/09 5270 10
    892 일상/생각하루 삼십 분 지각의 효과 14 소고 19/11/26 6554 25
    521 일상/생각학력 밝히기와 티어 33 알료사 17/10/01 8552 40
    1312 정치/사회학생들 고소고발이 두려워서, 영국 교사들은 노조에 가입했다 3 카르스 23/07/21 3221 20
    1166 꿀팁/강좌학습과 뇌: 스스로를 위해 공부합시다 11 소요 22/02/06 6013 37
    984 일상/생각한 가족의 고집, 그리고 나의 고집에 대한 고백 자몽에이드 20/07/14 4438 9
    9 문화/예술한 잔의 완벽한 홍차를 만드는 방법 17 15/06/04 12009 0
    743 정치/사회한 전직 논술강사의 숙대 총학의 선언문 감상 40 烏鳳 18/12/11 7446 35
    1315 정치/사회한국 가사노동 분담 문제의 특수성? - 독박가사/육아 레토릭을 넘어서 24 카르스 23/08/01 3411 15
    1117 게임한국 게임방송사의 흥망성쇠. 첫 번째. 7 joel 21/08/15 4048 7
    1098 기타한국 만화의 이름으로. 고우영 수호지. 15 joel 21/06/15 5510 24
    591 철학/종교한국 사회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종말. 9 quip 18/02/11 8157 18
    1239 정치/사회한국 수도권-지방격차의 의외의 면모들 45 카르스 22/09/20 6038 22
    1165 정치/사회한국 아동·청소년 정신건강의 역설 - 행복해졌는데 자살, 자해가 증가? 7 카르스 22/02/03 4098 8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041 29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732 35
    1233 정치/사회한국 인구구조의 아이러니 21 카르스 22/09/01 6170 57
    1345 정치/사회한국 철도의 진정한 부흥기가 오는가 31 카르스 23/12/16 3202 7
    196 경제한국 해운업 위기의 배경에 대한 브리핑 30 난커피가더좋아 16/04/27 8190 6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7463 3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22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