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11/24 19:59:21
Name   tannenbaum
Subject   착한 아이 컴플렉스 탈출기.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시작했던 유아기 적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마도 '어른들 말씀 잘 듣는 착한 애가 되어라'였을거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론 '공부 열심히 해서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였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을수록 착한 사람이 되어라에는 조건이 하나씩 더 붙기는 했지만 결국엔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른들 입장에서 난 참 바람직한 착한 아이었다. 하지말라는 건 하지 않았고, 어른들 기준에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천재급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럽지 않을 성적은 유지 했었다. 술,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오락실, 만화방, 당구장, 제과점, 영화관, 음악감상실... 하고 싶은건 많았지만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았다. 아니다... 국민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사이 한동안 오락실은 다녔다. 어차피 오락할 돈은 별로 없었지만 한명의 갤러리로 다른 친구나 형들이 하는 걸 즐겨 봤었다. 그러다가 어느 양아치에게 내 피같은 비상금 100원을 뺏긴 이후로 두번다시 다니지 않았지만.... 그때는 이성교제라도 하면 문제아가 되는 줄 알았었다. 물론 사귀라고 등 떠밀어도 안사귀었겠지만......

반면 내 친형은 참 자유로운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냈다. 쉽게 말해 유년기 시절부터 말 더럽게 안듣고 온갖 사고만 치고 다녔다. 그럴수록 나는 더 강하게 착한 아이가 되라 요구를 받았다. 넌 원래 착하니깐 형처럼 말썽 피우면 안된다. 너희 형제들 키우느라 고생하는 아버지 생각해서 넌 더 공부 열심히 하고 훌륭한 되어 은혜에 보답해야만 한다..... 참 지겨웠다. 사소하게는 심부름은 온전히 내것이었고 크게는 형이 사고치고 잠수타면 나는 그 화풀이 상대가 되어야만 했었다. 그 시절 내가 어른들 말을 거스른 유일한 건 음악이었다. 한달 용돈을 털어서 산 5천원짜리 작은 라디오를 자기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듣곤 했다. 아버지를 완벽히 속였다고 생각했으나 다 알고 계시면서도 묵인해주셨던 거였지만...

난 착하지도 착하고 싶지도 않은데..... 친구들과 로라장도 가고 싶고, 만화도 보고 싶고, 오락실도 가고 싶고, 티비도 보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나쁜짓들일까...

그렇게 쌓여가던 중학교 3년 어느날이었다. 반에서 4등, 전교 등수로 90등이 떨어졌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내 성적표를 보시자마자 내 뺨을 후려 갈기셨다. 그리고 밥상을 엎고 매를 찾아 떨어진 등수 당 한대씩 내 엉덩이를 치기 시작했다. 맞을 때마다 숫자를 세라고 하셨다. 중간에 숫자를 세지 못하거나 틀리면 리셋되어 하나부터 다시 시작했다. 옆에선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말리며 나에게 빨리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라고 했다. 하지만 난 끝까지 잘못했다 말하지도 빌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냥 그자리에서 맞아 죽기를 바랬다.

때리다 지친 아버지는 내 책상을 뒤지기 시작하셨다. 감춰논 라디오와 용돈을 쪼개고 쪼개서 사 모은 메탈리카 테잎과 LP판을 찾아 내셨다. 당시 우리집엔 전축은 고사하고 카세트플레이어도 없었지만 메탈리카 음악이 너무 좋아 어차피 듣지도 못할거 알면서 사 모아논 메탈리카 테잎과 LP판들..... 아버지는 라디오와 테잎, LP판을 들고 마당에 나가셨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에 정신이 팔렸으니 공부가 될리가 없다면서 그자리에서 불태우셨다.

아마도 그날이었을거다. 대학 입학 할때 까지만 계속 착한 아이가 되자. 그러는 게 이집에서 나갈 때까지 나에게 더 유리하니까.... 그날 이후 난 다시 착한 아이가 되었다. 아버지와 어른들은 너무나 흡족해하셨다. 티비 라디오 나쁜친구들 만화 오락실 영화관... 이른바 공부에 방해되는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심부름 잘하고 어른들 말 잘 들으며 공부만 열심히 하는.. 은혜에 보답하는 훌륭한 착한 아들이었으니까....

집안 형편 상 원하는 서울 대학 대신 등록금이 싼 지방국립대에 원서를 넣고 학력고사를 치뤘다. 나는 합격 여부 보다는 독립해 나갈 방 구할 돈이 더 걱정이었다. 시험이 끝난 뒤 몇일 뒤 아는 분 소개로 얻은 일자리 현장인 목포로 떠났다. 그렇게 두달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대학입학하기 몇일전 90만원짜리 사글세를 얻어 집에서 나왔다. 물론 아버지는 집 놔두고 왜 나가냐며 불같이 화를 내셨지만 난 더이상 부모님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는 그만 하기로 했기에 날 막을수는 없었다.

그날로 난 착한아이 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일년에 몇번 얼굴을 비추는 키워준 은공도 모르는 불효막심한 나쁜 놈이 되었다. 그러나 나쁜놈이 되갈수록 난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하루하루 수업 끝나기 무섭게 과외를 뛰어 다녀야 하는 정신없는 생활이었지만 가끔 만화방에 온종일 틀어박혀 드래곤볼 몇십권을 몰아 보기도 하고 더이상 이불을 덮어쓰고 라디오 소리 줄이며 듣지 않아도 되었다. 불타 없어진 메탈리카 LP대신 CD를 다시 사모아 큰맘 먹고 구입한 오디오에 넣고 소리 빵빵하게 들으며 헤드뱅잉을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그렇게 24년이 지났다. 성공적인 착한 아이 컴플렉스 탈출이었다.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몇년전부터 지옥같았던 착한아이 시절이 가끔 생각이 난다.

타지에서 근무하실 적 잠깐 집에 오셨다 근무지로 돌아가시던 날 가지 말라 떼쓰는 나를 안고 눈물 글썽이던 모습.
딱 한번 전교 1등 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시던....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아들 이번에 시험 1등 했다고 아닌 척 안그런 척 자랑하시던 모습.
심하게 감기에 걸린 날 약에 취해 누워있던 내 옆에서 한 숨도 못 주무시며 한숨으로 밤을 세우시던 모습.
생일날 아침 깜박하고 미역국 못 챙겨 먹였다며 교실로 찾아와 친구들과 맛있는 거 사먹으라 만원 쥐어주고 돌아 가시던 모습.
새벽까지 공부하던 어느날 아무 말씀도 없이 책상에 종합영양제 한통 슬쩍 놓고 나가시던 모습.
당신께서는 회식할때 많이 먹었다며 밥상에 오른 고기를 몇 점 드시고는 허털 웃음 지으며 너네나 많이 먹으라시던 모습

그리고... 성적이 떨어져 심하게 맞았던 그 날 약을 발라 주시며 숨죽여 우시던 모습.......


난 열 아홉에 성공적으로 착한 아이 컴플렉스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지금... 그때 착한 아이 시절이 가끔 생각난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2-05 10:56)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4
  • 잘읽엇습니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20 일상/생각면접으로 학부신입생 뽑은 이야기 47 기아트윈스 16/12/10 7710 22
317 일상/생각이것은 실화다. 10 성의준 16/12/06 5711 11
308 일상/생각착한 아이 컴플렉스 탈출기. 5 tannenbaum 16/11/24 5748 14
301 일상/생각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후기입니다. 15 nickyo 16/11/13 5603 12
299 일상/생각영화 <색, 계> (와 아주 살짝 관련된 이야기) 18 black 16/11/11 6319 19
295 일상/생각아재의 커피숍 운영기 - Mr.아네모네. 15 tannenbaum 16/10/30 5260 6
293 일상/생각꼬마 절도범 6 tannenbaum 16/10/26 5549 6
288 일상/생각골목길을 걷다가 20 마르코폴로 16/10/21 6983 5
284 일상/생각보름달 빵 6 tannenbaum 16/10/14 4944 14
283 일상/생각태어나서 해본 최고의 선물. 81 SCV 16/10/13 10393 34
280 일상/생각전직 호주 총리 만난 썰 40 기아트윈스 16/10/12 6607 8
275 일상/생각[펌] 시대로부터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46 기아트윈스 16/10/06 5823 14
262 일상/생각하나님 한 번만 더 할아버지와 대화하게 해주세요. 7 Terminus Vagus 16/09/09 5288 10
254 일상/생각온수가 나오는구만, 수고했네 6 성의준 16/08/23 5373 5
248 일상/생각미국과 캐나다에서의 술사기 17 이젠늙었어 16/08/11 9017 7
245 일상/생각아재의 대학생 시절 추억담들. 27 세인트 16/08/03 6674 5
238 일상/생각이럴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34 Darwin4078 16/07/26 7003 6
237 일상/생각아빠이야기 36 기아트윈스 16/07/24 6207 20
234 일상/생각백윤식을 용납하기 위해서 40 선비 16/07/23 7536 19
227 일상/생각. 12 리틀미 16/07/03 5266 8
224 일상/생각서로 다른 생각이지만 훈훈하게 29 Toby 16/06/28 5772 6
223 일상/생각3600마리의 닭, 360개의 엔진, 30명의 사람. 6 켈로그김 16/06/25 6153 14
222 일상/생각브렉시트 단상 27 기아트윈스 16/06/25 6714 9
221 일상/생각홍씨 남성과 자유연애 62 Moira 16/06/22 9303 14
218 일상/생각겨자와 아빠 7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6/06/14 6185 1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