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5/06/20 18:35:26
Name   Eneloop
Subject   (잡문) 문학에서의 \'부사\' 사용
안녕하세요. Eneloop라고 합니다.
취미로 잡문을 씁니다.

홍차넷에는 처음으로 글을 남깁니다.

앞으로 문학, 혹은 문학이 아니더라도 일상적으로 같이 이야기해볼 수 있는 잡담들을 늘어놓아볼까 합니다.
근래에는 외피가 점점 줄어들어 개인적인 잡문밖에 쓰지 않게 되었기에, 이년 전 작성했던 가벼운 잡문을 하나 올려봅니다.

-----

문학에서의 ‘부사’ 사용

  문학동네에서 팟캐스트를 진행한다. 이름은 “문학 이야기”. 진행자는 흠잡을 데 없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이다. 그의 책 <몰락의 에티카>와, <라이프 오브 파이>, <케빈에 대하여>에 대한 영화평들은 적지 않은 감명을 선사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이 꽤나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형철은 인간의 말과 행동이 형편없는 불량품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이 통제를 벗어나고, 엇나가기 때문에 문학이 불가피하다 이야기한다. 시인들은 말들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그 실패를 끊임없이 곱씹는 사람들이며, 소설가들은 “인간의 행동이 통제불능”이기 때문에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문학을 통해서 인간이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없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없는지 곱씹는다.(<몰락의 에티카>) 이에 따르면, 문학은 “정확하게 말하기 위한”것이다.
  팟캐스트에서 신형철은 다이나믹 듀오와 신동엽의 예를 들면서 문학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다이나믹 듀오가, 신동엽에게 “자주 보자”고 이야기하자, 신동엽은 “우리 바쁜데 어떻게 자주 보겠냐. 그러지 말고, 우리 가끔씩 오래 보자”고 이야기를 했단다. 이런 것이 정확한 말하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문학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시작한다고 말을 한다. 이어서 신형철은 “부사 사용”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인다. “문학은 부사의 사용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면서, “어떤 문학가가 부사를 사용하는걸 보고, 내심 실망했던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너무”, “엄청”, “굉장히”와 같은 부사는 분명히 발화자가 목표하는 지점을 흐려버린다. ‘엄청 대단한 것’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아름다운 것인가? 신형철은, 정확함이란 “대체불가능한 상태”라 이야기한다. 정확하게 표현을 위해서는 부사를 버리고 묘사 혹은 비유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신형철의 말이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지점이 존재한다. 문학이 가 닿아야 하는 지점은, 각 문장의 정확함에 존재하지 않고, 텍스트 전체의 정확함에 존재한다. 후자를 이뤄내기 위해서 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확하지 않은 세상을 담아내기 위해서 나는 오히려 정확하지 않은 표현들, 정확하지 않은 문장의 사용이 필요할 수도 있다 생각한다. ‘부사의 사용’을 줄이고, 묘사와 비유를 통해 정확하게 말하려 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비루하게 쏟아 내뱉는 일상어들의 층위를 수용자들에게 비춰야 할 때는, 부정확한 일상어를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대체불가능함'이란 '객관성'에 대한 환상과 별다를게 없지 않을까.

(2013.11.03)

-----


* Tob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6-25 14:1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77 기타[空知] 녹차넷을 엽니다. 78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04/01 8390 9
    168 창작[SF단편] 펭귄 밀크 11 중년의 럴커 16/03/11 7221 5
    880 게임[LOL] 소드 논쟁으로 보는 '롤 실력' 이야기. 19 Jace.WoM 19/10/27 10655 9
    61 게임[Don't Starve] 굶지마 어드벤쳐 가이드(完) 11 Xayide 15/08/14 11705 1
    38 게임[Don't Starve] 국내에서 굶지마 가이드 검색순위 1위인 가이드 7 Xayide 15/06/28 12484 0
    106 문학[2015년 노벨문학상]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여성은 전쟁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16 다람쥐 15/11/01 6830 11
    343 문화/예술[15금] 고대 그리스 남성의 이상적인 모양 20 moira 17/01/11 11542 13
    160 일상/생각(혐, 자랑, 뱀꼬리 주의) 담배 <3> 7 이젠늙었어 16/02/24 5874 4
    1258 IT/컴퓨터(장문주의) 전공자로서 보는 ChatGPT에서의 몇 가지 인상깊은 문답들 및 분석 9 듣보잡 22/12/17 4250 19
    31 문학(잡문) 문학에서의 '부사' 사용 63 Eneloop 15/06/20 8659 0
    1227 일상/생각(영양無) 나는 어쩌다 체조를 끝내고 레전드로 남았는가 14 Picard 22/07/27 4520 11
    1310 과학(아마도) 후쿠시마 오염수가 안전한 이유 25 매뉴물있뉴 23/07/09 3159 13
    670 여행(스압, 데이터 주의) 오키나와 여행기 ~첫째 날~ 9 소라게 18/07/27 6556 17
    29 여행(사진 다수 포함) 수원화성 돌아보기 28 NightBAya 15/06/20 9963 0
    384 일상/생각(변태주의) 성에 눈뜨던 시기 12 알료사 17/03/10 9182 21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2066 8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2542 30
    1045 요리/음식(내맘대로 뽑은) 2020년 네캔만원 맥주 결산 Awards 34 캡틴아메리카 20/12/27 6828 34
    1311 일상/생각(기이함 주의) 아동학대 피해아동의 부모와의 분리를 적극 주장하는 이유 45 골든햄스 23/07/12 3495 44
    854 역사"향복문(嚮福門) 이름을 바꿔라!" 고려 무신정권기의 웃픈 에피소드 메존일각 19/09/01 5804 13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2116 16
    1243 과학"수업이 너무 어려워서 해고당한" 뉴욕대 화학 교수에 관하여 64 Velma Kelly 22/10/06 6325 27
    226 역사"동북아 역사지도 프로젝트 폐기"에 부쳐 140 기아트윈스 16/07/01 7566 6
    251 기타"국왕" 대신 "국가와 조국" 위해 싸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8 모모스 16/08/18 7910 3
    1245 일상/생각"교수님, 제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24 골든햄스 22/10/20 4805 5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