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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12/26 19:07:37 |
Name | 눈시 |
Subject | 러일전쟁 - 완. 포츠머스 조약 |
1905년 6월, 일본은 새로운 작전을 시작합니다. 사할린을 공격하는 것이었죠. 일본에서는 가라후토(樺太)라 불렀습니다. 작전 자체야 이전부터 얘기가 있었지만 해군 등의 반대로 안 되고 있었죠. 제해권이 넘어간 이상 사할린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그 사할린을 점령하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뱃길을 다 잡을 수 있었죠. 러시아에서도 이걸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해전 직후 루스벨트가 양측에 강화를 시도했는데, 니콜라이 2세는 사할린이 점령당하기 전에 하고 싶다고 답했죠. 이번에 이걸 주장한 건 만주군 사령부의 참모장인 고다마 겐타로, 목적은 빠른 종전이었습니다. 더 먹히기 싫으면 빨리 항복하라는 거였죠. 만주에서는 뭘 더 할 여력이 없었으니까요. 섬이야 큰 가치가 없었지만 어쨌든 러시아 영토였습니다. 러시아군은 남북 합쳐 6천명 정도밖에 없었고, 일본군도 13사단 정도만 보냅니다. 러시아군은 전면전 대신 유격전을 택했고, 7월 7일에 상륙해 7월 31일 러시아군 사령관이 항복합니다. 소수 빨치산이야 남아있었지만 간단히 승리한 거죠. 만주에서는 5월부터 러시아군이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긴 했습니다. 하지만 별 영향이 없었죠. 양군은 대치만 계속 한 채 종전을 맞습니다. ---------------------------------------------- 쓰시마 해전 후, 영미는 일본의 우위를 확실히 인정하게 됩니다. 해양력이 곧 국력이던 시대였습니다. 일본에 의해 러시아의 3대 함대 중 2개가 소멸됐고, 나머지 하나는 지중해에 나가지도 못하는 흑해 함대였습니다. 인정 안할 수가 없죠. 이제 그들이 할 일은 일본에게 보상을 주고 이 선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7월 말, 윌리엄 태프트는 특사의 자격으로 도쿄에 옵니다. 그가 총리 가쓰라 타로와 비밀 협정을 맺으니, 이게 가쓰라-태프트 밀약이죠. 밀약인만큼 조약의 형식이 아니었고, 대화를 통해 나온 결론의 각서만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인정한다는 것,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영미일간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전쟁의 원인이 된 대한제국에 적절한 조치 - 외교권 박탈부터 보호국화 등 - 를 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미국 역시 만주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러일 양국 중 어느 한 쪽이 만주를 독점하게 두면 안 됐죠. 여기서 이렇게 일본에 도움을 주면서 양국의 만주 지배를 제한하고, 극동 등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발언권을 키우려 했습니다. 다음은 영국이었죠. 8월 중순, 2차 영일동맹이 체결됩니다. 여기서 일본이 그리도 요구했던 한국에서의 이익을 인정하죠. 대신 영국의 인정 범위를 중국에서 인도까지 늘렸지만요. 영국의 의도대로 정말 잘한 일본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러일 양국이 종전협상이 계속되고 있었죠. ----------------------------------------------------- "제가 돌아올 때는 정반대가 되겠죠" 일본에서 보낸 건 영일동맹 결성의 주역 고무라 주타로였습니다. 처음엔 이토 히로부미에게 맡기려 했지만 거절했죠. 그는 아주 큰 환대를 받으며 떠납니다. 하지만 그가 할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죠. 가쓰라 총리에게 저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만은 반드시 마중나가겠네" 일본의 정부와 군부에서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일본의 재정은 바닥났고, 12억엔이나 되는 빚만 남았습니다. 여기서 전쟁을 더 끈다면 이긴다 해도 그만큼의 빚과 사상자만 늘어날 것이었죠. 여기서 강화를 맺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국민들의 기대치였죠. 언론에서는 승리를 과장했고, 뤼순에서 막힌 것만 빼면 일본의 완벽한 승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기대하는 건 배상금이었죠.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서 쥐어짜고 전쟁을 치르면서 더 쥐어짰습니다. 간단히 삶의 질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는데 세금만 두배로 늘어난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런 국민들의 눈이 배상금에 갈수밖에요. 이미 그들은 청일전쟁에서 배상금을 두둑이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언론이나 학자 등은 30억엔부터 50억엔까지 얘기했고, 국민들의 기대감을 부채질합니다. 현 상황에서 배상금을 받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때문에 배상금 조항을 넣어야 했죠. "한치의 땅도, 1루블의 돈도 일본에 주지 마라" 러시아에서 뽑힌 건 세르게이 비테였습니다. 주화파로 일본에게 양보하자고 주장했다가 밀려난 이죠. 다른 이들이 거부하자 결국 그가 가야 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건 매였지만 끝낸 건 비둘기네요. 러시아의 혁명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습니다. 도시에선 노동자가 파업을, 농촌에선 농민들이 소요를 일으켰죠.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면서 전국으로 퍼져갔죠. 전쟁이라도 잘 풀렸으면 모를까 그들의 요구조건엔 종전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건 현지에 있는 병사에게도 충분히 번져 있었죠. 파탄난 러시아의 경제를 복구하고 국민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면 일단 전쟁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게 안 되면 망하는 건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렇다고 너무 줘 버리면 국민들은 물론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전파가 가만 놔두지 않겠죠. 비테는 언플을 시도합니다. 미국에 도착할 때부터 마치 그들이 승전국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여기에 언론과 접촉해서 잘 이용해 먹습니다. 특히 일본의 요구에 영토할양과 배상금이 있는 걸 알고는 일본은 돈과 땅 때문에 전쟁을 하는 거라고 언플했죠. (틀린말은 아니죠 뭐) 이러니 배상금을 아무리 줘도 일본은 전쟁을 끝내지 않을거다 그랬습니다. 반면 고무라는 언론의 인터뷰에 "기사 주려고 온 거 아니다. 담판하려고 왔다"면서 딱딱하게 대합니다. 기자들은 당연히 러시아측의 주장을 주로 다뤘죠. +) 별 상관없는 얘긴데 고무라의 키는 156cm, 비테는 180cm라는군요. 뭐 키 작다는 말 계속 들으면서도 당당하게 외교 잘 한 고무라가 대단한 부분이긴 하겠지만요 8월 10일, 1차 본회의가 열립니다. 양측이 동의하는 부분이야 당연히 있었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한다는 것, 러시아군이 만주에서 철수하고 청나라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 일본이 먹겠다), 기존에 일본이 먹었었고 러시아가 가져간 랴오둥 반도, 뤼순 다롄 등의 조차를 일본에 넘긴다는 것이었죠. 이 지역에서의 이익은 곧 철도의 이익이고 일본이 만주의 남부에 있는 철도를 가져간다는 거였습니다. 북만주 쪽은 러시아가 그대로 가집니다. 일본이 그것까지 뺏을 역량이 없었으니까요. 대신 양국은 철도경비대를 제외한 병력을 철수하자고 합니다. 그 목적 역시 상업적인 목적을 넘지 않게 하구요. 하얼빈 이남 창춘(장춘) 부분부터 일본이 가져갔습니다. 문제가 된 부분은 역시 영토할양과 배상금 문제였죠. 비테는 니콜라이의 명대로 절대로 안 되며, 계속 그걸 주장한다면 전쟁을 계속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러시아측도 일본의 재정문제와 많은 사상자가 난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기에 할 수 있는 뻥카였죠. 어쨌든 러시아군이 훨씬 많으니 마냥 뻥카도 아니었고, 일본의 문제는 그의 예측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8월 10일부터 26일까지, 계속 회의를 했지만 그 부분에서 계속 막힙니다. 결국 고무라는 본국에 협상을 중지하겠다고 합니다. 헌데 본국에서 충격적인 답변이 오죠. 영토와 배상금을 다 포기하더라도 강화를 하라는 거였습니다. 고무라는 어느정도 예측했을지 몰라도, 현지에 있던 수행원들과 특파된 기자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게 일본 본토에도 전해지죠. 일본에게 유리한 점도 있긴 했습니다.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 정부가 일본편이었죠. 계속 협상이 결렬되자 이랬다고 합니다. "러시아는 왜 이렇게 성의가 없나. 협상이 결렬된다면 란스도르프 외무상과 비테는 죽음으로 세계에 죄를 빌어야 한다." 이러니 비테도 어느정도의 양보를 생각하게 됩니다. 니콜라이도 마찬가지였죠. 사할린의 남부는 할양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8월 29일, 양측의 입장이 바뀌면서 협상은 급진전됩니다. 이렇게 성립된 게 포츠머스 조약이죠. 1.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도, 보호, 감독권을 러시아가 인정 2. 철도경비대를 제외한 군대는 만주에서 철군. 만주에서 청의 주권을 인정하고 기회균등 원칙을 준수 3.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사할린 북위 50도 이남을 영구히 일본에 할양. 단 이 지역은 비무장 지역으로 하고 해협의 자유 통행 보장 4.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과 창춘 이남 철도부설권 등 각종 이권을 일본이 가짐 5. 철도의 군사적인 용도 이용금지. 단, 랴오둥 반도 지역은 예외 6. 동해, 오호츠크 해, 베링 해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허용 비테는 협의를 끝낸 후 "평화다, 일본은 전부 양보했다!"면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양보한 건 사할린의 절반 정도, 나머지는 일본이 다 물러난 거였죠. 그래도 역시 이권을 많이 내준 거라서 니콜라이부터 군부의 불만이 있었지만, 이정도면 싸게 먹힌 거죠. 반면 고무라는 호텔에서 혼자 울었다고 합니다. 9월 1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5일에 조인식이 열립니다. 이렇게 동아시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옵니다. 루스벨트는 이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포츠머스에는 지금도 이 날 축제를 연다고 합니다. 자기네가 있는 곳에서 평화를 이뤘다는 것이죠. 하지만... 협정을 본 서양의 언론은 일본을 칭찬합니다. 돈을 포기하고 평화를 찾은 인도주의 국가라는 거였죠. 하지만, 일본인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으니...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인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왜 다 이겨놓고 이런 굴욕적인 결과가 나왔느냐는 거였죠. 영토도 연해주같은 꿀땅이 아니라 사할린, 그것도 남부 뿐이고 그렇게 원하던 배상금은 한푼도 못 받았죠. 그동안 자신들의 고생을 배상금으로 돌려받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으니까요. 일본에서는 이걸 진정시키지 못합니다. 재정문제라는 속사정을 얘기하면 러시아에 더 밑지게 됐을테니까요. 9월 5일, 도쿄에서 조약 반대 집회가 벌어집니다. 배상금을 받아내야 된다는 거였죠. 이들의 분노는 결국 폭동으로 번졌구요. 이들은 내무대신 관저, 어용 신문사, 파출소 등에 불을 질렀고 정교회 건물부터 조약을 중개한 미국 공사관과 교회까지 습격당합니다. 정부에선 계엄령을 선포했고, 11월 말에야 해지합니다. 이런 폭동은 요코하마와 고베까지 번졌구요. 집회가 있었던 히비야 공원을 따서 히비야 폭동, 혹은 방화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으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당했으며, 검거한 사람이 2천명에 달합니다. 그 중 87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구요. 고무라는 귀국할 때 분노한 군중에 둘러싸여 온갖 욕을 먹으며 와야 했고,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양쪽에서 그를 보호하면서 가야 했다고 합니다. 집도 위험해서 가족과 따로 살아야 했구요. 이런 상황이니 정부도 버티고 있을 수 없었죠. 1906년에 총리인 가쓰라 타로가 사퇴합니다. 인도주의 국가는 무슨, 일본인들의 분노 역시 세계에 알려집니다. 특히 자기들이 도와줬는데도 공격당한 미국에 말이죠. 일본 정부로서는 난감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하지만 어쩝니까. 바로 그들이 만든 괴물인데요. 그런 국민들의 분노와는 별개로, 그들은 전리품을 손에 넣으러 갔습니다. 뭐겠어요? "지난번 이등(이토)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 시일야 방성대곡, 장지연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었죠. 이렇게 일본은 한일합방으로 가는 길을 시작합니다. --------------------------------------------- 이렇게 러일전쟁은 끝이 납니다. 자, 후일담을 얘기해보죠. 이 전쟁의 승리로, 영국은 백년에 걸친 그레이트 게임을 끝냅니다. 러시아가 해외로 투사할 힘을 잃었으니까요. 이제 다음 목표는 무섭게 성장하는 독일이었습니다. 마침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후 빌헬름 2세가 외교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죠. 영국과 러시아는 페르시아 등의 이권을 나눠먹으면서 1907년에 영러협상을 합니다. 그레이트 게임을 공식적으로 끝낸 협상이었죠. 이건 이후 삼국협상으로 이어집니다. 삼국협상vs삼국동맹이라는 새로운 판이 짜이게 된 거죠. 러시아의 혼란은 1907년이 되어서야 겨우 가라앉습니다.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 두마라는 의회를 세우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거죠. 하지만 겉만 그럴 뿐 니콜라이 2세는 전제정치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전후의 혼란이 가라앉으면서 러시아는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전쟁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군사력도 증강하구요. 독일이 여기에 자극받으면서 군비를 증강하고... 이런 치킨게임이 계속되었죠. 이렇게 제국의 자존심을 다시 찾으려 했지만 역시 또 치명적인 문제가 남아있었죠. 바로 이 사람이요. -_-; 성이 최씨겠죠? 그가 등장한 것은 1903년, 니콜라이 2세 부부의 신임을 받으면서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잘하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나라를 더 엉망으로 만들었죠. 결국 세계대전에서 그도 러시아 제국도 죽습니다.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을 중심으로 한 군비 경쟁, 드레드노트의 출현으로 더 심해진 건함 경쟁은 유럽을 세계대전으로 이끌죠. +) 구식전함끼리 싸우면 영국이 압도적이지만, 그 구식 전함을 고물로 만들 드레드노트가 나왔으니 이제 그 수로만 경쟁하면 된다는 논리입니다. 영국은 드레드노트만 있으면 적들을 압도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것 때문에 자기도 경쟁에 휘말리게 되죠. 자, 극동으로 가보자면... 미국은 이렇게 국제사회, 특히 극동에서의 발언권을 늘립니다. 고립을 표방하는 먼로주의는 이것으로 확실히 끝났고, 태평양으로 팽창하게 되었죠.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런 미국의 발전을 상징하는 인물로 러시모어 산에도 조각됩니다. 이런 미국의 개입이 전쟁을 끝내긴 했지만, 극동에서의 또다른 경쟁을 낳습니다. 이것도 꽤 재밌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만주에 이권을 넓히는 걸 경계합니다. 그래서 만주 철도의 중립화를 모색하죠. 이러니 러일이 손 잡고 미국에 맞서게 됩니다. 1907년 1차 러일 협약이 있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한국을 확실히 먹기 위해, 러시아로서는 유럽의 긴장이 커지면서 극동을 더 안정시키기 위해서였죠. 실질적으로 이 때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다고 보면 됩니다. 07년 하면 우리가 아는 사건이 하나 있죠. 헤이그 밀사 사건이요. 원래 이 때 한국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애초에 헤이그 회의는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한 거였고, 아직 한국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 사이에 상황이 변합니다. 양국이 협약을 맺은 것이죠. 이렇게 고생해서 (그것도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서) 네덜란드까지 갔지만, 일본의 반대로 들어가지도 못 합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에서도 이걸 인정했고 말이죠. +) 이들을 저지한 일본인이 바로 아키야마 요시후루입니다. 이후 1916년에 조선주차군 사령관이 되기도 합니다. 협약 얘기로 돌아가자면, 1910년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2차 협약을 맺습니다. 이후 1916년까지 4차 협약을 하는데, 모두 조선, 외몽골, 중국 등에서 서로를 세력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러면서 제 3국이 중국을 지배하는 걸 같이 막기로 하고 말이죠. 일본이 한일합방을 서두른 것도 한국을 확실히 먹어서 미국의 만주 진출을 막는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런 미국과의 대립은 태평양 전쟁의 불씨가 되었죠. ---------------------------------------------------------------- "이러한 놀라운 결과가 나온 데에는 충분한 원인이 있었다. 일본은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잘 조직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러시아보다 더 근대적이었다. 반면에 러시아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조직적이지 못했으며, 국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중적인 지지의 결여는 물론이고, 패배주의라는 결함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세계 여론을 등에 업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일본은 짧은 교통망을 이용했으나 러시아군은 엄청나게 긴 단선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의지할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바이칼 호수 부근의 일부 구역은 아직 완공되지도 않았다" - 러시아의 역사, 니콜라스 랴자놉스키 승패에 대한 분석은 이래저래 많이 했었죠? 다시 정리하자면, 러시아는 질만해서 졌고 일본은 이길만해서 이겼습니다. 러시아는 덩치가 크고 잠재력은 있었지만, 역시 아직 발전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전제군주제에 부패하고 무능한 귀족들이 지배했고, 국민들은 교육되지 않은 농노들이 다수였죠. 속빈 강정이었던 겁니다. 이 많은 문제가 쌓인 상황에서, 국력을 제대로 쓰기 힘든 극동에서 이기기는 힘들었던 거죠.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망하게 되죠. 반면 일본은 이 전쟁에 대해 정말 제대로 준비를 했습니다. 육군은 프로이센식으로, 해군은 영국식으로 열심히 키웠고, 외교에서는 러시아를 고립시켰습니다. 훈련도는 오히려 러시아보다 좋았고, 심지어 무기에서도 러시아보다 좋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한국과 남만주라는,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까지만 먹고 강화했구요. 무기보다 정신력을 중시하고, 외교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대체 목표를 어디까지 뒀는지 알 수 없이 폭주했던 태평양 전쟁 때를 생각해보면 비교가 많이 되는 부분이죠. 이것만으로도 나라가 망할 정도의 위기를 겪었지만, 어쨌든 이길만하니 이긴 거죠.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당당하게 열강의 막차를 탑니다. 이제 일본이 열강이라는 걸 부정할 나라는 없었죠.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대등한 동맹이 되었고, 전후에는 미국과의 불평등조약을 갈아치웁니다. 이걸로 한국이라는, 대륙으로 나아갈 식민지를 얻었고, 랴오둥 반도에 조차지를 얻습니다. 일본의 좋은 시절의 시작이었고, 극우가 아니라도 러일전쟁까진 잘했다고 합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망가진 거라고 하죠. 이게 틀린 말은 아닐겁니다. 전쟁을 통해서 열강이 됐습니다. 군부의 위상이 커질수밖에 없었죠. 러일전쟁은 일본 입장에선 최고의 위기였기에 모두가 합심해서 겨우겨우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후엔 서로의 생각이 달라질수밖에 없었죠. 경제를 생각하면 정부에서는 당연히 군비를 줄이려 할 것이고, 군부에서는 그걸 싫어하죠. 문제는 이걸 정부에서 제어할수가 없다는 거였죠. 일본의 총리에겐 대신 임명권도, 파면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육군, 해군대신은 현역만 가능했죠. 이들이 안 하겠다고 하면 내각이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군부에 휘둘릴수밖에 없었죠. 거기에 군의 통수권이 덴노에게 있었습니다. 이래서 정부가 군부를 제어하려고 하면 덴노를 들이밀며 막았죠. 그러면서 열강들도 견제해야 할 정도의 군비증강을 합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른바 만철 이런 괴팍한 시스템은 일본의 외지(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철의 경비대로 시작한 관동군은 일본군 폭주의 상징입니다. 왜 이게 가능했을까요? 이들이 육군성의 지휘를 받지 않고 덴노와 직속이었습니다. 이 명목으로 그런 돌출행동을 저지를 수 있었던 거죠. 전시에야 대본영의 지휘를 받아야 하지만, 이들도 제대로 제어를 못 합니다. 러일전쟁을 통해 태어난 존재가 일본군의 암덩어리가 된 거죠. 일본군이 폭주하는 과정에서, 러일전쟁의 결과를 자기 입맛대로 잘 이용해 먹습니다. 러시아라는 압도적인 강대국을 이겼으니 영미도 이길 수 있다는 걸로요. 그 때는 뭐 이길 줄 알고 했냐, 하면 된다고 말이죠. 이미 러일전쟁 때 물자부족으로 정신력으로 떼우라는 말이 나왔고, 그런데 이겼으니 정신력만 강하면 다 된다는 식이 됩니다. 부족한 물자만큼 인명피해가 컸는데, 이에 대한 반성 대신 인명경시로 이어졌죠. 육군은 용감히 돌격만 하면 된다고 전차에도 돌격하는 등, 반자이 돌격이라는 최악의 형태를 만들었고 해군은 쓰시마 해전만 기억하고 함대결전사상에만 매달렸구요. 그때보다 더 발전해야 하건만 오히려 그 때의 상황에, 그것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꿔서 매달리고 있었던 겁니다. 犬일본제국이 열강이 되기 위해선 이겨야 되는 전쟁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제대로 반성을 하지 않고 더 달려가려고 했고, 결국 브레이크가 고장나 버렸죠. 그들에겐 위대한 승리였지만, 동시에 한 세대 후의 폭주의 불씨를 남겼고 실패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후... 그럼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올해 안에 끝나서 다행이네요. 그동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일본이 이기는 모습만 보여드렸군요. 새해 기념(?)으로 일본이 깨진 사건 하나를 더 다뤄보려고 합니다. '-')/ 기대해 주세요~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1-09 09:35)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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