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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24 01:18:03
Name   삼공파일
Subject   생명의 서(書) - 병원 임상 실습을 돌면서 느낀 점
#0.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가뭄으로 온 땅이 목말라 하던 올해 여름, 의사들과 환자들 사이로 때 아닌 모래 바람이 불어 닥쳤다. 몇 년 전 중동 지역에서 유행한 중동 호흡기 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MERS), 속칭 메르스가 순식간에 창궐하면서 전국의 병원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인균인 이 질환은 신종 감염병에 대한 정부와 의료 당국의 미비한 대처를 비웃듯이 퍼져나갔고, 이 바이러스는 한국 의료와 방역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비롯한 보건 의료인에게도 큰 상처를 남기고 환자 입장에 놓인 국민들에게도 불안감을 심어 놓았다. 메르스 사태가 한창이었을 때, 나는 의과대학 3학년 학생으로 한창 PK라고 불리는 병원 실습 과정에 임하고 있었다. 치료하는 사람도 치료 받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그 당시 병원이란 공간 사이사이를 메웠던 황량함을 피부로 느꼈다. 환자의 증례에 대해 공부하고 치료와 수술을 참관하며 임상 실습에 바빴던 와중에도, 전국을 강타한 이례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병원이란 어떤 곳인가, 의사는 누구인가, 앞으로 내가 되고자 하는 의사는 어떤 의사인가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다.

메르스는 정말로 이국적이고 생소한 질병이었다. 중동에서 온 바이러스가 원인이고 낙타가 주요 매개자라는 사실에다가, 메르스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어감까지 합해져서 이질감은 한층 더해진다. 메르스 여파가 몰아닥친 병원 안에 있다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즐겨 외우던 시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오직 알라의 신만이/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유치환이 쓴 [생명의 서]라는 시에서 사막의 심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중간 구절이다. 시에서 나타난 이 부분의 심상(心象)과, 내 눈 앞에 펼쳐진 병원이라는 현상(現象)이 너무나도 비슷했다. 아라비아의 사막처럼 건조하고 답답한 공간에 질병의 공포가 끝나지 않을 듯이 계속 내리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단어 그대로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끼고 있었다. 아라비아 사막을 나는 갔고, 그 길에 놓여 있던 부대끼던 생명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어 지금부터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

담도암 환자였다. 일상 용어로 쓸개라고 부르는 장기가 있다. 간 옆에 붙어 있는 작고 길쭉한 주머니인데 쓸개즙이라는 소화액을 분비하는 기능을 한다. 쓸개즙은 쓸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간에서 만들어지고 쓸개에 잠시 저장된다. 위에 음식물이 내려와 자극을 받으면 쓸개는 자신을 쥐어짜면서 소장으로 쓸개즙을 내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서 간과 쓸개, 쓸개와 소장 사이를 잇는 관이 여러 개 붙어 있다. 흔히 말하는 담석은 이 관에 콜레스테롤을 비롯한 노폐물이 쌓이면서 돌이 생겨 나타나는 질병이다. 쓸개는 꼭 있어야 하는 장기는 아니고 한 번 염증이 생기면 재발 가능성이 높고 기능이 돌아오기 어렵기 때문에 담석이 생기면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을 하게 된다. 담석은 쓸개와 관련되어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질병이고 따라서 쓸개제거술(cholecystectomy)는 가장 많이 하는 수술 중 하나다. 역시 외과 실습을 돌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이 담석 환자와 쓸개제거술이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이런 쓸개를 잇는 그 관인 담도에 암이 생긴 것이다.

환자의 생존이나 삶의 질과 관련하여 앞으로의 경과를 예측하는 것을 예후(prognosis)라고 한다. 담도암 환자는 보통 그 예후가 좋은 편은 아니다. 복잡한 구조에 발생한 암이고 재발할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담도암 환자 역시 쓸개제거술을 시행해야 하는데 이후 암의 진행 정도에 따라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실시하게 된다. 이 힘든 과정을 모두 견뎌내고 나면 사실 현대 의학도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 아니, 현대 의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많다. 이 환자가 받은 수술, 암의 진행 정도, 모든 치료들을 분석하고 자료를 모아서 정리하고 통계로 만든다. 그렇게 하여 어떤 치료가 효과적이고 예후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과학적으로 결과를 낸다. 이 결과를 놓고 전문가들이 토의하고 학설을 정립한다. 정립된 학설로 의대생들은 시험을 보고 전공의들이 치료를 하고 전임의들이 수술을 한다. 환자를 살리고 환자를 활동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병원은 불이 꺼지지 않는다.

암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로 암 치료 후에 5년이 지나도록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로 준한다. 현대 의학은 많은 것들을 하지만,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 그런데 기도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환자도 있다. 담도암 환자였다. 그런데 5년이 지나서 여러 장기에 다발성으로 전이가 일어난 재발 환자였다. 외과에서는 본격적으로 수술과 외래 진료를 하기 전에 새벽에 입원 환자들을 찾아가 회진을 돈다. 그리고 수술과 외래 진료가 모두 끝나고 또 한 번 회진을 돈다. 교수님 뒤에서 열심히 회진을 따라 돌면서 환자들을 만났다. 이 환자는 새벽과 저녁 내내 강도 높은 모르핀 주사를 맞고 있었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겉모습뿐이었지만, 분명히 그 안에는 기도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내였다. 아직 일흔이 되지 않은 아내였고 일흔이 조금 넘은 남편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따라 수술이 많아 교수님이 지친 상태로 회진을 갔었는데 조용히 남편을 불러냈다. 복도에서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 된 경우에는 여러 모로 어려워요. 다시 새롭게 치료를 시작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저희가 편하게 해드리는데 최선을 다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따님 오셔서 보라고 하시고…….” 남편은 교수님을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박사님, 나는 박사님만 믿어요. 여하튼 박사님이 다 책임지셔야 해!” 나는 확신할 수 있었는데 남편은 교수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욱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은 자신이 했던 말과는 정반대로 교수님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이 미칠 듯이 모순적인 상황을 보고 있을 때 순간 병원 복도에 숨이 막히게 하는 열기가 작열했다.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있었다. 여기는 아라비아 사막이었다. 불사신은 죽지 않는다. 병원에서 죽지 않는 것은 이 병원 모두를 뒤덮고 있는 모순이었다. 매일 태양이 뜨듯 병원에는 매일 모순이 작열하고 있었다.

며칠 뒤에도 수술이 많았다. 그날따라 수술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환자는 항상 많았고 수술도 항상 많았다. 또다시 지친 저녁이 되어서 회진을 돌았다. 남편과 아내가 불이 꺼진 병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교수님은 둘을 깨우려다가 잠시 망설이고 돌아섰다. 전공의는 모르핀 농도를 체크하고 간호사에게 어떻게 조절할지 오더(order)를 내렸다. 남편은 바닥에 딱 붙은 간병인용 침대에 엉덩이만 걸치고 상체는 벽에 기대어 잠들었고 아내는 침대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둘이 마치 한 몸 같았다.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을 보았다. 인간적인 고뇌였을까. 밤잠을 자기 전에 자꾸 생각났다. 나는 의사가 될 것이고 현대 의학이 할 수 있는 일을 위해서 공부하고 일할 것이다. 환자를 위해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를 위한 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남편과 아내를 위해 고민한 것은 오직 알라신뿐이었다. “오직 알라의 신만이/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내가 고민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방황하는 열사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그것 밖에는 없었다.


#2.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과학자가 되길 포기하고 의대 진학을 선택했을 때 생각이 많았다.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삶의 방향을 완전하게 틀어 버리는 문제였다. 면허증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제도에 합류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나에게 부여할 권한과 의무는 분명히 내 삶을 바꿔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간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의 문제였다. 윤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가 마주하면서 발생하는 공간이고 아마 나는 평생을 이 공간에서 허우적대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유일한 나침반은 나에게 신앙과도 같았던 과학, 그 과학으로 만들어낸 의학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해한 의대 교과과정은 그랬다.

병원 실습을 돌면서도 이러한 이해는 사실 달라진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의 이해는 나의 나침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나의 이해가 나의 나침반이 될 수 없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될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병원 실습은 형식적인 교과과정이 아니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났던 것이다.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시의 마지막이고 또 내 서(書)의 마지막이다. 다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배울 수 없거든 회한 없이 백골을 쪼이겠다. 이것이 의사가 되겠다는 나의 “생명의 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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