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12/21 20:13:17
Name   소라게
Subject   이상하게도 슬리퍼를 살 수가 없다
이상하게도 슬리퍼를 살 수가 없었다. 사러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남자친구와 가게를 갈 때면, 색이 마음에 안 든다던가 디자인이 별로라던가 심지어는 사이즈 핑계까지 대 가며 슬리퍼를 사지 않았다. 그러기를 몇 달이 지났을까. 또다시 팬시점에 들어간 순간, 남자친구가 물었다.

“아직도 안 샀어?”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였다. 나는 무척 신이 나서, 나이에 맞지 않는 샛노란 담요와 털 슬리퍼 세트를 사고는 굉장히 기분 좋아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꽃무늬 달력이라던지, 조그만 나뭇잎이 가득 그려진 데스크 패드라던지. 어느 회사를 가든 나는 한 살림을 차려놓는 성격이었다. 조그만 인형부터 사무용품까지, 예쁘게 모든 걸 갖춰놓는 일이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나마 내게 장점이 있다면, 나는 비교적 나를 잘 아는 편이라는 거다. 나는 타고나길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마치 원래 좀 행동이 느린 사람이 있고 성질이 급해서 팔짝팔짝 뛰는 사람이 있듯, 나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사람이었다. 정말이지, 사는 데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성격이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불안정한 성격이라고 알린다는 것은 나를 공격해달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직장을 갖고 일을 하려면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성격을 고칠 수 없다면 나를 달래줄 무언가를 찾기로 했다. 그러니 꽃무늬 달력을 첫 번째 저지선으로 삼자. 두 번째 저지선은 귀여운 인형. 세 번째 저지선은 데스크패드인 셈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내가 무슨 대단한 심미주의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영역 문제였다.

직장은 언제든 누군가 공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하지만 내 자리가 내 방하고 조금 비슷하다면, 내 취향의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면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정성들여 고른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채우고, 조그만 인형을 힐끔 바라보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저지선을 많이 만들었다. 회사 안의 저지선, 회사 밖의 저지선, 그러니까 내가 ‘아 미치고 팔짝 뛰겠네’ 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라앉을 수 있는 것들을 애를 써서 만들어 둔 것이다. 나는 이 전략이 퍽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내가 아주 커다란 상자를 마련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예전 회사 때처럼 좀 고생할 것 같았으니까. 나는 구석구석을 뒤져 내 물건들을 상자에 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온갖 서랍을 다 열어도 상자가 차지 않았다. 차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손으로 헤아려질만큼, 물건들이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서랍을 열어 보았지만 그 안에 내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노란 슬리퍼를 버렸던 게 언제였더라. 나는 반 년쯤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마 빨아도 더 이상 원래 색이 안 나오길래 휴지통에 던져 버렸던 것 같다. 그 뒤에는 꽃무늬 달력을 보다, 괜히 화가 나서 가방에 넣었던 것 같다. 그다음은 잘 모르겠다. 회사는 차츰 내 저지선을 하나씩 망가뜨려 가고 있었다. 철통처럼 완벽하게 나를 지킨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이 내 주변이 비워져 가고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통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개구리였다. 빨리 빠져나오라고 수많은 저지선들이 알람시계마냥 빽빽거리고 있는 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니. 사실 이건 거진 거짓말이다. 저지선이고 뭐고 사표를 던진 그 날 나는 이미 미치고 팔짝 뛰었으니까. 아니 그전부터, 더욱 예전부터 견디기 어려웠던 거다.

텅 빈 상자에 슬그머니 손을 넣었다. 이런 상자는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가방에 넣으면 그만이다. 살림을 차곡차곡 챙기는 대신 나는 좀 건설적인 일을 해 보기로 했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슬리퍼를 사야지. 드디어 슬리퍼를 살 마음이 들었다고 이야기를 해야지. 그리고 고르는 거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슬리퍼를.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1-01 12:11)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2
  • 이쁜 쓰레빠 고르시길^^
  • 노란 달력과 꽃무늬 슬리퍼가 내년 한 해를 축복해주길
  • 성장하고 있군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22 여행이름부터가 북쪽의 땅 - 노르웨이 16 호타루 18/10/28 7422 18
20 정치/사회이명박근혜식 통치의 기원(2) 6 난커피가더좋아 15/06/11 7950 0
812 일상/생각이방인 노숙자 7 멍청똑똑이 19/06/02 5914 36
1246 과학이번 카카오 사태에 가려진 찐 흑막.jpg 코멘터리 18 그저그런 22/10/25 4836 24
715 여행이별 후 홀로 여행 6 곰돌이두유 18/10/14 6652 35
510 일상/생각이별의 종류. 6 tannenbaum 17/09/16 8646 19
578 일상/생각이불킥하게 만드는 이야기. 28 HanaBi 18/01/16 5999 21
564 일상/생각이상하게도 슬리퍼를 살 수가 없다 21 소라게 17/12/21 7232 22
1334 역사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알기 위한 용어 정리. 1편 17 코리몬테아스 23/10/12 2718 27
1335 역사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알기 위한 용어 정리. 2편 6 코리몬테아스 23/10/14 2289 12
736 기타이야기의 마무리 44 지금여기 18/11/27 6281 50
1032 일상/생각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 7 아침커피 20/11/19 5255 21
1171 기타이어령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 7 아침커피 22/02/27 3932 53
1385 정치/사회이준석이 동탄에서 어떤 과정으로 역전을 했나 57 Leeka 24/04/11 4327 6
883 여행이탈리아(로마/아시시/피렌체) 여행 팁. 8 녹차김밥 19/11/07 5171 12
39 요리/음식이탈리안 식당 주방에서의 일년 40 뤼야 15/07/07 9692 0
40 요리/음식이탈리안 식당 주방에서의 일년(2) 29 뤼야 15/07/07 7710 0
42 요리/음식이탈리안 식당 주방에서의 일년(3) 20 뤼야 15/07/08 8848 0
44 요리/음식이탈리안 식당 주방에서의 일년(4) - 토마토소스만들기 29 뤼야 15/07/09 13575 0
46 요리/음식이탈리안 식당 주방에서의 일년(5) - 마지막 이야기 48 뤼야 15/07/11 8836 0
1247 정치/사회이태원 압사사고를 바라보는 20가지 시선 7 카르스 22/10/30 5217 29
489 일상/생각익숙한 일 13 tannenbaum 17/08/08 5606 18
1293 일상/생각인간 대 사법 3 아이솔 23/04/11 2434 17
401 기타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나라 15 烏鳳 17/03/28 6856 36
359 꿀팁/강좌인간의 일 22 moira 17/02/04 8153 16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