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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1/21 14:39:31
Name   quip
Subject   포맷과 탄띠
컴퓨터는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며칠 전 은행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로그인 오류가 자꾸 발생했다. 이어 컴퓨터 전체가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바이러스나 해킹일까. 재부팅을 시도했다. 무한재부팅이 시작되었다. 하. 여러 복구 방법을 검색했지만 실패했고, 컴잘알 친구를 불렀다. 컴잘알 친구는 대부분의 컴잘알 친구가 그렇듯, 포맷밖에 답이 없다고 말했다. 데이터를 친구 컴에 백업하고 포맷을 했는데, 안 된다.

친구는 컴퓨터를 뜯고, 안의 먼지를 보고 욕을 하며 스프레이 청소를 시작했다. 어라, 컴퓨터가 된다. 그리고 다시 죽는다. 여러 시도 끝에 친구는 그래픽카드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그래픽 카드를 들어내고 나니 컴퓨터가 작동하는 척 하다가, 다시 죽었다. 몇 가지 작업을 거친 친구는 메인보드도 맛이 간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은행 보안 프로그램과 먼지와 그래픽카드 사이에는 메타세쿼이아와 국민체조와 방글라데시 정도의 관계가 있는 거 아닌가 싶은데. 이 정도라면 종교와 신앙의 영역이 될 수 있다. 물론 컴못알인 나는 그럴싸한 가설을 제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컴퓨터 본체 내의 먼지가 그래픽 카드 포트를 중심으로 메인보드 전체의 물리적 손상을 야기했고, 은행 보안 프로그램은 일종의 양질전화적 모멘트, 티핑 포인트를 제시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메타세쿼이아와 국민체조 사이의 은밀하고 관능적인 관계라거나 카트리나와 투아모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종교라 부른다. 아니 시팔, 먼지 좀 먹었다고 죽는 게 어딨어 임마 대한민국 국민은 이 미세먼지에서도 살아가는데 빠져가지고.

아무튼 부품을 주문하고 해서 그저께 어떻게 컴퓨터를 살렸다. 그리고 공허하다. 두 개의 하드를 쓰고 있었는데, 한쪽 하드는 주로 옛 데이터를 쌓아두는 곳이고(편의상 D드라이브라 칭하자) 다른 하드는 주로 유틸리티와 작업중인 데이터를 쌓아두는 곳이다(편의상 C드라이브라고 칭하자. SSD이시다). 그리고 OS는 물론 C에 깔고 쓰고 있었는데, 이걸 포맷해버렸고 백업한 자료를 아직 안 받았다. 오늘 받아야지. 왜 그저께 컴퓨터를 고치고 바로 안 했을까.

자, 그러니까 이제, 컴퓨터가 된다. 되기는 한다. 내 어떤 데이터도 없는 채로 말이다. 아, 작년에 번역한 책이거나 재작년에 작업한 책이라거나 뭐 그런 쓸모없는 데이터뭉치나 드라마 따위가 담긴 D드라이브는 잘 달려있지만 그건 별로 의미 없는 것들이다. 내게 의미있는 것들, 그러니까 지난 주에 작업하던 프로젝트 회의록이라거나 인터넷 쿠키파일 같은 게 하나도 없다. 드나들던 사이트에 들어갈 때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고, 즐겨찾기도 싹 사라졌다. 머리가 굳는다. 아, 나는 뭐지, 어떤 사람이지. 컴퓨터를 켰는데 할 게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아, 컴퓨터를 고치자마자 디아블로를 깔았으니 디아블로를 할 수도 있겠다.

하드디스크란 일종의 전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클템이 사실상 하드디스크라고 선언할 수 있다.

사실 프로젝트 파일 같은 건 하루 이틀 안 본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다. 중요한 건 내가 aiko의 라이브 영상과 뮤비들을 전부 C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C드라이브에는 중요하고 현재적인 문제들이 담겨 있고, D드라이브에는 과거의 망령들이 배회한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자료를 어디에 보관할 것인가, 하는 건 역시 실용적인 문제를 넘어 철학적인 문제가 된다. 그리고 나는 장렬히, 철학적으로 패배했다. 왜서, 왜때문에, 아. 아무튼 나는 며칠간, 거의 일주일간, 컴퓨터 화면으로 삶에 필요한 영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론 폰으로는 보았지만 그런 걸로 삶이 살아질 수는 없다. 우루사로 간암 고치자는 이야기다.

유투브에 있는 몇 없는 영상이라도 볼까, 하고 조금 전에 유투브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참사를 목도했다.

그저께, 컴퓨터를 고치고, 이유 없이 양동근이 듣고 싶었다. 오랜만에 들으니 꽤 좋군. 그렇게 유투브로 몇 곡을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 순결한 컴퓨터를 통해 유투브로 처음 재생한 건 양동근이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래. 그리고 다시 들어간 유투브는 아니 무슨 양동근 사생팬이 되어 있었다. 모든 추천 동영상의 썸네일에 양동근의 얼굴이 떠 있다. 아득하다.

하여 아득한 채로 정신없는 글을 남긴다. 피할 수 없으면 같이 죽자, 는 심경으로 양동근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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