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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1/31 21:57:51 |
Name | 소라게 |
Subject | 힐링이고 싶었던 제주 여행기 上 |
내게는 17세의 내가 남긴 마일리지가 있었다. 남겼다고 하면 웃긴 말이지만, 그때 영국에 가면서 쌓아둔 마일리지가 신기하게도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이야, 내가 어렸을 때 퍽이나 도움이 되는 짓도 했네. 그때 내가 지금 나를 본다면 아무래도 실망할 게 한두가지가 아닐 텐데. 그래도 그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조금도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안 난다. 삶에 있어서 몇몇 사건들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겪어야 한다면, 절대 사절이다. 그냥 이대로 망하는 게 낫겠다. 진심이다. 나는 충동적으로 제주도 행 티켓을 끊었고 그대로 아무 계획도 짜지 않았다. 그리고 적당한 핑계를 찾았다. 이건 힐링 여행이다. 좋다. 아주 좋은 말이다. 나는 힐링을 해야 하니까 일체의 귀찮은 여행 계획을 짤 수가 없다. 그렇게 머리 굴리면서 일정을 짜고 시간대별로 따라간다는 건 자기파괴적인 행위가 아닌가. 나는 근처에 먹을 곳이 많고 푹신한 침대가 있는 숙소를 골랐다. 정말로 하루종일 게으름이나 피울 생각이었다. 그러고는 정말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숙소에 와 있었다. 그러니까 난 정말로 힐링이란 걸 해볼 작정이었다. 숙소 일층에서 뭔가 멋진 밥을 먹고 펍에 가서 맥주를 근사하게 마시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숙소도 꽤 근사한 펍과 음식점들, 인테리어가 되 있는 곳으로 갔는데. 캐리어를 질질 끌던 내 눈에 흑돼지 만두가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얼마나 그럴듯해 보이던지. 나는 캐리어를 말 그대로 던져 두고 만두를 사러 나갔다. 편의점이 있길래 맥주도 네 캔 샀다. 그런데 좀만 걸으면 하나로 마트가 나올 것 같길래 한참 걸어서 제주도 토속 술을 샀다. 만두를 양껏 입에 넣고는, 술을 마음껏 마셨다. 토속 술에서는 뿌리 맛이 났다. 그런데 그냥 뿌리가 아니라 오렌지 맛이 가미된 뿌리였다. 술병이 꽤 예뻤기 때문에 나는 그걸 버리지 않고 창턱에 예쁘게 전시했다. 그래, 이러면 돈이 좀 덜 아까운 것 같다. 다음날 나는 지도 앱을 켰다. 사실 내게는 또 문제가 하나 있다. 문제는 거리관념이다. 내 거리관념은 어딘가 망가져 있다. 성산일출봉까지는 한 2.5km 정도였다. 그러니 왕복은 오 키로, 거기 가서 일출봉에 올라가면 더 늘어나겠지만 나는 정확하게 앞부분만 기억했다. 그 정도면 걸을만 하네. 버스를 기다리기 귀찮았던 나는 그대로 슬렁슬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채꽃이다. 가는 곳마다 유채꽃밭이 보였다. 한 장에 천 원이라길래 들어가서 찍을까 망설였지만 그러지 말기로 했다. 한 장의 아름다운 셀카를 건지기 위한 그 과정을 겪을 자신이 없었다. 손 시려서 주머니에서 꺼내기 싫었다는 이야기를 공연히 길게 쓰면 이렇게 된다. 조금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갈대밭. 의외로 성산일출봉까지는 멀었다. 광치기 해변에 언뜻 보니 올레길 표지가 있었다. 저기나 걸어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운 좋게도 성산일출봉에 올라갈 때쯤 하늘이 갰다. 혼자서 와, 하다가 눈치 한번 보고, 또 와, 하다가 눈치를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대로 우와 우와 하고 있었다. 아무도 날 모르는데 뭔 눈치람. 미친 사람처럼 굴기로 생각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정상에서 사진을 또 한참 찍고는 그대로 내려왔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돈가스가 먹고 싶었다. 정확히는 성산리 표지판을 보고 난 뒤부터였다. 흑돼지 돈가스가 근사하긴 하지만 항구까지 와서 또 뭔 돈가스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괜찮아 보이는 가게가 보였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쉬는 날. 바다가 잘 보이는 음식점에나 가야지,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꽃새우와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빠에야. 추운 데서 떨다가 먹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후딱 다 해치우기에도 무리였다. 바다가 보였으니까. 예쁜 빛이었다. 계속 쭉 보고 싶었지만,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나와 다시 걸었다. 눈이 그치나 싶더니 또 내린다. 제주 날씨는 영국 날씨만큼 변덕스러웠다. 생각보다 멀리 걸어온 탓에 바로 숙소로 가고 싶었지만, 해변으로 향하는 길을 보니 또 새고 말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더 걸어갈 수가 없었다. 꽁꽁 언 손이 새빨개질 때까지 계속 서 있었다. 다시 구름이 끼고 흐린 하늘이 될 때까지. 모든 모습들을 담아두고 싶어서. 귤 네 개를 사 들고 숙소에 돌아와 옷을 벗고 나서야, 오늘 꽤 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대충 가늠해 보니 못 해도 너덧 시간은 걸어다닌 것 같았다. 이게 내가 생각하던 힐링 여행이 맞나. 빡센 건 안 한다면서 그렇게 떠났던 것 같은데. 내일은 무리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맥주캔을 열었다. 그리고 물론.........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늘 그렇듯이.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2-12 08:23)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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