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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04 02:11:33
Name   박초롱
Subject   잘 지내요?..

「잘 지내요?..」

어느 목요일, 과외하러 가기 전 꽤나 시간이 비어서 오랜만에 동기들과 뜨거운 코트를 누빈 뒤 농구의 끝은 치맥이라며 소맷자락을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 자취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는 사이에 좀처럼 울리지 않는 핸드폰의 진동음이 들린다. 툭하면 과외를 미루려는 그 녀석의 문자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그리 길지 않은, 그리고 낯선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누굴까.'

어찌 보면 매우 무례한 문자다.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나의 안부를 물어오는 이 사람. 개인정보를 몰래 빼내서 악용하는 보이스 피싱이 만연한단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개인정보(?)를 용감하게 캐묻는 당신은 누구란 말인가.

「누구시죠?」

라고 문자를 입력하려던 찰나 핸드폰 액정화면의 시계를 보고 다급히 가방을 꾸려 집 밖을 나섰다. 아, 오늘은 과외 시간에 조금 늦겠구나. 지하철은 놓쳤고 택시를 타야겠구나. 피 같은 내 돈.




반년 가까이 과외를 하고 있는 이 청순한 여고생은 본인이 수학이 약해서 그걸 보충하기 위해 이과를 선택했단다. 아, 뇌도 청순한 게 틀림없다. 그걸 역으로 가다니. 게다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수학을 포기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면서 5지 선다에서 높은 확률로, 그러니까 50% 확률로 정답을 맞추는 데도 이 아이의 부모님은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굳이 과외를 붙여주었다. 그 정도 찍기 실력이면 대단하지 않느냐, 확률적으로 따지면 찍었을 때 정답률은 20%지만 이 학생은 50%니까 무려 2.5배의 적중률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님 이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과외를 해서 학비를 벌어야 하는 고학생에게는 제의를 거절할 만한 깡다구가 없었다.

특타와 펑고를 하면 공격과 수비가 나아져야 하는데 한 두 달 가량 과외를 해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무너지는 성적을 보면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창 의구심을 가질 때 즈음 모의고사를 함께 풀어보니 역시 이 아이는 반전이 있었다. 알겠다 싶은 문제에 너무 시간을 과투자한 탓에 후반부를 미처 찍지도 못하는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일단 모르겠다 싶은 문제를 먼저 찍고 알겠다 싶은 문제를 표시해서 풀어나가기 시작하는 뉴 메타를 적용한 결과 어찌저찌 성적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나는 과외계의 김성근 감독인가, 그럼 나는 몇년 뒤에 짤리겠구나 같은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내게 어머님은 뭐가 그리 좋으신지 늘 밝게 웃어주신다. 어머님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신다면 그런 웃음이 나올까요 저는 어머님이 sk 프론트같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은 못한다. 그냥 나도 멋쩍게 웃어주는 거다.

공교육 11년차에 접어들어 드디어 시험칠 때 시간배분이라는 개념이 있음을 깨달은 이 여고생은 이제는 제법 혼자서도 자기 페이스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고 이 아이가 성장한만큼 과외는 조금 지루해진 감이 없잖아 있다. 연습장에 끄적이며 문제푸는 아이를 보고 이젠 너 혼자서도 잘 하는구나, 난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지만 명예직이라도 주지 않으련 이런 망상을 하던 찰나 아까 온 문자가 갑자기 생각났다.

"야, 이 문자봐봐. 무슨 뜻인 것 같아?"

3초쯤 고개를 갸우뚱하며 보던 여고생은 문득 내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는다. 내 얼굴이 그런 웃음을 자아내는 외형은 아닐텐데.

"쌤, 이거 옛날 여자친구가 보낸 문자같은데요? 존댓말하는 거 보니 연하랑 사귀셨나봐요? 올, 의외로 능력자셨네요?"

"옛날 여자친구가 왜 이런 문자를 보내?"

"에이.. 왜 그래요. 헤어지고 나서 시간 지나니까 쌤 생각이 났나부죠. 뭐, 술을 한 잔 하셨다거나? 킥킥."

능력자는 찍어도 5할치는 너가 능력자겠지. 어쨌거나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머리 속이 헝클어지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어영부영 과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씻고 티비 좀 보고 컴퓨터를 켜서 동영상도 좀 보고 시간을 보내어 어영부영 자정이 되어 침대에 누웠는데 오늘 무엇을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 여고생이 했던 말만 계속해서 머리를 울리는 거다.

'옛날 여자친구.'

그러하다. 굳이 장진 감독의 인문학적 추리를 끌어오지 않아도 정황상 옛날 여자친구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 같았다. 특히 물음표 뒤에 찍힌 온점 두 개에서 밀려오는 뭔가 이 형용할 수 없는 미련과 후회 혹은 회한의 감정은 당사자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런 것이었다. 액정 너머에 찍힌 그 온점 두 개가 그렇게 마음을 울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유력한 추리에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모태솔로라는 사실이다. 정황이 아무리 유력해도 나에게 옛날 여자친구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아니 누굴 사귀어 본 적이 없는데 옛날 여자친구가 있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고 억울하기만 한 상황이란 말인가.

기껏 여고생과 상의를 해볼까 하다가 자존심때문에 누굴 사귀어 본 적 없단 말은 못 하고 얼버무리고 온 탓에 이제 추리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누굴까, 누굴까, 누굴까, 누굴까. 혹시 잘못 보낸 건 아닐까. 아니면 구 남친이 번호를 바꿨는데 내가 그 번호로 갈아탄 건 아닐까. 그래 맞아. 그런 거겠지. 설마 누가 날 짝사랑했을 리는 만무하고 말이야. 에이 자자하며 베개를 고쳐 베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렸다. 그런데.




핸드폰이 울린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내가 알람을 맞춰놓았을 리는 없다. 걸려온 번호는 내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지는 않은 모르는 번호이긴 하나 뭔가 낯설지가 않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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